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시인이 될 수 있다(2)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다.
최동호 교수는 생각하기와 말하기를 능숙하게 일치시키는 사람이 유능한 시인이라고 하였다.
생각에만 집착한다면 관념적인 시를 쓸 것이며, 말하기에만 집착한다면 요설적인 시는 한 인간이 겪은 많은 느낌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시의 표현에 왕도는 없다. 간절함, 사랑함, 진실함 그 적막함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감정의 응축으로 맑고 투명하면서도 분명함이 보여야 한다. 그리움이나 간절함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시의 길을 걸을 수 있으며 문학의 그늘에서 뜨거운 열정을 식힐 수가 있을 것인가.
시인은 뜻과 감정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될 수 있다. 정서와 운율적 언어를 통하여 인생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기쁨이나 슬픔, 사랑과 같은 감정을 그 긴장된 상태에서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짧은 진술을 통하여 표현한 단 형의 운율적인 글로써 시는 정보전달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정서적 감동이라는 분위기의 공유와 영혼의 울림을 그 목적으로 한다.
그윽하게
빛나는
사람
참으로
만남이네
--정영자 <사람에게> 전문
만남의 감동을 이 말 이외의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고요하게 그러나 분명히 남다른 맑음과 밝음으로 다가선 사람에 대한 영혼의 전율은 이렇게 밖에 묘사할 수 없었다.
시는 사실의 언급, 정보전달에 따르는 언어의 정확성, 질서화, 논리화를 배척하고 정서의 환기에서 기인되는 애매성, 직관성, 비논리성을 추구하며 그것은 상상력에 의존한다. 따라서 시는 감정의 환기 및 상상력의 깊이 있는 활용에 그 본질이 있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한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이냐
위로하며 껴안으며
서로가 서로를 또닥거린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냐
--허형만의 <파도>에서
생각하며 상상되는 다양한 감정들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을 우리는 시인이라고 한다.
멀리 있는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 쓰듯 서정의 간결함으로 청순한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 또한 시의 영역이다.
오랫만에
브람스의 선율에
가을이 쌓이고 있습니다.
풍경처럼
아름다운 사람들과
즐거운 식사를 합니다.
밥알 속에
브람스의 콩나물이
솟고 있습니다.
--정영자의 <브람스의 콩나물> 전문
시월의 가을 숲 속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풍경과 집안 가득히 흐르고 있는 브람스의 선율은 밥알 속에 콩나물의 상징인 음표가 솟고 있는 환상에 젖게 한다. 음악과 음표와 콩나물과 낙엽 쌓이는 가을에 젖기 전에 사람에 젖으며 그 순간의 공간에 빠져들 때 우리는 자기 생애의 귀중한 시간과 공간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감동은 언어로 표현될 때 시가 되는 것이다.
시는 감정만이 아니라 사상과 역사에 대해서도 응축된 강렬함으로 표현된다.
역사가 우리에게 이르기를
아직은 깃발을 내리지 말라 한다
아직은 희망을 버리지 말라 한다
--허형만의 <역사가 우리에게 이르기를>에서
시는 발상의 전환, 평범 이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논리를 가진다. 또한 예언적 지시를 내림으로써 이상향 건설이라는 비젼을 제시한다. 이육사나 이상화의 시는 그 보기가 된다.
남들은
내가 사는 목포역을
종착역이래요
더는 내려갈 곳도 없는
그래서 남들은
사공의 뱃노래만
서럽게 서럽게 노래 불러요
그러나 아빠는
내가 사는 목포역을
시발역이래요
나주 지나고 이리 지나고
서대전 지나고 서울도 지나
저 북녘의 신의주까지
씽씽 달릴 수 있는
대한민국 국도 1호선의
출발점이래요
아,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목포발 신의주행
기차는 신바람 날 거예요
목포역도 흥겨워
더덩실 어깨춤을 출 거예요
--허형민의 <목포역> 전문
서정시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보내는 연민의 말하기다. 그러나 그 연민은 개인에게서 인류전체의 고독이나 연민으로 확산될 때 공감의 폭은 커다.
수용미학에서 독자의 기대지평이 상승작용을 하여 베스트셀러 시집이 탄생한다.
정호승의 <외로우니까 사람이다>가 그 예가 된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이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낮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정호승의 <수선화에게> 전문
시의 창작이란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은 세계를 새롭게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에 직접체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인의 개인적 체험이 보편성을 얻기 위해서 그것을 여과하고 증류하여 시적으로 변용 시켜야 한다.
개인적 체험은 원료가 도고, 그것을 충분히 가공하여 형상화 시켜 독자의 보편성을 획득할 때 시가 되는 것이다.
차를 몰다가 엔진이 꺼져버리면 어떡하죠
알맞게 슬픔은 마이너스된 세상 슬픔을 주유하는 곳이 있다면
슬픔을 한 트렁크 담아오고 싶어요
언제였던가요 영안실 빈소 앞에서도 눈물 한방울 나오지 않던
사막의 마음, 그 비정함 때문에 간간이 고지대 수돗물처럼
흘러나오던 참으로 비참하던 기억
울고 싶으면 울어야 인간적이죠 그러나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죠
굳세고 단단한 무쇠여야 살아남을 수 있죠
살아남기 위해 단단히 열쇠를 채워두었던 슬픔의 창고
그 창고를 열고 싶어요
슬픔은 나약한 자의 것, 우울은 가난한 자의 것,
오감이 폐기처분된 세상은 플라스틱 가구처럼 깨끗하죠
깨어지지도 부서지지도 않는 플라스틱 세상 속에
전 마네킹이 되어가죠
아 그리운 슬픔, 아 그리운 그리움
말라버린 나무를 보며 난 생각하죠
슬픔은 얼마나 아름다운 생수인가를
슬픔을 주유하고 싶어요
입안 가득 슬픔의 잎새를 물고 필리리 필리리…
푸르르게 슬퍼지고 싶어요
--송유미의 <슬픔을 주유하고 싶다> 전문
개인적 체험을 증류하고 여과하여 슬픔이 에너지원이 될 수 있는 보편적 체험으로 변용 시키는 시적 은유는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개인적 체험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노출증 증세를 보이는 시인도 많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진실되게 드러내는 작업은 진실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럴 때 호소력이 있는 것이다.
