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읽기

[조선상고사] 한국 민족주의 역사관의 정수

능선 정동윤 2014. 2. 21. 08:52

 

[고전 소개]

조선상고사는 처음에『조선사』란 이름으로 조선일보에 연재되어 당시 독자들로부터 절대적인 환영을 받았던 것으로, 이를 1972년 ''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에서 전집을 간행하면서 <조선상고사>란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중국이 감추고 왜곡한 증거들을 제시하고, 우리나라의 사대주의자 및 식민사관에 젖은 사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축소되었던 우리 고대사의 참모습을 논리적으로 복원하였다.

[저자] 신채호 (1880~1936)

본관 고령(高靈). 필명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 호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大德郡) 산내면(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하였다. 1897년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그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논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로 활약하였으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앙양에 힘썼다. 1907년 신민회(新民會)와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등에 가입·참가하고, 이듬해 순 한글 《가정잡지》를 편집·발행하였다.

또한 《대한협회보(大韓協會報)》 또는 《기호흥학회보(畿湖興學會報)》 등에 논설을 발표하고 1909년 일진회(一進會) 성토에 앞장섰다. 1910년 4월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 후 중국 칭다오[靑島]로 망명, 그곳에서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권업신문(勸業新聞)》에서 활동하다가, 1914년 이 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그 해 남북 만주와 백두산 등 한국 민족의 고대 활동무대를 답사하였다. 1915년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한청년회(新韓靑年會) 조직에 참가하고, 박달학원(博達學院)의 설립 운영에도 힘썼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 의정원(議政院)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나, 한성임정(漢城臨政) 정통론과 이승만 배척운동을 내세워 공직을 사퇴하고 주간지 《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과 맞서기도 하였다. 그 후 비밀결사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단장, 신대한청년동맹(新大韓靑年同盟) 부단주(副團主) 등에 피선되었다. 1923년 민중의 폭력혁명으로 독립의 쟁취를 부르짖고 임시정부 창조파(創造派)의 주동역할을 하다가 다시 베이징[北京]으로 쫓겨가 다물단(多勿團)을 조직 지도했으며, 중국과 본국의 신문에 논설과 역사논문을 발표하였다.

19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 1927년 신간회(新幹會) 발기인, 무정부주의 동방동맹(東方同盟)에 가입,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하여 외국환을 입수,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基隆港]에서 피체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旅順] 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옥사했다. 적과 타협없이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 이와 같은 견해가 곧 그의 역사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고조선(古朝鮮)과 묘청(妙淸)의 난(亂)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고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近代史學)의 기초를 확립했다.

저서에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 《조선사론(朝鮮史論)》 《이탈리아 건국삼걸전(建國三傑傳)》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이순신전(李舜臣傳)》 《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조선상고사] 한국 민족주의 역사관의 정수
* 고구려 연대 삭감설 :
   고구려 초기의 연대가 100~200여 년 삭감됨.
   고구려와 한나라사이의 9년전쟁: 한나라의 군주 한 무제의 침략으로 시작. 한 무제(BC 156~BC87)의 재위기간(BC141~BC87) 한무제의 재위기간은 고구려 건국 전 삼국사기의 고구려(BC 37~AD668) 고구려 건국이 BC37년 더 앞서야 한다는것이 전제 되어야 함. 고구려가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보다 훨씬 앞서서 건국. 현재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연대는 100년~200년 정도 삭감.
9년간의 혈전으로 한나라를 패퇴시킨 것이 고구려이다.
1) 고구려가 멸망했을때, 당 나라 고종이 그의 신하 가언충과 문답. 고구려가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BC37년부터 AD668년까지라면705년에 불과한데 여기서는 적게는 800년 많게는 900년을 유지한 나라라고 말하고 있음.
2) 삼국사기와 달리 광개토대왕의 비문에서 광개토왕이 시조 주몽으로부터 17세손이라고 기록
3) 우리 학계에서 바라본 삼국의 건국 순서: 고구려->백제->신라로 이해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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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3대 원소: 시, 지, 인 -시대와 지역과 그 속에 있는 인간이라는 뜻 역사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뤄지는 것,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지으란 것이요. 역사 이외에 무슨 딴 목적을 위하여 지으라는 것이 아니요. 자세히 말하면 객관적으로 사회의 유동

