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릉

동아시아 왕릉 비교

능선 정동윤 2014. 2. 26. 07:46

한국과 중국 능침제도의 비교
  • 서양과 동양의 자연관의 큰 차이는 자연을 커다란 생명체로 인식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다. 한국과 중국은 전통적으로 자연을 생명을 가진 유기체로 해석하여 인간과 자연, 인간과 만물을 근원적으로 동일시하였다. 이러한 자연관은 유교, 도교, 불교에 모두 나타나 있다. 사람들이 거처하는 주변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자 하는 이러한 사상은 땅의 힘과 생기인 지덕(地德)의 힘을 중시하는 사상으로 발전하고, 죽은 후에 묻히는 공간도 중시하게 되어 살아 있을 때의 주거는 양택(陽宅), 사후의 주거는 음택(陰宅)으로 삼게 하였다.

  • 한국과 중국에서 왕릉은 음택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에 속하며, 이런 측면에서 한국과 중국의 능침제도는 시신을 화장하지 않고 매장하는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풍수지리설에 따라 길지를 택해 능을 조영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능의 터로 택하는 곳은 햇볕이 잘 들고 식물이 잘 자라는 곳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능침과 명, 청 시대 능역 주위에는 송백을 심고 벌채를 금지하였으며, 경비를 삼엄하게 하였다. 또한 해자역(垓字域)으로 설정하여 능역 안에 금표를 세우고 농경, 목축 등 일체의 행위를 금하였다.

  • 한국과 중국의 능침은 기본적으로 당시의 세계관을 지배하였던 유교 예제에 따라 남향을 선호하였으나, 풍수적인 이유로 반드시 이에 국한시키지는 않았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평원한 곳에 자리 잡은 명, 청 시대의 능침과 달리 배산임수한 지형의 산기슭에 능원을 구축하여 좌우로 용호가 옹립하는 형국이 되도록 하였다. 명, 청 시대의 능침은 좌우 대칭을 이루는 직선 축 상에 봉분과 시설물을 배치하고, 주산과 안산을 바라보도록 하였다. 반면 조선시대의 왕릉은 능 뒤의 주봉과 능 앞의 안산을 고려하여 배치를 하였지만, 축은 자연 지세에 맞추어 봉분과 시설물이 일직선을 이루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주봉과 안산 봉우리에 중심 축선을 맞추지 않았다. 또한 한국의 풍수사상에서는 산을 숭배하는 전통 풍습과 결합하여 산신제를 지내는 상돌인 산석을 조선시대 능침의 정자각 뒤에 두도록 하였으나, 명, 청시대의 능침에는 이러한 시설이 없다.
    사진-청동릉을 바라본 전경/조선왕릉 헌릉
  • 능침제도는 살아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능묘에 참배하고 제사 지내게 하기 위한 목적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명, 청 시기의 능침은 현재 그 기능이 사라진 반면, 조선시대의 능침에는 아직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정례적으로 능제가 행해지고 있는 차이점을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의 태묘가 현재 그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조선시대의 종묘는 현재까지 그 기능을 유지하기 때문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과 같은 맥락을 이룬다. 특히 조선시대에 능침을 조성할 때마다 남긴 산릉도감의궤와 능지 등 왕릉 조성과 관련된 많은 기록 문헌은 당시의 능침제도를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문헌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진-건원릉 제례 1, 2
  • 무엇보다도 조선시대의 능침이 중국 명, 청시대의 능침과 차이를 보이는 것은 능침이 형성하는 풍경이다. 명, 청시대의 능침은 풍수가 좋은 자연을 차지하여 자연의 주인이 되게 자리를 잡고 있지만, 조선시대의 왕릉은 자연과 함께하는 풍경을 연출한다. 특히, 강(岡) 아래에서 능원을 쳐다볼 때 펼쳐지는 풍경은 왕릉에 설치한 동물상, 인물상 등 석물들과 함께 조선시대 왕릉의 단아함과 검박함이 극에 이르게 한다.

  • 조선시대의 능침제도는 통일신라시대에 정착한 한국의 능침제도가 고려시대를 거쳐 이어진 것이면서, 조선시대의 유교 예제와 전통적인 풍수사상이 조화를 이루어 형성된 결과로 볼 수 있다.

  • 베트남 응우엔 왕조의 능과 제도
    • 베트남은 오랜 왕조의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왕릉 유적을 뚜렷이 남기고 있는 것은 마지막 왕조인 응우엔 왕조이다. 특히 응우엔 왕조의 왕릉은 도성인 후에시 외곽에 자리 잡고 있으며 후에시의 도성 유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베트남의 여러 왕조 가운데 응우엔 왕조의 능제에 초점을 맞추어 비교하기로 한다.

    • 베트남 응우엔 왕조는 1802년에 전국을 통일하여 새 왕조를 열었다. 새 왕조는 국왕을 황제로 칭하고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통치 체제를 재편하였다. 응우엔 왕조는 제2대 황제 민망(明命)제때 국토를 확장하여 현재의 영토를 확정짓고 청나라를 모방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4대 뜨득제 재위 시에는 이미 프랑스 세력이 남부 지방의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고 1887년 베트남을 포함한 인도차이나의 식민통치를 공식화하여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왕조 자체는 제13대 황제인 바오다이제 치하의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사진-민망황제릉 보성/뜨득황제릉 보성
    • 응우엔 왕조의 황제릉은 조성 기간에 각각 차이가 있다. 2대 황제의 능과 3대 황제의 능은 조선왕릉과 마찬가지로 황제의 죽음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초대 황제인 쟈롱 황제는 그 재위 기간 동안 자신의 능을 조성했으며, 4대 황제인 뜨득 황제는 1818년에서 1883년까지 가장 긴 시간 황제에 있었으며 재위 기간 중 1864~1867년에 능을 조성하였다. 뜨득황제는 일찍 능을 조성하고 침전 부분은 이궁(離宮)으로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