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읽기

[소유냐 존재냐] 소유 지향적 삶에 대한 따끔한 경고

능선 정동윤 2014. 2. 21. 14:17

 

[고전 소개]

이 책의 원제는 To Have or To Be이다. 이 원제에서 볼 수 있듯이 현대인의 생활양식을 소유와 존재로 이분했다. 소유와 존재의 양극 사이에서 다양하게 존재하는 인간들에게, 물질적 소유와 탐욕의 소유 양식에서부터 창조하는 기쁨을 나누는 존재양식으로의 일대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이 책은 이론에만 머룰지 않고 실질적인 방안까지 제시하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그 실현가능성은 미루고서라도 세밀한 관찰과 예리한 통찰력을 바탕에 깔고 있어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저자] 에리히 프롬 (1900~1980)

190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생의 정신분석학자, 사회심리학자. 프랑크푸르트대학교와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베를린 정신분석연구소에서 정신분석을 연구하였다. 1933년 나치스의 발흥으로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컬럼비아대학과 예일대, 멕시코 국립대학 등에서 정신분석학 강의를 하였고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저서로는 《자유로부터의 도피》 《인간의 자유》 《건전한 사회》 《사랑의 기술》 《소유냐 존재냐》 등이 있다.

 

[소유냐 존재냐] 소유 지향적 삶에 대한 따끔한 경고
에리히 프롬은 선불교 유태교 기독교 신비주의 사상을 수용하고 1차 2차 대전을 겪으면서 미국으로 망명을 했다.  소유를 쾌락주의적 성격과 네크로 필리아적성격 계산적인 성격 시장적성격 자아는 있지만 자기핵심 정체성을  갖지 못했다고 한다.  근대이념의 좌절로 물질적 풍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개인들의 완전한 정복도 환상에 불과하다고 한다.  소유양식이 객체적이고 계산적소유양식이라면 존재양식은 세계와 하나되는 삶의 양식 이성적 지혜 잠재적 능력 긍정 능동적으로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은  물질을 추구하기 때문에 권력추구 폭력 전쟁 갈등 시기 소유욕때문이다.  그리고 소유는 과거와 미래의 불안인데 존재는 현재의 우리삶이다.  존재지향적인 삶은 소유물을 포기하고 저축이나 착취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주는 삶이다.  삶을 사랑하고 과거 미래가 아니라 현실의 교감 잠재력을 실현하는 것이고 또한 자기 이성을 믿고 독립적으로 사고 하는 것이고 속이지도 않고 속아서도 안되는 자기통찰이 필요하다 도한 개인분인 존재를 말해서는 안되고 사회의 변화를 요구한다. 사회주의를 갈망하는 프롬은 지금의 사회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하는 데 자본주의가 복지주의로 가는 것을 희망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사회는 변화하고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유냐 존재냐] 소유 지향적 삶에 대한 따끔한 경고

