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읽기
[순수이성비판] 칸트가 말하는 이성과 존재
능선 정동윤
2014. 2. 21. 14:27
[고전 소개]
순수한 개념 체계인 철학의 문제와 관련해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이성은 오로지 ''''순수한'''' 이성이다. 그래서 칸트의 첫 작업은 ''''순수이성비판''''이다.그것은 ''''순수 이성의 원천과 한계''''를 분별하는 일로, 이로써 이성은 "이성에 대해, 이성이 하는 업무들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인 자기 인식의 일에 새로이 착수하고, 하나의 법정을 설치하여, 정당한 주장을 펴는 이성은 보호하고, 반면에 근거 없는 모든 월권에 대해서는 강권적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의 영구불변적인 법칙에 의거해 거절할 수 있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저자] 임마누엘 칸트 (1724~1804)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철학자이다. 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고향의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수학했고, 1755년 이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음과 동시에 형이상학의 제1원리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얻었다. 그 후 그는 15년 동안의 사강사(Privat-dozent)를 거쳐 1770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정교수가 되어 은퇴할 때까지 이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이른바 3대 비판서라 불리는 『순수 이성 비판』(1781), 『실천 이성 비판』(1788), 『판단력 비판』(1790)과 『학으로서 등장할 미래의 모든 형이상학에 대한 서론』(1783), 『도덕의 형이상학』(1797) 등이 있다.
[순수이성비판] 칸트가 말하는 이성과 존재
칸트 이전의 서양철학의 중심적 사고는 영국의 존 로크가 주장한 경험론이 있다. 이는 초월적 실재론, 상식 실재론이라고 불리었는데,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 또는 인식의 대상이 중심이 되고 이를 인식하는 사람이 객이 되어서, 사물의 인식과 무관하게 사물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중심 사고 이다.
즉, 꽃은 우리가 인지하는 것과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이고, 이는 우리 인간의 인식의 범위를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반면 순수이성비판을 통해서 칸트가 주장한 것은 경험적 실재론으로 존로크의 주장과 반대로 인간이 중심이 되고 대상이 객이 되는 것으로 앞서 얘기한 꽃의 사례를 들면, 인간이 꽃을 인식하고 이를 꽃이라고 규정할 때 꽃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로, 칸트는 이 같은 인식의 형태를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인식은 자연을 철자화 하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즉 인간이 꽃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 특성을 우리의 감각경험을 통해 색깔, 모양, 향기, 촉각 등을 통해서 느끼고, 그 것을 종합하여 꽃이라고 인식할 때 비로소 꽃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로, 어떠한 대상이 인간의 경험 범위 안에 들어올 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이 의미 있는 이유는 바로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철학적 물음에 대한 관점의 대전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존재한다는 의미를 공간과 시간 상에서 나타나고 수량화 할 수 있을 때, 그 것을 존재한다고 하였고, 이러한 경험과학을 바탕으로 자연과학이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즉, 칸트의 철학은 수학적 자연과학에 기초하여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고, 삼라만상의 모든 현상은 인과관계에 있다고 믿고 있으며, 우리의 단순한 감각경험을 넘어서는 선험적 원리, 즉 초월성으로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이러한 인간중심의 사고라는 틀에서 계몽주의와 맥을 같이 하나, 인식의 한계를 규정하고, 그 한계 안에서 의미를 추구했다는 면에서 반성적 계몽주의라고 하며, 그는 또한 신의 존재, 영원의 불멸성과 같이 이론적 증명이 불가한 주제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희망의 세계, 즉 실천이성 같은 도덕적 관점에서는 "공의의 심판자"로써 절대적 신의 존재를 가정하고 있다. 이처럼 칸트의 철학은 과거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회전한다는 천동설의 사고를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통해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시각을 바꾼 것 같이 우리 인간의 인식과 경험이 중심되는 철학적 사고의 대전환을 가져온 것으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칸트 이전의 서양철학의 중심적 사고는 영국의 존 로크가 주장한 경험론이 있다. 이는 초월적 실재론, 상식 실재론이라고 불리었는데,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 또는 인식의 대상이 중심이 되고 이를 인식하는 사람이 객이 되어서, 사물의 인식과 무관하게 사물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중심 사고 이다.
