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시(詩 능선)
아내의 재봉틀/김신용
능선 정동윤
2011. 9. 28. 15:05
아내의 재봉틀/김신용
수의를 만들면서도 아내의 재봉틀은
토담 귀퉁이의 조그만 텃밭을 깁는다
죽은 사람이 입는 옷, 수의를 만들면서도
아내의 재봉틀은 푸성귀가 자라고
발갛게 익은 고추들이 널린 햇빛 넓은
마당을 깁는다
아내의 가내공장, 반 지하방의 방 한 칸
방 한가운데,다른 가구들은 다 밀어내고
그 방의 주인처럼 앉아 있는 아내의 재봉틀
양철지붕 위로 뛰어다나는 맨발의 빗소리 같은
경쾌함으로
최소한의 생활을 자급자족 할,
지상의 집 한 칸을 꿈꾸고 있다
지금,토담 안의 마당에서는 하늘의 재봉틀인 구름이
비의 빛나는 바늘로 풀잎을 깁고
숲을 깁고, 그 속에 깃들어 사는 생명들을
깁고 있을 것이다
모든 생명들 기운
자국 하나 없이 깁는 고요한 구름의 재봉틀은
그 천의무봉의 손이듯,아내의 재봉틀은
지상의 마지막 옷,수의를 지으면서도
완강한 생활의 가위로 시간의 짜투리까지 재단해
가계의 끈질긴 성질을 깁는다
양철지붕 위를 뛰어다니는 맨발의 그 빗소리에 젖으면
나는 어느 새 안개의 재봉틀이 된다
눈앞을 흘러가는 세월을 그저 두루뭉수리로 지워
버리고 싶은,그 안개의 재봉틀이 되어 웅크리고 있을 때
아내의 재봉틀은
물 위에 부레옥잠처럼 파르라니 눈 뜬다
줄기 아래 부레처럼 생긴 구근을 매달고 있어
물 위를 떠다니며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그 부레옥잠처럼 눈을 떠
맨발의 빗소리 같은 따가운 침묵의 바늘로
가계의 지울 수 없는 역사를 역설한다
이제 무덤에 묻힐 사람이 입는 옷,
수의를 만들어 하루를 꾸리면서도
아내의 재봉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