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론]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
[고전 소개]
플라톤은 B.C. 429년경에 아테나이에서 태어났다. 이보다 4년 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었고, 2년 전에는 아테나이의 위대한 민주적 정치가 페리클레스가 페스트에 걸려 죽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B.C. 404년, 즉 플라톤이 23세 되던 해에 아테나이의 패배로 끝났다. 그리고 스파르타 점령군의 후원으로 해외 망명에서 돌아온 크리티아스 등의 30인이 독재 정권을 세웠다. 이 정권은 국외로 도망갔던 민주파가 국내로 들어와 내란을 일으키고, 또 스파르타의 국론이 분열됨으로써 약 8개월 만에 타도되고 민주제가 회복되었다. 이 혼란한 시기에 소크라테스는 위험 인물로 처형되었다. 크리티아스와 가깝게 지낸 것이 민주파의 오해를 샀던 것 같다. 크리티아스는 또 플라톤의 외사촌 형이기도 했다. 아무튼 플라톤은 청년 시대에 가혹한 정치적 경험을 했던 것이다.
젊은 플라톤은 크리티아스의 권고로 정치에 관여할 생각이 있었으나, 아무 죄 없는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하는 현실을 보고, “오늘날 모든 국가의 정치 체제가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참된 앎을 사랑하는 철학적 정신을 가진 사람이 국정에 참여할 때에만 정의의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일생에 전기(轉機)가 되었다. 플라톤의 혼은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삶의 자세에 매혹되었다.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 중요함을 소크라테스를 통하여 배웠다. 여기 수록한 플라톤의 초기ㆍ중기 작품에서 철학은 잘 사는 것, 옳게 사는 것의 탐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잘 살아야 하는가? “잘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플라톤은 특히 초기 작품들을 통하여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여기 그려진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역사적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는 역사보다 더 진실하다”라고 하듯이, 그것은 하나의 살아있는 전체로서의 소크라테스의 인간상을 예술적으로 훌륭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저자]
플라톤 (BC 427~BC 347)
세계 최고의 철학자로 불리는 플라톤은 아테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20세에 소크라테스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으며, 그의 영향을 받아 철학 연구에 전념하였고,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할 때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정치에 관심이 있었던 플라톤은 스승의 죽음 이후 정계 진출의 뜻을 버렸다.
기원전 387년 아테네의 서쪽에 아카데메이아라는 학원을 짓고, 그곳에서 여생을 연구와 저술에 전념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 사상의 충실한 계승자였으며, 나아가 스승의 사상을 진전시켜 독창적으로 체계화하였다. 생전에 간행된 30편에 이르는 저서는 현재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1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러 가지 논제를 둘러싸고 철학적 논의가 오간 것이므로 『대화편』이라 불린다. 그중 『소크라테스의 변론』, 『파이돈』, 『국가』, 『향연』등은 특히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 (BC 470~ BC 399)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테네에 살면서 많은 제자들을 교육시켰는데, 플라톤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 활동은 아테네 법에 위배된다 하여 사형을 당했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민주주의제도가 쇠퇴하면서, 사회적 황폐가 확대되는 상황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그 당시의 지배계급인 귀족계급을 대변하고 있었는데, 새로운 신흥계급의 출현으로 반민주주의적인 귀족계급이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종래의 그리스의 유물론적인 자연철학에 대립하여 그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기초로 하여 ''영혼''에 대해 깊게 생각하면서 삶의 온당한 방법을 아는 것을 지식의 목적이라 하고 이로써 도덕적 행위를 고양시키는 것을 지향하였다.
즉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실천지(實踐知)를 중시하였다. 이러한 참된 지(知)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귀납법에서 찾고, 사람들의 대화에 의한 문답법에서 독단적인 잘못된 지식을 비판하고 제거하면서 일반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라고 불리우는데 그는 이것을, 진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의미에서 ''산파술(産婆術)''이라 칭하였다. ''영혼''을 주제로 한 그의 학설은 정신주의적이고 관념론적인 것이고 이것은 그의 제자인 플라톤에게 계승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저작은 없으나 그의 사상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나타나고 있다.
'악법도 법이다'는 플라톤의 어느 작품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다만, 크리톤에서 추론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개인에 대한 국가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아테네법과 소크라테스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법의 판결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법을 설득하는 일과 법이 명령하는대로 하는 일이라 하였다.