먼저 에리히 프롬은 190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졸엄후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원으로으로 있던중 1933년 히틀러집권,나치스가 대두되자 1934년 미국으로 망명
컬럼비아대학과 베닌트 대학을 거쳐 1952년 멕시코 국립대학
교수를 역임하며 1980년 3월18일 스위스 자택에서 타계하기까지신프로이트 학파의 이론적 지도자격으로 활약한 사회학자였다.
이번에 학습한 "소유냐 존재냐"는 그가 76세에 기술했던 책으로
나는 20대 초 방황하던 청년시절에 읽었던 책이다.
그당시 "독일고전철학의 종말","세계철학사","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역사란무었인가?","어느세일즈맨의 죽음","존재와시간"등의 책들속에서 생각하고,공감하고,고뇌하던때 공감하며 동 저자의 사랑의 기술과 함께 참많이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던 책이었다.
그당시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난후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되었고 존재양식 이야말로 별로 어렵지않은 삷의 양식이고 나역시도
존재적인 사회구조속에 존재적인 삶의 양식으로 살아가리라 다짐하며 에리히프롬의 생각을 접할수있었던 사실에 감사했었던기억이있다.
하지만 이번 과정에서 1강부터 7강까지 학습하면서 나야말로
소유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소유적인 삶의 양식으로 살아왔다는걸 확인할수있었고 적잖은 놀라움에 처음 이책을 접했던 시절로 회상하며 많은 생각을 했다.
소유양식,존재양식 어떤양식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들의
사고나 행동,감정들이 규정됨에도 불구하고 나역시도
사회화(앙가제) 되는 과정에서 소유양식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따라 파생되는 인간관계에서의 문제점, 고립된 자아에서의 낮은 존재감, 자기계발을 포함한 나의 모든 노력들의 바탕에는 소유양식에서 시작되지않았나 되돌아보게된다.
사랑,결혼,교육,일,자기계발,대인관계,물질적소유욕등
개개인에게 소유지향적인 성향과 존재지향적인 성향은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한쪽 성향이 강화되면 다른쪽은 약회될수밖에없는 관계이다.
현재의 나, 실존하는 나, 하이데거가 말한 현존재 ,
그 현존재의 고뇌에 있어서 좀더 나자신을 통찰하는 시간을 늘리고,소유욕을 줄여가고,회의할때 내주장이 관철되면서 느끼는 기쁨 보다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장점을 들춰주며 공감되는 부분을 부각시켜주는 노력,여러사람과 나누어갖는 데서오는 기쁨을 느끼도록 노력하고,과거에 대한 회한과 후회는 금기시하고,
사랑표현함에있어 구속이아닌  장.단점을 포함한 존재가치 하나에대한 통찰적인 느낌을갖으려 노력하고,어떤것을 소유하지도
소유하려고 갈망하지도 않으면서 주위와 자연스럽게 하나가될수있는 노력을 해야겠다.
우선순위로 나부터 "존재양식"으로 삷의 양식에서 차지하는 비증을 늘리고 존재양식을 통한 2세교육,가족관의 대화,삷의추구 목적의 자연스러운 방향수정,회사조직내 대화,회의 ,여타업무수행, 행동표현 방식의 수정보완등을 위해 부단한 노력과 자기통찰시간을 통한 자기반성시간을 반복적,주기적으로 해야겠다.
[소유냐 존재냐] 소유 지향적 삶에 대한 따끔한 경고
○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행할 것인가이기 보다는,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이다.  
생기 있게 활동하는 사람은 채워짐에 따라 커져서
결코 가득 차지 않는 그릇과 같다.    <에크하르트 수사>

○ 신은 즉 자연이다.    <스피노자>
자유로운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는 최소한으로만 생각한다.
  그의 지혜로움은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닌 삶에 대한 숙고이다.                                                          <스피노자>
○ 우리의 실패는 우리의 성공에서 나온 결과이다.
  “삶의 내용으로서의 경제는 치명적인 질병이다.
   왜냐하면 무한한 성장은 유한한 세계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앞만보고 질주하도록 우리모두를 채찍질한다.
이제부터 나는 누구인지 나의 존재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체를 소중히 여기고 자연과 합일할 수 있는 생활, 그리고 지금 이시간을 .. 바로 지금이지 그외의 시절이 다시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소유냐 존재냐] 소유 지향적 삶에 대한 따끔한 경고

