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시(詩 능선)

늙은 거미/박제영

능선 정동윤 2011. 9. 22. 07:52

늙은 거미/박제영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거문개똥거미가

마른 항문으로 거미줄을 뽑아내는 것을 본 적이 있나,늙은

암컷 거문개똥거미가 제 마지막 거미줄 위에 맺힌 이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죽은 할머니가

그러셨지 아가, 거미는 제 뱃속의 내장을 뽑아서 거미줄을

만드는 거란다 그 거미줄로 새끼들 집도 짓고 새끼들 먹이도

잡는 거란다 그렇게 새끼들을 다 키우면 내장이란 내장은 다

빠져나가고 거죽만 남는 것이지 새끼들 다 떠나버낸 늙은

거미가 마지막 남은 한 올 내장을 꺼내 거미줄을 치고

있다면 아가,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수의를 짓고 있는

거란다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자신을 위해 만드는 처음이자

마지막 거미줄이란다 거미는 그렇게 살다 가는 거야

할머니가 검은똥을 쌌던 그해 여름, 할머니는 늙은

거미처럼 제 거미줄을 치고 있었지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