소크라테스가 탈옥을 거부한 두가지 원칙은 첫째, 아무리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해도 부당한 일로 되갚으면 안된다. 법을 어기는 것은 법에 해를 끼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법ㅂ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이 원칙을 개인 대 개인의 관계가 아닌 개인 대 국가의 관계로 확장한 것에 대해 크리톤은 확신하지 못했다. 둘째 누군가와 합의한 것들이 올바른 경우에는 이행해야 한다. 법은 이미 시민들이 합의한 것이기 때문에 위반하면 안된다였다.
아테네법은 소크라테스와 국가의 관계가 소크라테스의 자발적인 동으에 의해 일어났다고 주장하고, 아테네 법정에서 외국으로 추방되느니 아테네에서 죽는 것을 선택하겠다고 선언했는데 탈옥한다면 법과의 합의를 위반하는 것이으로 보았다.
소크라테스는 법은 속임수가 없었으며 충분히 고민할만한 시간을 주었기 때문에 법의 결정은 매우 공정했다고 보았다. 또한 계약 위반은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탈옥은 가족과 친구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 자신에게도 유익하지 않다고 보았다.
아테네 법의 주장은 첫째, 법이나 국가는 개인보다 우월하다. 둘째, 법을 설득하거나 또는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법의 판결에 복종해야 한다. 셋째, 국가와의 계약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자발적으로 동의하였다고 본다.
법에 불복종하려면 법을 설득해야 하나, 법을 설득하는데 실패했으며, 추방력을 거부하고 아테네를 떠나느니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선언했으므로 자발적으로 동의한 내용을 사사로이 위반하는 것은 국가를 파괴하고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합의한 내용, 올바른 내용 둘 중에 하나만 어긋나도 법에 복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태도는 현대에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내가 배운 소크라테스와 관련하여 내게 떠오르는 연관 단어는 ‘산파법’(혹은 ‘문답법’), ‘크산티페’, ‘플라톤’, 그리고 그가 남긴 명언 ‘악법도 법이다’ 정도였다. 특히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자존심 높은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가 했음직한 말이라고 하기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소크라테스가 직접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학교 입학 이후 철학서들을 읽으면서 소크라테스에 대한 많은 오해들이 풀렸지만,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등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지 않으면, 세간에 소크라테스가 남긴 명언으로 잘못 알려지고 있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견해를 수정할 기회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남긴 이러한 <대화편>을 읽어야만이 소크라테스가 법정에 기소되게 된 이유와 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변론, 그리고 그에 따른 재판 결과와 그의 죽음에 이르는 그 모든 과정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며,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기꺼이 선택하게 된 배경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위정자들이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의도적으로 잘못 인용하여 국민들을 현혹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던 사실을 고려할 때, 고대 아테네인들 뿐 아니라, 현대인들도 소크라테스의 ‘보이지 않는 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선입견과 편견이 그의 가장 무서운 적이라고 아테네 법정에서 소크라테스가 변론하였듯이, 누가 퍼뜨린 것인지 적시할 수 없는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변론할 기회조차 없었으니까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원칙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이러한 원칙은 개인 뿐 아니라, 법이나 국가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원칙일 것이다. 그는 ‘아무리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해도 부당한 일로 되갚으면 안 된다.’와 ‘누군가와 합의한 것이 올바른 경우에는 이행되어야 한다.’라는 두 가지 원칙을 내세웠는데, 우선 첫 번째 원칙(아무리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해도 부당한 일로 되갚으면 안 된다)을 고려할 때, 국가나 법이 정의롭지 못하다면 법을 위반하거나 법에 불복종하는 것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이로울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추론 가능하다. 다음으로, 두 번째 원칙(누군가와 합의한 것이 올바른 경우에는 이행되어야 한다)을 고려해본다면, 처음부터 합의하지 않은 것이나 또는 올바르지 않은 것이라면 국가나 법에 복종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흐려진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
국가내 구성원간에 합의된 법이 우선이며, 합의 된 법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에 대해서는 개인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더라도 이를 수용하여야 한다고 한다. 이는 개인적인 존중위에 합의된 구성원간의 국가질서에 해당하는 법을 존중하여야 한다는 내용이다.
소크라테스는 다만, 판단에 부적절한 절차나 법률의 구성이
구성원 들의 합의를 받지 않았다면 정당한 법이라고 볼수 없으므로 근본적으로 '악법도 법이다'에 포함되지 않고
개인적인 저항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할 수도 있다.