에리히 프롬은 자기소유에 집착하는 ‘소유적 인간’과 살아있는 존재가치를 느끼는 ‘존재적 인간’에 대해 말한다. 이런 경우 존재적 인간은 “기탄없이 응답할 용기만 있다면 새로운 무엇이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자신을 맡긴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 소유할 수 있는 대상 자체가 영원하지 못할뿐더러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대상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를 소유하는 바로 그 순간은 인간에게 잠시나마 행복을 가져다주는 듯하다. 이는 인간의 원초적 영역인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새로움의 영역을 소유로 채우는 것은 임시방편이며 잠시의 행복 뒤에 더 커다란 소유를 원하게 되고 그러한 반복이 결국 “무엇인가 소유하지 않는 삶을 견디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존재란 무엇인가? 현재 살아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이다. 이는 소유하지 않음을 의미하고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잃어버릴 것이 없다는 의미이다. 잃어버릴 것이 없으므로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불안이 없으므로 있는 그대로를 그 순수한 느낌(이해관계가 없는)으로 대할 수 있고 그 결과 대상(혹은 상대)에 대한 공감이 존재한다. 공감이 존재한다는 것은 나 이외의 다른 대상과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소외는 존재할 틈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불필요한 감정이 없으므로 ‘~로부터의 자유’를 넘어 ‘~을 향한 자유’를 얻고 그러한 자유는 우리로 하여금 존재를 가감 없이 마주볼 수 있게 할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은 명징하게 눈에 보이는 소유와 존재로 시작해서 어느 순간 잠시 느꼈다가 잊혀져버린, 혹은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차창 밖 안개 너머 얼핏 본 희미한 물건처럼 명확하지 않았던 소유와 존재까지 명쾌하게 파헤친다. 그는 이러한 소유와 존재의 의미를 인간의 본성과 구조주의적 관점, 그리고 그가 살았던 사회의 정치와 경제를 포함한 현실적 실천 방식으로까지 확대해 나간다.
[소유냐 존재냐] 소유 지향적 삶에 대한 따끔한 경고
1. 유대교 집안의 사람이었지만 사해동포주의, 인본주의에 배치됨을 이유로 과감하게 유대교를 버린 과감성
2. 불교의 선도 받아들일 줄 아는 포용성, 즉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개방성
3. 소유, 소비 지향적 삶을 벗어 버리고, 존재 중심, 과정 중심의 삶을 강조함으로써 결국 인생이란 결과가 아닌 과정이 중요하고, 과정 자체가 삶이다라는 교훈을 준 것 같다.

 

[소유냐 존재냐] 소유 지향적 삶에 대한 따끔한 경고

1. 자본주의가 마치 신처럼 지배하고 있는 글로벌화된 세계 체계에 숙명처럼 길 들여져 많이 소유하고 쌓아 놓고 자기 지배 아래 두고 있지만 현대인은 행복하지 못 한다.

2. 이 근본적인 대안은 에릭 프롬의 주장한 것 처럼 소유양식의 삶에서 존재양식의 삶으로 개인적인 가치관을 전이 시키고 개인 모여 거대한 사회적 동력을 이룰 때 인간은 참된 행복을 맛볼 수 있다.

3. 이 거대한 소유양식의 메커니즘의 하나의 부속처럼 움직이는 나로서는 에릭 프롬의 존재양식의 삶을 추구함으로 참된 인간다움과 아름다운 인생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4. 다만 종교에 잇어서 프롬의 존재론적 시각은 어디까지만 철학자이고 인본주의적 측면만 있다. 기독교의 절대 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순종은 배타적이어서 소유론적 시각으로만 분석 했지만, 참된 종교는 곧 절대성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렇지만 사랑의 신인 절대자를 의지하여 이웃에 선과 사랑을 실천하여 결국 존재론적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5. 아무튼 에릭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통해 나의 운명과 같은 소유 지향적인 삶이 존재 지향적인 삶으로 지평을 열어준 것 같다. 끝.    

 

[소유냐 존재냐] 소유 지향적 삶에 대한 따끔한 경고
1. 자본주의가 마치 신처럼 지배하고 있는 글로벌화된 세계 체계에 숙명처럼 길 들여져 많이 소유하고 쌓아 놓고 자기 지배 아래 두고 있지만 현대인은 행복하지 못 한다.

2. 이 근본적인 대안은 에릭 프롬의 주장한 것 처럼 소유양식의 삶에서 존재양식의 삶으로 개인적인 가치관을 전이 시키고 개인 모여 거대한 사회적 동력을 이룰 때 인간은 참된 행복을 맛볼 수 있다.