즉, 꽃은 우리가 인지하는 것과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이고, 이는 우리 인간의 인식의 범위를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반면 순수이성비판을 통해서 칸트가 주장한 것은 경험적 실재론으로 존로크의 주장과 반대로 인간이 중심이 되고 대상이 객이 되는 것으로 앞서 얘기한 꽃의 사례를 들면, 인간이 꽃을 인식하고 이를 꽃이라고 규정할 때 꽃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로, 칸트는 이 같은 인식의 형태를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인식은 자연을 철자화 하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즉 인간이 꽃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 특성을 우리의 감각경험을 통해 색깔, 모양, 향기, 촉각 등을 통해서 느끼고, 그 것을 종합하여 꽃이라고 인식할 때 비로소 꽃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로, 어떠한 대상이 인간의 경험 범위 안에 들어올 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이 의미 있는 이유는 바로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철학적 물음에 대한 관점의 대전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존재한다는 의미를 공간과 시간 상에서 나타나고 수량화 할 수 있을 때, 그 것을 존재한다고 하였고, 이러한 경험과학을 바탕으로 자연과학이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즉, 칸트의 철학은 수학적 자연과학에 기초하여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고, 삼라만상의 모든 현상은 인과관계에 있다고 믿고 있으며, 우리의 단순한 감각경험을 넘어서는 선험적 원리, 즉 초월성으로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이러한 인간중심의 사고라는 틀에서 계몽주의와 맥을 같이 하나, 인식의 한계를 규정하고, 그 한계 안에서 의미를 추구했다는 면에서 반성적 계몽주의라고 하며, 그는 또한 신의 존재, 영원의 불멸성과 같이 이론적 증명이 불가한 주제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희망의 세계, 즉 실천이성 같은 도덕적 관점에서는 "공의의 심판자"로써 절대적 신의 존재를 가정하고 있다. 이처럼 칸트의 철학은 과거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회전한다는 천동설의 사고를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통해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시각을 바꾼 것 같이 우리 인간의 인식과 경험이 중심되는 철학적 사고의 대전환을 가져온 것으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순수이성비판] 칸트가 말하는 이성과 존재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는 어떤 생각으로 지동설을 생각했을까? 그전까지만 해도 모든 사람들이 천동설을 주장했다. 천동설이든 지동설이든 무엇인가 움직인다는 것을 전제로 나온 말이다. 하늘의 별이 움직일까? 아니면 지구가 움직일까? 천동설이란 관찰하는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가능한 말이다. 즉 관찰자는 움직이지 않고 별만 움직인다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이렇게 관찰자는 움직이지 않고 별이 움직인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는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그것은 곧 관찰자는 움직이고 별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렇게 관찰자가 움직인다는 것은 관찰자가 있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이고 이것이 곧 지동설을 탄생시킨 원리가 되었다. 이렇게 코페르니쿠스가 관찰자를 돌도록 했을 때 별은 오히려 정지할 수 있었고 이렇게 별들을 정지시킴으로써 자신이 관찰하는 별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었다. 칸트는 이런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을 순수이성비판에 적용시켜보았다. 인식이 대상을 기준 삼는다는 생각에서 대상이 우리의 인식을 기준 삼은 것으로 바꾸어 보았다. 우리의 직관작용이 대상의 성질을 기준 삼지 않고, 우리의 감관의 객관인 대상이 인간의 직관작용이나 능력의 성질을 기준 삼게 할 때 보다 쉽게 대상의 성질을 선천적으로 알 수 있는 가능성을 칸트는 보았다.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는 어떤 생각으로 지동설을 생각했을까? 그전까지만 해도 모든 사람들이 천동설을 주장했다. 천동설이든 지동설이든 무엇인가 움직인다는 것을 전제로 나온 말이다. 하늘의 별이 움직일까? 아니면 지구가 움직일까? 천동설이란 관찰하는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가능한 말이다. 즉 관찰자는 움직이지 않고 별만 움직인다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이렇게 관찰자는 움직이지 않고 별이 움직인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는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그것은 곧 관찰자는 움직이고 별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렇게 관찰자가 움직인다는 것은 관찰자가 있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이고 이것이 곧 지동설을 탄생시킨 원리가 되었다. 이렇게 코페르니쿠스가 관찰자를 돌도록 했을 때 별은 오히려 정지할 수 있었고 이렇게 별들을 정지시킴으로써 자신이 관찰하는 별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었다. 칸트는 이런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을 순수이성비판에 적용시켜보았다. 인식이 대상을 기준 삼는다는 생각에서 대상이 우리의 인식을 기준 삼은 것으로 바꾸어 보았다. 우리의 직관작용이 대상의 성질을 기준 삼지 않고, 우리의 감관의 객관인 대상이 인간의 직관작용이나 능력의 성질을 기준 삼게 할 때 보다 쉽게 대상의 성질을 선천적으로 알 수 있는 가능성을 칸트는 보았다.