단체생활에서 개인이 가지는 자유는 단체의 구성원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기준을 만든 범위내에서 가능하며 이를 넘어서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구성원으로 부터 또다른 합의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구성원들이 합의하지 않는 상태에서 개인이 자유를 정의라고 생각하고 실행하면 여타 다른 구성원들이 각자의 사유에 따라 어떠한 행동을 하더라도 제재할 수 있는 논거가 없다. 개인의 입장에서 배고픈 가족을 위해 빵을 훔치는 것은 이해할 수 있고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행위에 대해 법적으로 보호해줄 수는 없다. 그러한 기준을 깨뜨리면 어떠한 구성원도 그 기준을 지키려하지 않을 것이며, 구성원들은 죄의식 없이 도둑질을 감행하여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배고픈 가족을 도울 수 있지만, 도둑질한 개인은 그 처벌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개인의 힘은 국가나 민족등 큰 울타리내에서 보호받으며 성장하고 이러한 울타리가 없을때는 그 힘은 너무 미미하고 초라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와 관련된 사상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직접한 말은 아니고,플라톤의 "변론"이나 "크리톤"에서 유추해석되어 전해지게 된 겄이며,그 이유는 소크라테스의 소신과 연관이 있다. 즉, 법은 이미 시민들이 합의한 겄이기 때문에 위반하면 않되며 누군가와 합의한 것이 올바른 경우에는 이행되어져야 한다는 것과 법을 어기는 것은 법에 해를 끼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법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심지어 자신에게 독배를 내린 법률에 대해 자신이 스스로 국외추방을 제의하지 않으므로써 소극적으로 동의한 절차적 당위성을 뒤늦게 훼손할 수 없다는 "크리톤"에서의 주장과,법정이 철학을 포기한다면 석방해 주겠다는 제안을 하더라도 자신이 철학을 하는 이유는 신의 명령이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변론"에서의 법 이상의 철학적 원칙과 신념에 기초한 의사결정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하지만 국가는 개인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아 개인을 억압해왔다.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진정한 생각은 모든 의견을 존중할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들의 좋은 견해만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며 합의사항도 올바른 경우에만 이행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현대사회의 시민불복종운동은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
소크라테스의 그 명언들 속에 그 제자들의 뛰어남 속에 스승의 뛰어남이 후세에 까지 회자되는 것을 보면서 역시 훌륭한 스승밑에 훌륭한 제자가 나온다는 극히 보편적인 지식을 배울수 있었고 여러성인들 속에 명언명구를 산출하는 좋은 계기가 된것 같다.


1. 장수론 : 용장. 지장. 덕장
2. 용장론 : 장비, 여포, 조인
3. 지장론 : 조자룡, 강유, 여몽
4. 덕장론 : 관우(살아서는 장수요 주어서는 무신이 되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
20. 장수론 : 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 덕장 지장 용장. 장수의 조건 (지혜, 신의, 용기, 위엄)
[소크라테스의 변론]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
이 말은 즉슨, '법'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채, 한 개인에게 적용되더라도 시행하여야 한다고 풀이해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명분을 설명하기 위해 혹은 소크라테스의 부당한 죽음을 인정하기 위해 후세의 사람들이 만든 문장일 수 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죽을 당시에는 개인의 입장으로 바라봤을때는 억울한 죽음이였나? 그것에 대한 가장 매료가 되는 해답은 이 강좌에서 교수님이 마지막에 의미심장하게 얘기한대로 "소크라테스는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동하는 것에 두려워 하지 않았다"이다.
사내에서 털릴 때를 상기해 보면 상사의 질문에 나의 의견을 끝까지 관철시키지 못할 때이다. 바뀌는 질문에 생각나는대로 대답하다 보면 요지의 일관성이 흐트려져 타부서 팀장의 먹잇감이 되곤 하였다.T T;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어떤가? 자기 목숨의 가치에 아랑곳하지 않고 법의 사회적 효력을 자기로 인해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 시켰다. 가치있는 생명에 앞서 후세에 영원히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된 진실된 죽음이었다.
[문]소크라테스와 관련하여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전해지게 된 이유를 나열하고, 현대사회에서 그 문장이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 서술하시오.