 

[조선상고사] 한국 민족주의 역사관의 정수

지명이동설: 고대사에 보이는 지명--중국 등지에서 만주와 조선으로 민족이 이동(그 지명을 한반도 안에서 사용) 역사 서술방법: 계통구하기 --역사서술에서 단편적이고 개별적인 듯한 사실을 시간적인 순서를 따라 통일적으로 연결하거나 체계화시켜 서술 하는 것 심습 제거: 심습이란 마음의 습관, 편견이나 선입견을 제거하고 사실의 객관적인 인식에 힘쓰라는 것. 역사의 주체란???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세력을 어떤 존재로 보았느냐는 것. 근대사학의 과제와 밀접하게 관련

 

[조선상고사] 한국 민족주의 역사관의 정수

신채호의 역사관 단재선생의 사료 비판 구사 비판 1 중국측 사료 중심 비판---조선열전에 보면중국망명자들의 침략사(중국 침략자들의 입장옹호) 2) 한국측 고서에 대한 비판 정신도 과감.--김부식에 대한 조선을 멸시하는 중국측 사서와 그 정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  김부식의 한국 역대역사-고구려, 백제의 선조인 부여 삭제. 강역을 압록강 이동부터 확정.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의 역사 삭제. (김부식의 삼국사기) 단재의 사료 비판 방법: 1. 역사연구에 필요한 진짜 사료와 가짜사료를 구별하는 방법 2. 고증론에서 어떤 사실을 사실로 입증하기 위한 몇가지 방법 호증: 여러 사료들에 나타난 사실을 서로 참조하여 고증 추증: 어떤 사실을 가지고 다른 사실을 미루어 논증하는 방식 반증: 반대되는 사실에서 그 사실의 진실을 논증 변증: 잘못된 기록을 변증하여 그 잘못의 사실을 찾아내고 정확함을 밝히는 논증방식 (역사적 사실을 논증하는 중요한 방식)

 

[조선상고사] 한국 민족주의 역사관의 정수

단군시대로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가 담기어 있다. 1931년에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하였고, 1948년에 종로서원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책이다. 본디 이 책은 신채호의 《조선사》 서술의 한 부분이었는데, 연재가 상고사 부분에서 끝났기 때문에 《조선상고사》라고 불리고 있다. 전12편으로서 편명은 1편 총론, 2편 수두시대, 3편 3조선분립시대, 4편 열국쟁웅(列國爭雄)시대 대(對)한족격전시대, 5편 (1)고구려전성시대, (2)고구려의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6편 고구려·백제 양국의 충돌, 7편 남방제국 대(對) 고구려 공수동맹, 8편 3국혈전의 시(始), 9편 고구려 대수전역(對隋戰役), 10편 고구려 대당전역(對唐戰役), 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등이다.

제1편 총론에서 신채호는 그의 역사이론을 전개한다. 그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서의 역사’를 파악하고 있다. 즉, 그는 역사발전의 원동력을 사물의 모순·상극(相克) 관계에서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헤겔류의 소박한 변증법적 논리가 도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그는 이러한 모순·투쟁 관계가 역사로서 채택되기 위해서는 시간적인 상속성과 공간적인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총론에서 저자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하여서는 사료의 선택·수집·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역사학연구의 방법론으로서의 실증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이념과 방법을 제시하면서 신채호는 과거의 사대주의적 이념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서술한 유학자들과 당시 근대적인 역사학을 한다던 식민주의 사가들을 비판하고, 그 비판 위에서 이 저술의 목적과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종래의 한국사의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새로운 인식체계를 수립하였다. 종래의 단군·기자·위만·삼국으로의 계승과 단군·기자·삼한·삼국으로의 계승되는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신채호는 실학시대의 이종휘(李種徽)의 《동사(東史)》에서 영향을 받은 듯, 대단군조선·고조선·부여·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체계를 수립하였다.