[순수이성비판] 칸트가 말하는 이성과 존재
칸트의 대표적인 저서로 1781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순수이성비판』은 ‘이성'에 의한 ‘이성' 자신의 비판을 의미한다. 정당한 요구는 보호해 주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즉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는 월권에 대해서는 그 요구를 거절하는 ‘법정'에서 ‘이성'은 자신의 권한과 한계에 관해 스스로 묻는다. 이러한 ‘이성능력' 자체에 대한 비판은 잃어버린 형이상학의 위엄을 되찾고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일이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어떻게 선험적 종합판단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그의 관심이 ‘학(學)’으로서의 형이상학의 가능성에 있기 때문이다. 즉 형이상학에서의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탐구함으로써 증명된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형이상학이 존재한다면 그 인식의 타당성은 어디까지 미치는가? 바로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의 중심 과제이고 그 답을 구하기 위해 칸트는 수학과 자연과학의 방법을 원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식능력의 한계를 넘어서서 대상인식을 시도한 모든 이전의 이성의 월권에서 벗어나서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밝히는 일은 이제 ‘선험적 종합판단'으로 이루어진 형이상학적 진술의 가능성을 탐구하여 선험적 인식의 원천과 범위, 그리고 그 한계를 규정하는 일로 요약된다. 우리에게 가능한 경험의 대상은 시간, 공간 중에 주어지는 ‘현상'이지 결코 인식 주관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사물 자체'일 수 없다는『순수이성비판』의 핵심 생각을 통해 칸트는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고 있다.
[순수이성비판] 칸트가 말하는 이성과 존재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서양 철학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칸트는 종래의 실재론을 전도(轉倒)시키고 새로운 실재론을 제시하였다. 종래의 실재론은 인간이 인식의 대상에 접근해 가서 대상을 모사(模寫)하고 대상에 동화(同化)되는 것 즉 인식의 대상이 주체이고 인식하는 인간은 객체라고 하였다. 이에 반해 칸트는 인간에게 주어진 감각적 질료들을 인간 지성의 틀로 묶어서 해석해 내는 것 즉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인식은 자연을 철자화(綴字化)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종래의 진리는 인식의 범위를 초월하여 존재한다고 하였으나 칸트는 경험의 범위 안에 들어올 때만 존재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초월적 실재론으로부터 경험적 실재론으로 철학적 사고의 전환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 칸트가 말하는 이성과 존재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서양 철학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은 그당시 세계관인 ‘태양이 지구를 돈다’를 뒤업고 ‘지구가 태양을 돈다’라는 세계관의 대전환이었다.
철학사에서 본다면 칸트의 “초월적 실재론으로부터 경험적 실재론으로 철학적 사고의 전환이 일어난 것”을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을 가져 왔다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칸트는 존 로크의 경험론을 ‘초월적 실재론’ 이라 하였고, 자신의 것은 ‘경험적 실재론’이라 부르고,
존 로크의 인식의 대상과 인간 간에 설정된 주, 객의 관계를 뒤집었다.
로크는 인식의 대상이 인식의 범위를 초월하여 존재한다고 하였으나, 칸트는 인식의 대상은 경험의 범위안에 들어 올때만 인식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인식이란 인간이 대상에 접근해 가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감각적으로 주어진 어떤 것들을 인간지성이라는 틀로 대상물을 읽어내는 것이다"라고 발상의 전환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서양 철학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은 그당시 세계관인 ‘태양이 지구를 돈다’를 뒤업고 ‘지구가 태양을 돈다’라는 세계관의 대전환이었다.
