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액냄새 화사한 밤꽃 그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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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늘 다시 가보고 싶어 하며 그리워하는 길들이 몇 군데 있습니다.
그 중 한 곳이 남원에서 지리산을 넘어 구례로, 구례에서 줄곧 오른쪽 옆구리에 섬진강을 낀 채
하동으로, 거기서 더 내려가 남해로까지 이어지는 19번 국도입니다.
1992년 늦여름 그 길을 지날 기회가 있었는데, 허름한 함석지붕을 인 나지막한 집들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선 마을에는 밤나무들이 무척 많았었습니다.
밤나무가 손에 손을 잡고 늘어선 그 조붓한 길과 착해빠진 얼굴의 마을사람들,
간간이 들려오던 눈 큰 소의 우렁차고 긴 울음을 은비늘 같은 물결 위에 싣고
잔잔히 뒤채며 서두르지 않고 유장히 흐르던 맑은 섬진강과, 산 아래로 차근차근 이어지던
계단식 논두렁의 그 부드럽고 질박한 곡선...
그때 밤나무들은 소담스런 연두빛 밤송이들을 활짝 피워 올리고 있었는데 그 광경은
신선한 충격이며 새로운 발견이었지요. 밤은 그저 송이송이 열리는 것인 줄만 알았더니
사실은 꽃처럼 아니, 꽃보다 더 곱게 피어나더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던 것입니다.
수많은 밤송이가 한 나무 가득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피어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으신지요...?
만일 보지 못했다면 내년엔 꼭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 * 밤나무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공연히 서론이 길었군요.
밤나무는 아시아․유럽․북아메리카․북아프리카 등의 온대지역에 분포하고, 10∼15m의 키에
지름 30∼40cm까지 자랍니다. 우리나라에 자라는 밤나무는 흔히 재래종과 중국종이며,
재배관리가 수월하고 경사가 급한 지형에서도 비교적 쉽게 재배할 수 있는 데다
저장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이미 삼한시대의 유물 칠기 속에서 밤톨 몇 개가 발견된 적이 있고
고려․조선시대에는 비상식량 삼아 밤나무 심기를 장려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답니다.
밤은 도토리처럼 번거로운 가공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먹을 수 있는 데다 실하고 맛있어서
누구나 좋아하는 대표적인 견과류이므로, 곡식이 모자랄 때 귀한 밥 대신 구황식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냈으리란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밥 대신 먹을 수 있는 열매가 달린다고 [ 밥나무 ] 라 했던 것이
점차 부르기 쉬운 [ 밤나무 ] 로 변했으리라는 설과, 혹은 [ 붙은 씨 ] 를 뜻하는 [ 붇 ] 에서 →
받 → 발 → 발암 → 바암 → 밤으로 변천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는데
저는 전자에 더 공감하고 있습니다.
한자 [ 율(栗) ] 은 나무에 꽃과 열매가 아래로 드리워진 모양을 본 딴 상형문자라는군요.
밤에는 탄수화물․당분․단백질․지방․비타민․미네랄 등이 균형 있게 들어 있고
특히 비타민B1은 쌀의 4배, 비타민C는 견과류 중 가장 많이 함유되어 포도와 맞먹을 정도인데,
껍질이 두꺼워 구워도 손실되지 않는답니다. 근력을 강화해 주고 뼈를 단단하게 해 주므로
회복기 환자나 하체 약한 사람, 걸음마가 늦은 어린아이에게 좋으며, 위장과 콩팥을 보강해 주고
혈액순환을 도우며, 지혈작용까지 있는 등 한약재로도 매우 긴요하게 쓰입니다.
밤은 껍질에 윤기가 흐르는 중간 크기의 것이 맛있는데, 만일 밤송이 안에 세 알이 들어 있다면
가운데 것이 가장 약효가 높다는군요. 또한 김장 때 밤나무나 참나무 잎을 김칫독에 깔고 그 위에
김치를 넣으면 빨리 시지 않는다고도 해요.
