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정의란 무엇인가
[고전 소개]
『국가』는 플라톤이 오랜 시간 동안 심혈을 기울인 국가와 정치에 관한 대표적 저작이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와 여러 인물들이 대담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전체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플라톤은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무엇이 정의(올바름)이고, 이상 국가는 어떤 것인지 고민하였고 그 내용을 이 책에 수록하고 있다.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되며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 정치 사상, 교육론, 예술론 등 다양한 분야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고 영국의 한 철학자가 말했을 정도로 플라톤은 서양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대표작인『국가』는 서양의 고전들 중 으뜸으로 손꼽힌다. 이 책에는 플라톤이 생각한 이상 국가와 정치에 대한 사상, 그가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모든 지혜가 망라되어 있다.
[저자] 플라톤 (BC 427~BC 347)
세계 최고의 철학자로 불리는 플라톤은 아테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20세에 소크라테스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으며, 그의 영향을 받아 철학 연구에 전념하였고,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할 때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정치에 관심이 있었던 플라톤은 스승의 죽음 이후 정계 진출의 뜻을 버렸다.
기원전 387년 아테네의 서쪽에 아카데메이아라는 학원을 짓고, 그곳에서 여생을 연구와 저술에 전념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 사상의 충실한 계승자였으며, 나아가 스승의 사상을 진전시켜 독창적으로 체계화하였다. 생전에 간행된 30편에 이르는 저서는 현재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1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러 가지 논제를 둘러싸고 철학적 논의가 오간 것이므로 『대화편』이라 불린다. 그중 『소크라테스의 변론』, 『파이돈』, 『국가』, 『향연』등은 특히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소피스트들 중 한 명인 트라시마코스는 올바름이란 더 강한 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하는데, 올바름이란 이익을 의미한다. 다만 강한 자의 의미에 대하여는 견해의 대립이 있다.
트라시마코스의 견해에 의하면, 양치기들이 양들을 돌보는 목적은 양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언뜻 보기에 양치기들이 양들을 살찌게 잘 돌보는 것은 양들 자체에게 이익이 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양들을 잘 키워 제값을 받고 팔려는 속셈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양치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다.
이와 반면, 스크라테스는 양치는 기술이 단지 양을 돌보고 보살피는 것일 뿐이며, 그 외 다른 것은 부차적이거나 우연적인 결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기술은 기술은 가진 사람(강자)에게 항상 이득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란 누구의 이익이라고 단정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굳이 누구의 이익이라고 파악한다면 그것은 전체의 이익이라고 볼 수 있는데,일반적으로 정의로 대표되는 법은 상호간의 이해관계를 조절하여 서로에게 이익이 되거나 피해가 최소화되는 방식을 규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법은 보호할 만한 가치나 권리를 가지 있는 자를 보호한다. 그러면에서 이를 강자라고 한다면 강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강자는 고정적인 대상이 아니다. 언제든지 변화하고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어제의 강자가 오늘의 강자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누구든 강자가 되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성원들은 강자가 되려고 할 것이다.
살아있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강자이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법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존재란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특정한 계층의 보호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특정한 분야에서 강자이기 때문에 법의 보호를 받는다. 하지만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본다. 법의 보호라는 질적 측면에서는 모두 같지만 , 가지고 있는 권리의 수량의 측면에서 차이가 난다고 하여 법의 보호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국가] 정의란 무엇인가
논제;정의란 강자의 이익인가?
일반적으로 국가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법을 통해 구현된다. 그러나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은 대다수 힘과 권력을 가진 지배층이므로 그들은 모두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법을 제정한다. 따라서 정의란 더 강한 자의 이익이 될 수 있는 것이다.또한 사람들이 정의롭게 살려고 하는것은 그 자체가 좋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타인의 이목이나 평판에 기인하는 경향이 있고, 서로가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거나 당하지 않도록 약속하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이라 생각하여 이것을 법으로 정해놓고는 법은 정의롭다고 흔히 말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올바른 사람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며, 정의란 그 자체 뿐만 아니라 결과 때문에도 좋은 것이므로 올바르지않게 사는 것은 궁극적으로 본인에게 불이익이 되는 것이다.
더욱이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은 서로에게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하게되어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게된다. 따라서 훌륭한 삶을 위해서는 영원불멸의 진리를 인식하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
[플라톤의 국가]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는 나에게도 유익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해롭지 않은 것이
정이라고 하고 있으나 현실에서 보면 정의는 강자의 이익 처럼
보이는 경우도 가령 재산이 너무 많아서 무익하게 소비하는 사람의 사소한 물질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루을 살아가기 위한
식량인 경우 이를 훔친사람에게 정의를 적용할 수는 없다
[플라톤의 국가] 정의란 무엇인가
오늘날'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다' 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이 현실화 되어가고 있는것처럼 보인다.
세계에 실제 살아가는데 있어서 강자의 이익을 위해 제정된 사회제도나 기준들이 정의롭지 못한것들에 포장되어 왜곡된 현상들을 많이 보게된다.
강자들이 만드는 기준, 보통 일반에게 따라야 할 준칙이나 규칙으로 이해되는것으로 법으로 생각될수 있다. 그러한 법은 정의로움에 근접해 가는 정도이지 실제로 정의로움이라고 결론내릴 순 없다. 통치자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의 삶을 규율로서 척도로서 힘을 행사하는 존재로 이해할때 그는 대체로 정의로움에 근접해야하는 것이지, 실제로 통치자는 정의로움이라는 추상적인 가치와 본질적인 관계, 즉 통치자의 행위가 항상 정의로운 그런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의란 행복을 향한 지향을 지니다. 말그대로 최고 나은상태로의 지양이다. 그러한 방향감이 없다면 지금의 현실에서 살아가는것은 아무런 의미없는 일일 따름일것이다.