철학사에서 본다면 칸트의 “초월적 실재론으로부터 경험적 실재론으로 철학적 사고의 전환이 일어난 것”을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을 가져 왔다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칸트는 존 로크의 경험론을 ‘초월적 실재론’ 이라 하였고, 자신의 것은 ‘경험적 실재론’이라 부르고,
존 로크의 인식의 대상과 인간 간에 설정된 주, 객의 관계를 뒤집었다.
로크는 인식의 대상이 인식의 범위를 초월하여 존재한다고 하였으나, 칸트는 인식의 대상은 경험의 범위안에 들어 올때만 인식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인식이란 인간이 대상에 접근해 가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감각적으로 주어진 어떤 것들을 인간지성이라는 틀로 대상물을 읽어내는 것이다"라고 발상의 전환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순수이성비판] 칸트가 말하는 이성과 존재
이성의 자율적 사용, 이를 위해서 칸트가 제안한 것이 바로 ‘이성 비판’이다. 칸트는 계몽의 모토가 “과감하게 알려고 하라!” “따져 보라!”라고 말한다. 이성 비판이란 바로 과감하게 알기 위해서 열심히 따져보는 것이다. 이성이란 인간의 지적 능력을 통칭하는 것인데, 그러한 능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분석하고 평가해 보라는 것이다. 요컨대 이성에 대한 이론이나 교설(doctrine)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한계를 긋고 명료하게 하는 작업이 바로 이성 비판인 것이다.
데카르트와 뉴턴 이후,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모든 물리적 대상과 자연 현상은 더 이상 전통적인 철학의 탐구 대상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계몽철학자들에게 남겨진 철학의 탐구 대상은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율성을 지닌다고 여겨지는 인간의 정신뿐이었다. 칸트는 바로 인간의 이성에 대해서 세 가지 질문을 함으로써 계몽주의 철학의 완성을 기획한 것이다. 칸트가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이고, 두 번째 질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질문은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이다. 첫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쓴 책이 [순수이성 비판]이고, 두 번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쓴 책이 [실천이성 비판], 그리고 마지막 질문에 답하고 있는 책이 [판단력 비판]이다. 이것이 바로 칸트의 유명한 3대 비판서이다.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 학문적 인식이 가져야 할 논리적 구조를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인식은 ‘경험과 더불어(with experience)’ 시작된다. 경험 없이는 어떤 인식도 가능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칸트는 경험론에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칸트는 모든 인식이 ‘경험으로부터(from experience)’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경험만 가지고는 얻어지지 않는 선천적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선천적 인식’이란 시간적으로 경험보다 앞선 인식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경험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즉 보편성과 필연성을 지닌 인식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험은 구체적이고 제한적이어서 우리는 경험 자체만으로는 결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지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합리론자에게도 한 표를 주고 있는 셈이다
이성의 자율적 사용, 이를 위해서 칸트가 제안한 것이 바로 ‘이성 비판’이다. 칸트는 계몽의 모토가 “과감하게 알려고 하라!” “따져 보라!”라고 말한다. 이성 비판이란 바로 과감하게 알기 위해서 열심히 따져보는 것이다. 이성이란 인간의 지적 능력을 통칭하는 것인데, 그러한 능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분석하고 평가해 보라는 것이다. 요컨대 이성에 대한 이론이나 교설(doctrine)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한계를 긋고 명료하게 하는 작업이 바로 이성 비판인 것이다.