3. 이 거대한 소유양식의 메커니즘의 하나의 부속처럼 움직이는 나로서는 에릭 프롬의 존재양식의 삶을 추구함으로 참된 인간다움과 아름다운 인생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4. 다만 종교에 잇어서 프롬의 존재론적 시각은 어디까지만 철학자이고 인본주의적 측면만 있다. 기독교의 절대 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순종은 배타적이어서 소유론적 시각으로만 분석 했지만, 참된 종교는 곧 절대성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렇지만 사랑의 신인 절대자를 의지하여 이웃에 선과 사랑을 실천하여 결국 존재론적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5. 아무튼 에릭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통해 나의 운명과 같은 소유 지향적인 삶이 존재 지향적인 삶으로 지평을 열어준 것 같다. 끝.    

 

[소유냐 존재냐] 소유 지향적 삶에 대한 따끔한 경고

현대 산업사회에서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과 생산성의 향상은 인간의 행복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기 때문에 산업사회가 발전되면 될수록 인간은 더욱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프롬은 이러한 일반적인 시각과 달리 현재의 산업사회가 행복은 물론 그 환경조차 만들어 주지 못하며 파멸로 치닫고 있다고 보았다.

실제 산업사회에서의 인간은 대다수가 여전히 행복하지 못하다. 쾌락을 획득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했으나 기대했던 바와 달리 산업사회는 이러한 욕망과 소비의 욕구를 실현시켜 주지 못하고 있다. 또한 설령 물질적 욕구가 충족된다고 하여도 반드시 행복하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욕구의 충족은 일시적으로 만족감을 느끼게 하나 지속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더욱 더 자극적이고 많은 욕구를 원하게 된다. 이런 반복된 행동은 인간을 물질의 소유에 매달리게 함으로써 본래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하였다. 자율성과 자아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독립성을 상실한, 판단력이 사라져 버린 물질이 되어 버렸다.

또한 소유한다는 것은 축적한다는 개념과 사용한다는 개념이 있는데 현대는 소비의 쾌락을 더욱 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소비지상주의의 쾌락추구는 개개인의 인간성의 말살과 개인 행복, 존재성의 상실의 피해도 있지만 제한적인 자연을 마음껏 유린하게 하는 경제 체계를 지지하게 하며 후손들에게 파괴된 지구를 물려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유양식이 결국 세상을 파멸로 이끌 것임으로 파멸에서 벗어나고 인간의 본성과 참다운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인간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존재의 양식」으로 삶의 양식을 바꿔야 한다.
[소유냐 존재냐] 소유 지향적 삶에 대한 따끔한 경고
소유냐 존재냐가 주는 시사점이 현재의 나의 상황에 어떻게 적용이 될 수 있을지 정리하라

에리히 프롬은 190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과실주 상점을 운영하면서도 랍비처럼 살았지만, 유대인으로서 그의 정체성은 약간 흐릿하다. 그리고 칼 맑스와 프로이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말년에는 스위스에서 보내게 된다.

프롬은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사회적 성격과 사회구조를 비판하고 있다.  즉, 인간이 먹고 살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요구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기본적인 사실 때문에 소외된다고 본다. 그리고 맑스의 소외론을 인용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일 뿐 이며, 그래서 노동자들은 노동을 기피하게 되며 나태를 이상으로 여기게 되는, 즉 노동으로 부터 소외된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고려 시대의 도자기를 만드는 장인들은 창작 작품을 만듦으로서 자가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쁨을 누렸으나,  현대인들은 찰리 채플린 영화에서 보듯이 하루 종일 나사만 조이는  단순한 그런 노동으로는 자기 실현이 될 수 없고,  노동은 지겨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는 경쟁주의, 이기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서로간에도 소외되어 있다고 한다. 또 자기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 스펙을 쌓고 하는 것이 결국은 자기를 시장에 좀 더 비싸게 팔기 위한 행위로 인해서 자기 자신에게도 소외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개인과 국가도 분리되어 있다고 말하는데 국가는 구성원들의 세금에 의해서 운영되지만, 국가운영은 공무원과 정치가에 운영되고 대부분 국가구성원들은 국가 운영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