 

[조선상고사] 한국 민족주의 역사관의 정수

[문]"조선상고사" 본문에 수록된 5가지 내용 중 하나를 선택하고, 앞서 배운 신채호의 역사관을 참고하여 평가해 보세요.

[답] 고구려 건국연대 삭감설을 중심으로 설명하자면,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BC37에 개국하여 AD668년에 멸망함으로서 705년간 존속하였는데 단채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신라를 우위에 두기 위하여 고구려의 역사를 200년간 축소하였다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입론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첫째, 고구려가 멸망 했을 당시(668) 당나라 고종이 그의 신하 가언충과 문답에서 고구려 비기에 의하면 고구려가 건국후 900년만에 80대장에 의하여 멸망당한다는 내용이 있다는 것과 동시대 신라문무왕이 안승에 대한 고구려왕 책봉문서에서 고구려 시조 중모왕이 나라를 세운지 800년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
둘째로 광개토왕의 비문에서는 광개토왕이 시조 주몽으로 부터 17세손이라고 기록하여 삼국사기 기록에 의한 고구려왕실 세계도의의 13대보다 4대나 더 많다는 것,
셋째로 한사군 설치당시(BC108)에 이미 고구려가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을 들고있다.
이와같이 단채의 입론은 애국심에 기초한 터무니 없는 주장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문헌기록에 근거한 실증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그렇게 하여 실증사관을 앞세운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하여 훼손되어 가는 민족자존의 역사를 회복하려는 학자적 노력과 치밀한 탐구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김부식이 당시에 입수가능한 국내기록에 입각하여 술이부작의 태도로 비교적 공평하게 삼국의 역사를 기록했으며, 주몽의 고구려 건국년대는 관련 금석문이나 고고학적 자료상 사실과 가까운 기록으로 보고있다. 그리고 건국연대가 축소된 것이아니라 주몽이 세운 고구려는 이미 그 지역에존재하고 있던 선행왕권, 즉 중국기록에 의하면 소노부왕권, 우리 기록에 의하면 비류국을 대치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웠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있다.
그리고 실질적인 삼국의 건국순서는 삼국사기기록과는 달리고구려→백제→신라순서로 이해되고 있는데 이는 고대왕국체제를 갖춘 순서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정하여 말살하려는 일제의 식민사관의 입장이 아니라면 부족연맹등 국가연원에 대한 전승이라면 수긍할 수도 있는 기록이라고 볼 수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한국침략을 합리화 하기위하여 실증자료를 앞세워 한국의 고대역사의 진실을 말살하려는 식민사관과 함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사대주의의 입장에서 역사를 왜곡했다는 선입관을 갖고 그에 맞추어 관련 자료를 짜맞추어 실재가능성이 희박한 사실을 역사적 진실이라는 주장하는 민족주의 역사관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라고 본다.
다만 단채가 제시하였던 역사기록에 관한 여러문제에 대하여 선입견을 갖지 말고 관련기록, 금석문과 고고학자료등을 지속적으로 검증하여 올바른 우리나라 역사의 진실울 찾아야 할 것이다.

[조선상고사] 한국 민족주의 역사관의 정수
기록을 어떻게 남겨야하는가? 기록하는 역사가는 어떠해야 하는가?  있는 그대로의 일을 사실적으로도 기록하는 것도 어려움이 있구나!

우리가 사는 삶에서 자신의 의지와 신념 등이 얼마나 확고하여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때론 쉽게 가려고, 때론 시대가 원해서, 권력에 아웅하기 위해서, 아니면 자신의 편견에서 등등 차라리 모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자신을 속이지는 않는 것으로 위로를 받는다.

조선상고사를 보면서 일제강점시대에 우리의 민족의 근원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이국에서 역사의 현장을 탐방하고 자료를 모아 역사서를 작성하는 단재선생님의 모습을 그려본다. 혹독했으리라 여긴다.

민족의 앞날이 어둠속에서 언제나 밝음으로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키며 선념에 따라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저를 부꾸럽게 한다. 가끔은 나 자신도 못지키고, 속이고도 지나가는데,,,,,

앞으로 더 많은 학자들이 우리민족의 근간에 대해서 단재 선생께서 제시한 내용에 대한 뒷바침을 더 했으면 좋겟다. 그 과정에서 민족의 입장보다는 과학과 이성적인 고증이 되어지길 바라고 그 결과가 우리민족의 5천년의 역사를 고스란이 드러내주었으면 한다.

