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당선작

진열장의 내력/임경섭 2009/중앙일보

능선 정동윤 2011. 10. 5. 10:42

진열장의 내력/임경섭

 

 

누르면 툭- 하고 떨어지는

아침, 삼푸통 마지막 남은 몇 방울의 졸음 있는 힘껏 짜낸

김 대리는 네모 반듯하게 건물 속으로 들어가

차곡차곡 쌓인다 날마다 김 대리의 자리는 한 블록씩 깊어진다

아래층 이과장은 한 박스 서류 뭉치로 처분 되었다지

누군가 음료수를 뽑아 마실 때마다 덜컹 내려앉는 일과,

버려질 것을 아는 이들도 사방으로 설계된 빌딩 속으로

차례차례 몸을 누인다

모든 가게의 비밀은 진열장에 숨어 있다

이리저리 굴러다녀야 할 것들을 가득 담아 놓은 과일바구니

모인 것들은 축축한 바닥에 한 번도 튕겨 보지도 못하고

뿌연 먼지로 내려지는 셔터를 기다려

어둠 속으로 무른 멍 자국을 감춘다

바닥에 떨어지거나 모서리에 부딪쳐 생긴 것보다

서로에게 짓이겨 생긴 멍 자국에서 과일은

더 지독한 향기를 뿜는다

곯은 사람들로 붐비는 퇴근길은 진한 매연 냄새를 풍기고

김 대리는 살구를 고른다 먼지 닦아가며 고르다가 떨어뜨린

살구 한 알 탱탱하게 굴러가는 것을 본다

짓무르지 않은 것들은 저렇게 꿋꿋이 굴러다니는데

쌓여 있어서 한 쪽으로 절뚝이는 것들아

살구를 주우로 가는 김 대리의 발자국에 통증처럼

저녁이 배고 높은 허공으로 신음처럼 새가 난다

곧지도 않고 함부로 꺾이지도 않는 길을 가는 새의 둥근 비행

그 아래서 김 대리는 둥글게 몸을 말아 살구를 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