정의로움. 그것은 소망, 희망의 특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플라톤의 국가] 정의란 무엇인가
[문]정의(正義=올바름 : 이하 용어를 통일함)란 강자의 이익인가
[답]한마디로 정의가 강자의 이익은 아닐 것이다. 이 문제가 BC4~5세기 플라톤이 살았던 아테네사회에서 토론의 명제가 된 것을 보면 정의가 강자의 편에 선 유래가 아주 깊은 것임을 알 수있다. 돈을 위해 지식을 팔고 있는 소피스트의 하나인 트라시마코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은 인간 사회에서 힘 또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그들은 모두 자신들에게 이익인 것을 "정의"라고 생각한다. 즉 참주정은 한 명의 참주의 이익을 위해, 귀족정은 소수의 귀족들의 이익을 위해, 민주정은 다수의 이익을 위해 그 사회의 실제 권력관계를 반영시켜 법을 제정한다. 법은 곧 정의를 표상하는 것이고, 정의를 구현하는 수단이 곧 법이라고 볼때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는 명제를 입증하게 된다."
그런데 이 논의 출발점인' 정의"라는 말 자체가 모든 계급의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의가 강자의 이익"이라는 명제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는 없다.
그러나 실제로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말자체가 지극히 현실적인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기존의 "정의"에대한 통념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여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이 적합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그러자 트라시마코스는 양치기 비유를 통하여 정의는 결국 강자의 이익이라는 주장을 보강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 주장을 정의는 항상 강자에게만 이득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논증하여 트라시마코스의 주장를 반박함으로써 그는 논쟁의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게 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 때로는 정의롭지 않게 사는 것이 유익하다."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에 명료하게 답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클라우켄과 아데이만토스가 논쟁에 뛰어든다. 그들은 "정의롭게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정의로운 것 자체가 이익인 이유"를 밝혀 달라고 소크라테스에게 요구한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말을 통하여 인간의 영혼 3분설로 설명하였다. 인간의 영혼은 이성, 기개, 욕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의롭지 못한 사람의 영혼은 이 세부분들이 조화를 이루지 못 하고 대립되어 결국 불행해 지지만, 정의로운사람은 영혼의 세부분들 간에 조화가 이루어져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함과 동시에 때로는 정의롭지 않게 사는 것이 유익하다는 현실논리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정의롭지 않게 사는 것은 자기 영혼을 구성하는 이성, 기개, 욕망이 조화를 이룰 수 없게 만들어 궁극적으로는 불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식으로 논쟁이 진행되어 플라톤은 인간이 정의롭게 삶을 살았는지 여부는 인간이 생을 마친 뒤 저승에 가서 심판관 앞에 서서 심판을 받음으로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물론 영혼 윤회설이 전제된 것이지만 인간은 그 사후 심판의 결과, 정의롭게 산 사람은 즐거움의 1000년 행로가 보장되지만 정의롭지 못하게 산 사람에게는 1000년간의 고통과 징벌의 행로가 강제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결국 영혼 윤회설을 신빙성있게 증명하지는 못하였으나, 정의는 강한자만의 이익이 될 수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운 삶 자체가 모든 인간이 추구해야 가치있는 삶이라는 그의 주장을 사후보상을 받는 다는 이야기로 보강하였다.
플라톤의 주장이 어찌되었든" 정의가 강자의 이익"이 결코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도 언제 부터인가 이 가당치도 않은 주장이 실제로 통용되어가고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지",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膾炙)되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듯이. 사회정의의 실현의 구체적인 척도의 하나인 법집행이 돈없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엄격하게 적용하지만 돈 많고 권력있는 사람들에게는 솜방이처럼 느슨하게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현실적인 세태를 반영하더라도 우리 인간사회가 추구해야 할 정의는 모든 사람의 이익위에서 만이 존재가치를 가져야 함은 자명한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강자의 이익인가?
‘올바름(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면이 있는데 이에 소크라테스는 기존의 올바름에 대한 통념에 문제 제기를 통해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이 적합하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우선 여기에 강자의 이익이라면 강자는 누구인가? 라는 문제 제기로 시작한다. 트라시마코스의 양치기 비유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는 강자에게 항상 이득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로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에 대하여 반박을 하게 되고 이에 트라시마코스는 인정하고 물러나게 된다. 여기에 현실적으로 올바르지 않게 사는 것이 때로는 유익하다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에 명쾌한 답변을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 3분설로 설명하였다. 인간의 영혼은 이성, 기개, 욕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올바르지 않은 사람의 영혼은 올바르지 않으므로, 세부분들이 조화를 이루지 못 하고 대립하기 때문에 나쁜 상태에 이르고 결국 불행해 진다는 것이다. 만일 개인의 영혼이 올바르다면 영혼의 기능들 간에 조화가 이루어져 행복해진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정의(올바름)란 강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하면서 때로는 올바르지 않게 사는 것이 유익하다는 현실논리를 부정하며 올바르지 않게 사는 것은 영혼이 올바르지 않아 이성, 기개, 욕망이 조화를 이룰 수 없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불행하게 된 다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