강의 해주신 이교수님께 고마움을 전하며 기술분야인 저에게 인문학의 중요함을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하여주신 점도 고맙습니다.  

[조선상고사] 한국 민족주의 역사관의 정수
신채호의 역사이론이 전개되어 있다. 그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서의 역사’를 파악하고 있다. 즉, 그는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사물의 모순·상극(相克) 관계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헤겔(Hegel)류의 소박한 변증법적 논리가 도입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그는 이러한 모순·투쟁 관계가 역사로서 채취되기 위해서는 시간적인 상속성과 공간적인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총론에서는 역사학 연구의 방법론도 제시되어 있다.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사료의 선택·수집·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실증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이념과 방법을 제시하면서, 신채호는 과거의 사대주의적 이념에 입각해 한국사를 서술한 유학자들과 당시 근대적 역사학을 한다는 식민주의 사가들을 비판하였다. 그 비판 위에서 이 저술의 목적과 성격을 뚜렷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종래의 한국사의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새로운 인식체계를 수립하였다. 종래의 단군·기자·위만·삼국으로 계승된다는 인식체계와 단군·기자·삼한·삼국의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신채호는 실학시대 이종휘(李種徽)의 동사에서 영향을 받은 듯, 대단군조선·3조선·부여·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체계를 수립하였다. 대단군조선과 불·신·말의 3조선설에는 문제가 많지만, 그가 이러한 체계를 위해 전후삼한설(前後三韓說)을 주장하고 삼한의 이동설을 제시한 것은 고대사 연구에 큰 자극을 주었다.

둘째, 이러한 역사체계에 부수되는 것으로 상고시대 한국사의 웅혼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는데, 상고사의 역사 무대를 중국 동북쪽 지역과 랴오시(遼西) 지역에까지 넓혔고, 단군시대에 산둥(山東) 지역을 경영했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

김부식(金富軾)이 쓴 삼국사기나 그 뒤의 대부분의 역사책들이 한국사의 본격적인 전개 시기를 삼국시대 이후로 보았기 때문에 그 무대도 한반도와 만주일부에 국한되었다. 한국사의 타율성론(他律性論)을 강조했던 식민주의사관론자들도 한국사의 전개 무대를 한반도 내로 축소시켰다.

신채호는 이와 같은 종래의 주장들에 반대하고 한국사의 본격적인 전개시기가 삼국 이전이요, 활동 무대도 북으로 북만주, 서남쪽으로 랴오시·발해만 유역·직예성·산둥·산시·화이허(淮河)·양쯔강 유역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종래의 한사군의 반도내존재설에 반대하고, 한사군이 실재하지 않았거나 요하(遼河)지역에 존치(存置)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셋째, 삼국 중 고구려와 백제는 중시하나 신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역사를 투쟁의 기록으로 파악한 단재사관에서 고구려는 우리민족을 외세로부터 보호하고 대외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상적 국가이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가 서기전 37년부터 서기 668년까지 705년간 존속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신채호는 고구려 900년설을 내세우면서 앞부분 200여 년이 삭감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신채호는 한무제와 대결한 세력이 고구려라고 주장하였다.
백제는 부여·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서, 고구려와 같이 대외경략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고 하였다. 즉, 근구수왕과 동성왕 때 중국의 랴오시·산둥 지방과 일본 전역을 식민지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백제의 부흥운동이 자세하게 기록된 것은 이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고구려·백제에 비해서 신라는 대외투쟁을 거의 경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삼국통일의 경우 당(唐)세력을 끌어들였다. 그 결과 고구려의 옛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저자는 통설로서의 삼국통일은 민족사에 긍정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이라는 평가를 내리면서, ‘김유신(金庾信)의 음모’라고 단정하게 되었다.
[조선상고사] 한국 민족주의 역사관의 정수
고구려연대삭감설:9년전쟁한무제와 대무신왕의 혈전 승리로 동부여 귀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