욕이 시가 될 수 있는 경우를 최승자의 시에서 살필 수 있다. 끝행의 「오 개새끼/ 못 잊어!」의 처연한 서정이 시를 만들었다.
너는 날 버렸지,
이젠 헤어지자고
너는 날 버렸지,
산 속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날 버렸지
수술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을 때
시멘트 지붕을 뚫고 하늘이 보이고
날아가는 새들의 폐벽에 가득찬 공기도 보였어
하나 둘 셋 넷 다섯도 못 넘기고
지붕도 하늘도 새도 보이잖고
그러나 난 죽으면서 보았어
나와 내 아이가 이 도시의 시궁창 속으로 시궁창 속으로
세월의 자궁 속으로 한없이 흘러가던 것을
그때부터야
나는 이 지상에 한 무덤으로 누워 하늘을 바라고
나의 아이는 하늘을 날아다닌다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나쁜놈, 난 널 죽여 버리고 말 거야
널 내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거야
내 아이는 드센 바람에 불려 지상에 떨어지면
내 무덤 속에서 몇 달간 따스하게 지내다
또다시 떠나가지 저 차가운 하늘 바다로,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오 개새끼
못 잊어!
--최승자의 전문
패러디 시는 문학의 고갈이라는 위기의 증후로 기술복제 시대의 필연적 산물로 태어나서 한국현대시의 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우리들은 약속 없는 세대. 노상에서 태어나 노상에서 자라고 결국 노상에 죽는다. 하므로 우리들은 진실이나 사랑을 안주시킬 집을 짓지 않는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발끝에 끝없이 길을 만들고, 우리가 만든 그 끝없는 길을 간다.
우리들은 약속 없는 세대다. 하므로, 만났다 헤어질 때 이별의 말을 하지 않는다. <거리를 쏘대다가 다시 보게 될 텐데, 웬 약속이 필요하담!>--그러니까 우리는, 100퍼센트, 우연에, 바쳐진, 세대다.
--장정일, <약속 없는 세대> 부분
만해의 <님의 침묵>의 한 구절을 인유적으로 패러디화한 이 작품은 하나의 완연한 산문으로서의 세대론이다. 이론과 문학의 언술 사이의 구분이 희미해질 만큼 이론적이고, 웅변의 글만큼 그 어조가 선언적이다. 이 세대론은 역시 과거와 현재와의 통시적 차이성·이질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약속 있는 세대'와 '약속 없는 세대'의 차이다. 만해 시의 세대에서 만남은 필연적이고 목적적이다. 그러나 '약속 없는 세대'에 있어 만남은 우연적이고 목적이 아닌, 어디까지나 하나의 '과정'이다. '약속 없는 세대'에게 '과정은 모든 것'이며 그리하여 이 세대의 세계관은 반목적론적이다.
현대시의 논리화는 주목되는 변화 양상이며 탈중심화의 기교이며 변두리의 가치를 발견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패러디 시는 미적 문맥뿐만 아니라 보다 사회 역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문맥에 위치시킴으로써 현대시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불가피적인 현상을 보인다. 상품화를 이용하면서 상품화에 도전하고, 타락된 세속에 빠져들면서도 타락된 세계를 비판하며 연속성 가운데 비연속성을 보이는 모순과 이중성을 가진다.
도덕성·순수성·명분성이 위대하고 가치 있는 것이지만, 당당하고 깨끗하며 위대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이, 너무나 많은 작고 보잘 것 없고 명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 대한 존재를 망각하고 있었던 것은 반 인간주의 적이고 패권주의, 계급투쟁, 이념 지상주의, 우월주의, 물신주의, 도학적 선비정신의 난무를 초래한 것은 아닐는지.
요란스럽지 않게 하잘 것 없는 것처럼 생각되어서 잊고 있었던 것을 일깨우는 동심·생명· 환경의 문제를 표현해야 할 때이다.
문명성/자연성의 이분법적 대립을 자연스럽게 해소하여 그 안에 깃들인 신성을 노래해야하며 오염된 세상엣 유일하게 자신의 꿈속에만 빠져 있는 낭만주의와, 유아독존의 엘리트주의를 넘어 인간의 욕망이 헛됨을 성찰하고 생명체의 무한한 에너지를 노래하자.
도취나 지나친 엄숙성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산을 오르며
우리는 입을 모아
"엄-마-"하고
크게 불러 보았습니다
가슴이
찡하였습니다
산을 내려오며
우리는 입을 모아
"아-버-지-"하고
크게 불러 보았습니다
날개라도
달고 싶었습니다.
--김용석의 <소풍날> 전문
가슴에 담긴 생각과 정감을 간추려 표현할 때, 그리움이나 간절함의 무목적성은 하나의 뚜렷한 서사가 되어 우리 안에 자리한다. 그것이 독자에게 읽혀질 때, 그것이 독자의 동감을 획득할 때 그것은 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