게다가 목재로도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해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도 밤나무로 지었는데,
참나무 식구답게 재질이 단단하여 내구성이 좋고 물과 습기에 강하므로
침목․가구․선박․악기․칠기와 조각의 원목으로 널리 쓰였으며 사당의 위패․제상(祭床)뿐 아니라
신주단지도 밤나무를 깎아서 만든다고 합니다.
이렇듯 제구 재료로 낙점을 받은 이유는 대부분 식물이 싹을 틔울 때 콩나물처럼 종자의 껍질을
뒤집어쓰거나 밀고 올라오게 마련인데, 밤나무는 그 껍질이 뿌리와 줄기의 경계 부근에
아주 오래 - 다소 과장이 섞였는지 확인해 보지 못해 알 수는 없지만 10년에서 100년까지도
썩지 않고 달려 있어서 근본을 잊지 않는, 즉 조상을 잊지 않는 나무로 여겨졌기 때문이랍니다.
열매인 밤도 차례상이나 제사상에 절대 빠지지 않는 제물인데,
제사상 진설에 있어 대추․밤․감․배 즉 조율시이(棗栗枾梨)라는 차례가 정해진 이유는
대추는 씨가 하나로 나라의 임금을 상징하여 신위측에서 볼 때 제일 우측이고,
밤은 밤송이 하나에 세 톨씩 들어 있어 3정승을 의미하니 두 번째 놓이고,
감은 씨가 여섯이니 6조 판서로 세 번째, 배는 씨가 여덟이니 8도 관찰사로 마지막이라는군요.
왜 그렇게 놓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배운 대로 조-율-시-이만 외우고 있던 저는,
그 순서 안에 일국의 행정부를 그대로 옮겨 놓았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아서,
과일 하나 하나에 그런 의미를 담아 차례를 정하고 배열한 우리 조상님들의 의미심장한 은유가
참으로 기가 막힐 뿐입니다.
밤은 열매도 열매지만 꽃도 세인의 입에 자주 오르내립니다.
사실 색깔․모양․향기 어느 것 하나 변변한 꽃이라 할 것도 없어 보이지만, 밤꽃은 보기와 다르게
꿀이 풍부하여 아까시 다음으로 쳐주는 밀원식물이며, 아르기닌이란 성분이 들어 있어
심한 설사나 이질․혈변에 효험을 보인답니다.
무엇보다, 6월 초부터 피는 밤꽃 향기는 특이하여 구설수에 종종 오르곤 하는데,
옛날에는 남자들의 정액냄새와 흡사한 이 냄새를 양향(陽香)이라며 민망해 하여,
밤꽃이 필 때면 부녀자들은 외출을 삼갔고 과부는 더욱 근신하였다 합니다.
서양에서도 밤꽃 향기는 「남자의 향기」에 비유되었습니다.
평소 새침하던 여인도, 밤나무 숲을 함께 산책하면 사랑을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말이 있는데,
아마도 남성적인 밤꽃 향기에 취해서 그런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될 것 같습니다.
밤나무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전해지는데 대표적인 것이 원효대사의 탄생 설화입니다.
원효의 어머니는 유성이 뱃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꾼 후 만삭이 되어 친정으로 가던 중,
지금의 경북 경산군 압량면 남쪽 불지촌 밤나무 숲을 지나다 갑작스런 산기를 느끼고
남편의 옷을 밤나무에 걸어 이슬을 가린 채 해산했답니다. 그래서 옷을 걸었던 밤나무라 하여
「사라수(裟羅樹)」라 부르게 되었고, 그 열매 또한 스님들의 바리때를 하나 가득 채울 만큼
유난히 커서 「사라율」이라고 하며 지명도 「율곡(栗谷)」이 되었다는군요.
율곡 이이 선생의 아버지인 감찰공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 신사임당은 혼인한 지 5년 되던 해,
이 공은 공부를 위해 10년 작정을 하고 서울로 떠납니다.
