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들 자리싸움… 화학무기도 쓴다
식물들 자리싸움… 화학무기도 쓴다 |
금년에도 봄이 시작되면서 공연스레 마음이 설레고 발길이 바빠졌다. ‘뒤꼍의 텃밭을 일궈서 남새라도 좀 뜯어먹자’는 심보이겠으나 실은 깡촌놈의 피는 못 속여서, 뭔가 심어 키워야 하는 사육본능(飼育本能)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흙살 찌우겠다고 산자락의 덤불에서 낙엽을 긁고, 소나무 삭정이를 꺾으며, 상수리 떡갈나무의 도토리 깍정이까지 모아와 불 질러 재를 받아 밭두렁에 흩뿌린다.
밭에 씨를 아무나 뿌리는가. 해 보지 않은 일은 언제나 서툴다. 소밀(疏密·성김과 빽빽함)에 대한 감각이 둔해서 배게 아니면 듬성듬성 뿌리기 일쑤다. 언젠가 지나가면서 던진 어느 아주머니 말처럼 “봄 채소는 큰 놈부터 솎아먹고 가을 것은 잔 놈을 빼먹는다”는데, 때가 되면 솎아내어 끼리끼리 간격을 맞춰줘서 경쟁(競爭)을 피하게 해준다. 열무, 배추, 시금치가 무슨 다툼질을 한단 말인가? 몰라서 하는 소리다. 쭈그리고 앉아 열무 골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그것들이 물 있고 양분(거름)이 진한 쪽으로 뿌리를, 햇살 쪽으로 잎을 뻗어내어 제 먼저 넓은 터를 잡겠다고 피 터지는 쌈질을 한다. 한마디로 그놈들도 동물과 한 치의 차이도 없이 공간을 확보하느라 투쟁이 치열하다. 촘촘하게 심어놓은 열무를 그대로 두고 보면 튼실한 종자에서 싹튼 놈이 부실한 것들을 짓눌러버리고 몇 놈만이 득세(得勢)하여 성세(盛世)를 누린다. 먹이와 공간(food and space)을 차지하려고 생존경쟁이 불길 같다. 약육강식 그 자체다. 넓은 공간을 차지하면 많은 먹이(meat)를 얻고, 따라서 여러 짝(mate)과 짝짓기를 할 수 있다. 하여 모든 동식물이 더 많은 자손에 더 좋은 씨받기를 하자고 그렇게 다툰다. 재미있는 것은 열무나 들깨를 골골이 가득 뿌려놓으면 독종(毒種)인 바랭이, 개비름도 얼씬 못한다. 인해전술의 의미를 여기서도 찾게 된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어느 식물이나 뿌리와 잎줄기에서 나름대로 다른 종(種)에 해로운 생장억제 물질을 분비하니 이것을 타감작용(他感作用)이라 하고, 영어로는 알레로패시(allelopathy)라 한다. 소나무 밑에 다른 식물이 못 자라는 것은 갈로타닌(gallotannin)이라는 타감물질(allelopathic substance)을 소나무 뿌리가 분비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다. 잔디밭 한구석에 자리잡은 토끼풀이 잔디와 싸우면서 영역을 넓혀가는 것도 토기풀이 분비한 화약(火藥), 타감물질의 힘이다. 어디 그뿐인가. 채소들도 띄엄띄엄 나 있으면 바랭이가 쳐들어오지만 빽빽하게 난 열무나 들깨들이 힘을 합쳐 독을 뿜어대면 엄두를 못 낸다. 널따란 사막에 자로 잰 듯 일정한 간격으로 자리잡은 선인장 군집(群集)도 제자리매김을 한다는 것이다. 잔디밭에 가득 핀 노랑민들레나 산비탈의 주인 개망초들이 함부로 나 있는 것이 아니다. 새싹 때부터 박이 터지도록 싸워 줄줄이 그렇게 곧추서 있다. 식물의 세계도 우리가 보는 것처럼 그렇게 평화롭지 못하다. 참 잔인한 세상이로다! 텃밭에서 소채류의 모진 생명력을 하루도 빼지 않고 바라보았기에 이런 글을 쓴다 생각하니 그들이 나의 스승임에 반론의 여지가 없다. 흙냄새 실컷 맡고, 흙살 뒤집어써서 심성정(心性情)까지 부드러워지고 깨끗해졌다. 게다가 싱싱한 채소까지 뜯어 먹으니 말 그대로 꿩 먹고 알 먹기다. 내가 좋아하는 루소의 말을 좇아 오늘도 밭이라는 자연(自然)으로 돌아간다. 강원대학교 명예교수(okkwon@kangwon.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