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들

시 제목 선정의 중요성

능선 정동윤 2011. 9. 20. 16:08

제목을 사람으로 말하면 그 사람의 얼굴이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을 어느 정도는 간파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제목을 보면 그 시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제목이 '무제'인 경우를 접하게 되면 독자들은 당황하기 마련이다.
말 그대로 제목 '題'이 없다 '無'는 의미일텐데, 제목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제목으로 선택한 의도가 무엇일까를 고민해야 한다.

 역설적 의미를 담은 것일 수도 있겠고,

내용 자체가 제목이 없는 것에 대한 내용일 수도 있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제목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다거나

그저 무성의한 제목 붙이기에 다름 아닐 수도 있겠다.

이렇게 다양한 내용을 암시할 수 있다는 것은 풍부하게 정서를

환기시킬 수 있지 않겠나 하겠지만

그만큼 애매할 수도 있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제목부터 애매한 시는

결국 애매한 시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용 없는 시가 어디 있겠는가?

파도에 휩쓸려도
산꼭대기에서 떨어져도
돌멩이가 되리라.

새싹이 돋아나고
태양이 다시 떠오르 듯
이제
웅덩이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리라.

기적 소리를 멀리하고 떠나가는
열차의 바퀴에 치어
가늘게 떨고 있는 손가락의 기억을
잊을 수 있는
하얀 새가 되리라.

(고교생 작품, '무제')

위에 제시된 시는 제목 '무제'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 수 없을 뿐더러

세 가지의 되고 싶은 존재가 연결 고리없이 흩어진 채 끝맺고 있기 때문에 차라리

'무제'라는 제목을 붙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그러나 제목은

시가 갖고 있는 내용을 어떤방식으로든지 암시해 주어야 한다. 제목도 시의 일부이다.
유치환의 '깃발'은 이를 잘 드러내준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白鷺)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 '깃발')

시의 본문에서는 '이것은'으로 제목 '깃발'을 지시해 놓고 '소리 없는 아우성',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 '애수(哀愁)',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이라고 은유되어 있다.
제목을 뺀 본문에는 '깃발'이라는 시어를 찾아볼 수가 없다.

여기에서 제목 '깃발'이 언급되지 않았다면 위에
열거된 비유의 원관념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어렵다.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이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신석정.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제1연)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박두진, '해' 제 1, 2연)

이 시들은 제목은 다르지만 같은 내용을 형상화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제목이 '해'인 만큼 '해야 솟아라'는 표현은 광명의 세계를 추구하는 내용일 테고,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역시 촛불을 켜야 할 어둠의 시간을 거절한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같은 내용을 암시하는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