눈보라 치는 날/조태일
별안간 눈보라 치는 날은
처음엔 풍경들은 풍경답게 보이다가는
그 형체들은 끝내 소리도 없이 묻힌다
눈보라가 치는 날은 술을 마시자
술을 마시되 체온을 생각해서 마시자
눈보라가 치는 날은 술을 마시자
술을 마시되 약간의 낭만을 위해서
국경선을 떠올리며 마시자
눈보라가 치는 날은 술이 없으면 어찌하나
눈보라가 치는 날 국경선이 안 떠오르면
어찌하나,
눈보라가 치는 날 두근거리는 가슴 없으면
어찌하나,
신문지 위에나 헌 교과서 위에다가
술잔을 그리고 새끼줄이라도 칠 일이다
앵무새 입부리라도 그리고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
이런 자음이라도 열심히 그릴 일이다
신문이나 교과서의 글씨가 안 보일 때까지
눈이 침침할 때까지,뒤집힐 때까지
그리고 또 그릴 일이다
눈보라가 치는 날은
처음엔 풍경들은 풍경답게 보이다가는
그 형체들은 끝내 소리도 없이 묻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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