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시(詩 능선)

싸움/이상국

능선 정동윤 2011. 9. 25. 22:44

싸움/이상국

 

 

여러 해 전이다

내설악 영시암에서 봉종 가는 길에

아름드리 전나무와 등칡넝쿨이

엉켜 붙어 싸우고 있는 걸 보고는

귀가 먹먹하도록 조용한 산중에서

목숨을 건 그들의 한판 싸움에

나는 전울을 느꼈다. 그리고

적어도 싸움은 저쯤 돼야 한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었다

산속에서는 옳고 그름이 없듯

잘나고 못나고가 없다. 다만

하늘에게 잘 보이려고 저들은

꽃이 피거나 눈이 내리거나

밤낮없이 살을 맞대고

황홀하게 싸우고 있었던 것인데

올 여름 그곳에 다시 가보니

누군가 넝쿨의 아랫도리를 잘라

전나무에 업힌 채 죽어 있었다

나는 등칡넝쿨이 얼마나 분했을까 생각

했지만

싸움이 저렇게도 끝나는구나 하고

다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