드디어 약속한 10년이 지나 아내가 있는 강릉으로 한달음에 달려가던 이 공은 며칠을 걸은 끝에
강원도 대화땅, 지금의 평창에 이르러 주막에 묵게 되었습니다. 이 공이 곤한 잠에 떨어진 야심한
시각, 방문이 열리고 소복단장한 주막주인이 주안상을 차려 들어오며 하룻밤 가연 맺기를
간절히 청해오는 것이었으나 단호히 뿌리치고,부부는 10년만에 재회하였답니다.
그 후 신사임당은 흑룡(黑龍)이 어린아이를 안겨주는 꿈을 꾸고는 태기를 느꼈는데,
그즈음 이 공은 과거를 보기 위해 다시 서울로 가게 되었습니다. 평창 근처를 지나던 이 공은
전날 주막집 여자에게 너무 몰인정하게 대한 것이 마음에 걸려, 그 집을 다시 찾았겠지요.
그날 밤 이 공이 여인을 불러 사과하고 같이 지내자고 하자 그녀는 정색을 하고
[ 비록 주막을 하여 먹고 사나 그런 여자는 아닙니다. 제가 배운 것은 없지만 오가는 사람을 많이
보아 기색을 대강 살필 줄 아는지라 그날 당신의 얼굴에 서기가 서린 것을 보고 귀한 자식을
낳아볼까 하는 욕심에 여자로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리하였으나, 지금은 그런 서기도
사라졌을 뿐더러 이미 부인의 몸에 귀한 아드님이 잉태되어 있사온데 제가 공연히 정조만
더럽힐 필요가 있겠는지요 ] 하고 딱 잘라 거절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 그 아이가 인시(寅時)에 출생하게 되므로 일곱 살이 안되어 호환(虎患)을 당하게
될 터인 즉 그것이 걱정이올시다 ] 하니 이 공은 그 여인이 범상치 아니함을 깨닫고, 그때까지의
무례를 정중히 사과한 후 호환을 면할 방도를 간곡히 묻자
[ 천 명의 생명을 살려야 하는데, 대신 밤나무를 천 그루 심으면 그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외다.
다만 아이가 일곱 살 무렵 늙은 중이 와서 아이를 보자 하거든, 아이를 숨기고 밤나무를 보이면
무사할 것입니다 ]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공은 그 길로 다시 집으로 돌아가 신사임당에게 전후 사연을 말하고 고향집인 화석정 주위에
부지런히 밤나무 천 그루를 심었답니다. 과연 그해 12월 어느 날 인시에 아들을 낳았으니
이 공은 특별히 밤나무를 키우는 일에 전심전력하였는데, 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 여인의 말대로
늙은 중이 찾아와 아이를 찾으니, 이 공은 여인이 시킨 대로
[ 나는 이미 밤나무 천 그루를 심어 적덕하였으니 내 아들에게 손대지 말라 ] 고 호통 치고,
뒷산의 밤나무 숲을 보여주자 그 중은 천 그루가 맞는지 일일이 세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를 매었던 한 그루가 말라 죽어 천 그루를 채우지 못하자, 그 중은 천명을 거역하려느냐며 화를
내는데, 갑자기 어떤 나무가 [ 나도 밤나무 ] 라고 소리치며 천 그루를 채우더랍니다.
결국 호환을 면한 이 공의 아들은 잘 자라서, 임진왜란을 예견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하고
밤나무 식재론을 제창한 당대의 성리학자, 율곡 선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곡의 고향에는 지금도 밤나무와 비슷한 [ 나도밤나무 ] 란 나무가 있는데
율곡을 살려냈다고 하여 [ 활인수(活人樹) ] 라 하고, 그 나무가 있던 고개는 율목치(栗木峙) -
밤나무재, 동네 이름도 율곡리, 선생의 호도 율곡이라 칭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답니다.
사실 나도밤나무는 밤나무와 아주 비슷하지만 밤 대신 빨갛고 작은 열매를 맺는 나무로
참나무과인 진짜 밤나무와는 아무 혈연관계가 없는 나도밤나무과의 나무입니다.