데카르트와 뉴턴 이후,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모든 물리적 대상과 자연 현상은 더 이상 전통적인 철학의 탐구 대상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계몽철학자들에게 남겨진 철학의 탐구 대상은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율성을 지닌다고 여겨지는 인간의 정신뿐이었다. 칸트는 바로 인간의 이성에 대해서 세 가지 질문을 함으로써 계몽주의 철학의 완성을 기획한 것이다. 칸트가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이고, 두 번째 질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질문은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이다. 첫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쓴 책이 [순수이성 비판]이고, 두 번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쓴 책이 [실천이성 비판], 그리고 마지막 질문에 답하고 있는 책이 [판단력 비판]이다. 이것이 바로 칸트의 유명한 3대 비판서이다.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 학문적 인식이 가져야 할 논리적 구조를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인식은 ‘경험과 더불어(with experience)’ 시작된다. 경험 없이는 어떤 인식도 가능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칸트는 경험론에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칸트는 모든 인식이 ‘경험으로부터(from experience)’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경험만 가지고는 얻어지지 않는 선천적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선천적 인식’이란 시간적으로 경험보다 앞선 인식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경험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즉 보편성과 필연성을 지닌 인식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경험은 구체적이고 제한적이어서 우리는 경험 자체만으로는 결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지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합리론자에게도 한 표를 주고 있는 셈이다
[순수이성비판] 칸트가 말하는 이성과 존재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서양 철학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존의 철학사상: 존 로크를 중심으로 하는 영국의 경험주의에서는 '초월적 실재론'을 주창함. 대상은 인간의 의식과 무관하게 자연에 존재한다고 봄. 인간의 인식의 대상이 주체이고 인식하는 인간이 객체라고 봄. 로크에게 꽃은 인간의 의식과 무관하게 거기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
기존의 로크의 철학사상과 대비되는 칸트의 관점: 종래의 '초월적 존재론'을 비판하고 '경험적 실재론'을 주창함. 대상은 인간이 인식할 때만 비로서 존재하는 것. 인식할 수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봄. 인간의 인식이 주체이고 대상은 객체로 바뀜.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이루어짐. 칸트에게 있어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인식은 자연을 철자화 하는 과정. 인간이 인식하지 않는 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봄. 인간이 그 대상을 꽃이라고 규정할 때만 존재함.
칸트에게 있어서 '있다'는 것은 시공간 상에 나타나고 수량화할 수 있을 경우에만 가능함. 삼라만상은 수량화 가능하다. 칸트의 철학은 수학적 자연과학. 칸트의 진리 개념은 인간의 의식과 의식에 의해 인식된 사물의 동일 형식성을 의미함. 인식이 참이면 참된 인식에 비롯된 존재도 참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서양 철학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존의 철학사상: 존 로크를 중심으로 하는 영국의 경험주의에서는 '초월적 실재론'을 주창함. 대상은 인간의 의식과 무관하게 자연에 존재한다고 봄. 인간의 인식의 대상이 주체이고 인식하는 인간이 객체라고 봄. 로크에게 꽃은 인간의 의식과 무관하게 거기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
기존의 로크의 철학사상과 대비되는 칸트의 관점: 종래의 '초월적 존재론'을 비판하고 '경험적 실재론'을 주창함. 대상은 인간이 인식할 때만 비로서 존재하는 것. 인식할 수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봄. 인간의 인식이 주체이고 대상은 객체로 바뀜.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이루어짐. 칸트에게 있어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인식은 자연을 철자화 하는 과정. 인간이 인식하지 않는 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봄. 인간이 그 대상을 꽃이라고 규정할 때만 존재함.
칸트에게 있어서 '있다'는 것은 시공간 상에 나타나고 수량화할 수 있을 경우에만 가능함. 삼라만상은 수량화 가능하다. 칸트의 철학은 수학적 자연과학. 칸트의 진리 개념은 인간의 의식과 의식에 의해 인식된 사물의 동일 형식성을 의미함. 인식이 참이면 참된 인식에 비롯된 존재도 참이다.
[순수이성비판] 칸트가 말하는 이성과 존재
6강. 순이비가 남긴 과제: 비판: 한계를 규정하여 그 한계내에서 의미있는 것들을 추출해 내는 작업.// 지식: 대상이 감성에 주어지고 인간의 지성개념에 의해 결합할 수 있는 것들. 현대사회는 지식의 차원으로 설명되는 것만을 신뢰함.// 인간은 알고자 하는 존재/ 실행하는 존재/ 행복을 희망하는 존재.// 칸트는 시공간에 갇혀 있는 존재의 세계에서는 성립될 수 없지만 희망의 세계에서는 심판자인 신의 존재를 기대할 수 있다고 봄.// 진,선,미,성 삶의 각기 다른 영역에서 고유한 다른 가치를 지니고 기능한다고 주장. 지식이 아닌 것을 지식으로 설명하려고 해도 안되고,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부인해도 안된다.// 만일 이론 이성과 실천이성이 상충할 때는 실천이성을 우선하여 판단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