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회화 100선
북한산의 봄은 아직 멀었다. 혹시나 하는 기분으로 옷을 얇게 입고 갔다가 감기만
얻어왔다. 산행 중에 바람이 심하게 불었던 향로봉 근처에서 바위틈에 숨어있던
바이러스를 유혹하는 정령들이 바람을 타고 몸속으로 침투해 온 들어온 것 같다.
겨울과 봄의 경계인 지금은 경계의 중심이 봄으로 조금 옮겨진 곳에 위치이지만
겨울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겉옷을 입으면 덥고 벗으면 추운 애매한 계절이다.
그래도 친구와 부인네들과 함께 산을 넘고 자리를 만들어 오찬을 즐겼다.
북아등을 하면 안다.
멀리 가는 것 보다, 오래 가는 것 보다 함께 가는 것이 낫다는 것을.
산에서 내려와서 친구들과 헤어진 뒤에 아내와 함께 덕수궁을 향했다.
학교 다닐 때 시청을 중심으로 미술관이나 시민회관에 전시된 미술품과 서예전을
자주 관람하러 다녔는데 어느 때 부터인지 발길을 뚝 끊었었다.
최근에 다시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 발걸음을 하고 있는데
오늘은 우리나라 근현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대표작을 덕수궁 현대미술관에 모아
지난해 가을부터 올 3월 30일 까지 전시하고 있는데 몇 번이나 벼루다가 오늘에서야
겨우 가기로 하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들의 대표작을 골라 명시선이란 이름으로 1권에 모아서
발간하는 것처럼 회화도 57명의 화가가 100편의 작품을 골라서 전시하였으며
화집도 만들어 판매하기에 한 권을 사서 소장하며 두고두고 펼쳐볼 계획이다.
오늘은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보고 느낀 감상을 적어볼까 한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왠지 침울해진다. 선명하지 않는 배경과 드러나지 않는
표정이나 하늘도 땅도 지붕도 나무도 사람도 모두 같은 톤의 애매한 모습이다.
옛날 카오스(혼란)시대에는 바다도 액체가 아니고 땅도 고체가 아니며
하늘의 공기도 불투명한 어지러운 시대가 있었다..이 혼돈의 시대에서 가벼운
물질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무거운 물질은 가라앉아 땅이 되고 그 아래로
바다가 되어 세상의 혼돈이 정리되고 숲과 나무와 계곡과 산과 들이 생겼다.
박수근의 그림은 온통 혼돈의 물질이 화폭 전부를 뒤덮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
안개처럼 희미한 그림이 나타나 빨래하는 여인이 보이고 골목길에 서 있는
아이들이 보이고 사물놀이 하는 농부들이 보인다.
내 눈에는 얼어붙은 강물 위에 금을 그어가면서 그림으로 표현하거나 모래 바닥에
선을 그으며 사람을 그리고 지붕을 그리고 벽을 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주장하는 바를 선명하게 표현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며 몸짓이나 발짓으로
또는 몸과 발의 방향만을 보여 주면서 암시로 은유로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처럼 주장이 당당한 시절에는 참 보기 어려운 작풍이다.
함부로 주장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는 시절인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의 혼란기,
한국전쟁과 암울한 시대를 지나오면서 우리들을 감싸고 있는 시대적 분위기가
그의 그림의 배경처럼 모호하게 표현하여 주장을 감추려는 시도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찬찬히 보면 한 시절의 애환이 모두 담겨있는 토속적 애련이 보인다.
시간이 나면 이중섭의 그림도 적어 두련다.
전시장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화보를 구입하여 일부 소개하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