그런가 하면, 울릉도 작은 마을에 어느 날 산신령이 나타나
「이 산에 밤나무 백 그루를 심어라. 어기면 큰 재앙이 있을 것이다」라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사람들은 부랴부랴 밤나무를 백 그루 심고 정성껏 가꾸었는데, 다시 나타난 산신령이 세어 보니
한 그루가 모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다시 한번 세기를 간청하였고, 이번에도 역시
...아흔 아홉... 하고 끝인데 옆에 서 있던 작은 나무가 느닷없이 「나도 밤나무」하더랍니다.
깜짝 놀란 산신령이 「너도 밤나무냐?」하고 재차 묻자 「예, 틀림없습니다」라고 대답하여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마을 사람들은 「너도밤나무」라 이름 짓고 아끼며 가꾸었다고 합니다.
울릉도 서면에는 너도밤나무 군락이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는데,
참나무과에 속하며 세계적 희귀수종으로 울릉도에만 자생하는 우리나라 특산종 나무랍니다.
이렇듯 밤나무에 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 심기·가꾸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 사람들의 생활에 밤나무가 얼마나 중요했나 하는 것을 단편적으로 알 수 있으며
밤나무 식재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장려했음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왕 나온 옛날이야기니 「남성 심볼의 크기」와 밤나무에 얽힌 이야기 하나 더 하겠습니다.
옛날 한 과부가 형제를 데리고 살았는데 욕심쟁이 큰아들이 전 재산을 가지고 분가하자
과부는 어린 작은 아들과 살게 되었답니다. 너무 가난해진 과부는 남편의 제사가 가까워졌지만
큰아들은 신경도 쓰지 않더랍니다.
어느 날, 착한 작은 아들은 나무 하러 갔다가 밤 세 톨을 주워, 가장 큰 것은 아버지 제사에 쓰고,
중간 것은 어머니에게, 가장 작은 것은 자기가 먹기로 작정하였지요.
돌아오는 길, 작은 아들은 우연히 으리으리한 기와집에 닿아 도깨비들이 은방망이를 두드리며
「떡 나와라, 밥 나와라」하는 걸 보게 되었습니다.
음식을 본 작은 아들은 허기가 져 무심결에 밤 한 톨을 입에 넣었고 '딱' 밤알 터지는 소리에
도깨비들은 집이 무너지는 줄 알고 질겁하여 도망치자 작은 아들은 은방망이를 들고 돌아와,
소원을 들어 주는 귀물 덕에 아버지의 제사는 어느 때보다도 잘 차릴 수 있었습니다.
당근, 큰 아들은 깜짝 놀랐겠지요...? 착한 동생을 구슬러 자초지종을 듣고 난 큰 아들은
그 길로 밤 세 톨을 들고 도깨비집을 찾아가서 밤 한 톨을 요란스럽게 깨물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한 번 속은 후 화가 날 대로 난 도깨비들은 도망은커녕 우르르 몰려들어
몰매를 주고도 분이 풀리지 않자 큰 아들의 신(腎)을 서른 다섯 자나 잡아 늘려 버린 것입니다.
큰 아들이 축 늘어진 자신의 그것을 등에 걸머지고 돌아오자, 그의 아내는 시동생을 찾아가
이제 무슨 재미로 살겠느냐며 훌쩍훌쩍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딱하게 여긴 작은 아들은
은방망이를 가지고 형을 찾아가 한 번 두드릴 때마다 한 자씩 줄여 나갔는데,
형수가 가만 보고 있으려니 이런 식으로 간다면 그게 아예 없어져 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급한 나머지 「내 몫으로 한 뼘만 남겨 줘요. 한 뼘만...」라며 애원했고,
작은 아들은 형수를 생각해 그녀의 소원대로 「한 뼘만」남겨 주었는데,
이런 연유로 남자의 그것은 딱 「한 뼘」이 되었다는 겁니다.
믿거나 말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