[답]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틴어: Dura lex, sed lex)라는 말을 직접 하였다는 근거는 없다. 그러나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 통용되는 한국사회와 같이 공정한 법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에서 실정법의 자의적(刺意的)운용으로 이익을 향유하는 기득권층에서 원전에 대한 엄밀한 확인도 하지 않고 널리 유포시킨 사실에 불과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법정이 자신의 철학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석방해주겠다는 제안을 하더라도 자신이 철학을 하는 이유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신의 명령에 의해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천명했다. 또한 같은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국외추방을 거절하고 친구들이 제안한 벌금형은 감수하겠다고 법정에서 공언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발언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한마디로 소크라테스는 법을 뛰어 넘는 신앙에 가까운 철학적 원칙과 신념에 입각하여 의사결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
그래서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탈옥과 도피를 제안한 친구 크리톤에게 두가지 원칙에 의하여 도피할 수없다고 설득하였다. 첫째는 아무리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하여 부당한 일로 되갚으면 않된다. 둘째는 누군가와 합의한 것이 올바른 것이라면 반드시 지켜야한다. 즉 크리톤은 법의 판결이 정당성 여부를 판단하여 복종여부를 결정해야한다는 생각인 것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는 법을 위반하는 행위는 법에 해를 끼치는 행위이며, 법은 이미 시민들이 합의한 것이기 때문에 법의 명령에 복종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자신에게 독배를 내린 법률에 대해 자신이 국외 추방을 거부함으로서 이미 소극적으로 절차적 정당성을 부여했는데 판결결과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되었다고 뒤늦게 이를 훼손할 수 없다는 입장인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일관된 삶과 철학에 비추어 볼 때 탈옥 후 외국에 도피하게 되면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이 불일치하게 되어 결국 스스로의 정당성을 변증할 수 없게 된다는 것도 또 하나의 이유로써 크리톤에게 제시하였다.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진리에 대해서도 항상 논리적으로 회의하고 진리가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순간 바로 폐기시키는 엄중함이 있는데, 그가 단지 실정법이라는이유로 법의 권위를 무조건 옹호하여 "악법도 법"이라는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실정법을 무조건 준수하는 것이 옳은가? 불복종하는 것이 옳은가?"는 삼심제도와 헌법불일치 판결등 민주적으로 보장된 제도적 검증절차가 있다. 그런데 이런 제도가 없었던 시대를 살았던 소크라테스가 탈옥을 거부함으로서 외견상 불합리한 법집행을 인정한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그것은 악법도 법이기 때문에 수용한 것이 아니라 , 당시의 법집행절차상 다른 구제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언행일치의 일관된 철학관을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자기한테 불리한 법집행을 불가피하게 수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도 악법은 결코 수용대상이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은 해석일 것 같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
죽은 지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도 전 세계적으로 식지 않고 있는 푸코(Michel Foucault)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유족한 부르주아 가문 출신이었으나 기존의 기득권 질서와 가치체계에 대한 끊임없는 '바깥으로부터의 사유와 위반의 실천'으로 점철되었던 그의 뜨거운 이력이 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975년에 발간된 『감시와 처벌』의, "감옥은 공장이나 학교, 군대 병영이나 병원과 비슷하다. 이런 모든 기관들이 감옥과 유사한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는 대목은 사상가 푸코의 문제의식을 거울처럼 보여준다.
그는 서양 철학사상사의 표준적 주제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감옥이나 정신병원, 동성애 같은 주변부 적이고 생경한 논제와 관련해 특정 계층이나 소수자 집단에 관한 사회적 담론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재생산되는지에 대해 주목했다. 역설적인 사실은, 이런 미시적이고 실증적인 분석 작업의 결과 푸코가 서양적 이성의 정체성과 행로에 대해 아마도 니체 이후 가장 독창적이면서도 심원한 시각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믿음이나 습속에 안주하지 않고 그 이면의 동역학을 정밀하게 분석해 새로운 개념과 이론 틀을 만드는 것이 철학의 임무라면 푸코는 누구보다 섬세하고 입체적인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얼핏 사소하게 보일 수도 있는 논제들에 천착함으로써 푸코는 서양 사상을 규정해 온 합리주의 또는 이성중심주의의 야누스적 얼굴에서 배태되는 복합성을 현미경처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혁명적인 '뒤집어 보기'와 '틀 바깥으로부터 생각하기'에서 푸코의 주된 매력이 발견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특징은 그의 급진적 사유가 뛰어난 현실설명력과 실천 능력을 겸비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론과 실천을 모두 갖춘 드문 사상가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