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선 정동윤 2014. 4. 20. 11:23

 

 

지난 2주 동안 토요일의 북아등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조카의 결혼식과 문경 조령산을 다녀오는 동안

북한산에도 봄이 무르익고 있었다.

올해따라 북한산 진달래가 더 화려하게 피었다.

분홍은 더 진한 분홍으로, 창백한 꽃은 더욱 창백한 모습으로 무성하다.

수상한 기상의 이변으로 생존의 위협을 느끼면

소나무는 솔방울을 더 많이 만들어 더 많은 씨를 뿌리려는 것처럼

진달래도 더욱 화려한 꽃을 피워 생존 본능에 충실해지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흐릿한 눈으로 책을 읽다가 돋보기안경을 쓴 기분이다.

백내장 수술을 마친 환자의 눈에 진달래가 숨 막힐 듯 달려드는 기분이다.

 

천수 근엽이 순질이 그리고 내가 독박골로 먼저 출발하였고

종수는 구기동으로 올라와서 우리가 머물고 있는 승가봉 근처의 북아등 카페로 합류하였다.

북쪽의 그늘진 곳에 자리잡고 있지만 오늘은 한기를 거의 느끼지 못하였다.

약 2시간 가량의 오찬을 하는 동안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불량 시스템과 안전 불감증, 중구난방의 추측 방송과 각종 전문가의 주관적 견해의 남발,

어려운 상황에서도 공을 다투는 공무원 모습과 피해자의 슬픔에 파묻힌 사회적 분위기 등등...

그러나 분노를 삭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치료책은 천천히 시간을 갖는 일이다

 

하산 중에 종수에게 중세 이후 르네상스 시대의 3대 화가인 레오나르드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중에서

바티칸시티의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진 라파엘로의 그림에서 물속에 빠뜨리는 지옥의 모습을 상기하였더니

종수는 "천지창조"라는 제목이라며 그림 중의 일부로 기억하였다.

아물아물 하는 중에 종수의 단호한 대답을 수긍하며 그의 서양회화에 대한 안목을 내심 감탄하며

하산하였지만 불확실한 내 기억에 화가 나서 다시 확인한 결과

라파엘로가 아니고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었다.

정리하면 시스티나 성당의 성찬대 벽에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고

그 그림 아랫부분에 물에 빠지는 지옥의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그 성당의 천정에는 신의 손끝과 아담의 손끝이 닿으려는 그림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그려져 있고 성경 창세기 편에 등장하는 9개의 중요 장면 중 일부로

아담의 창조도 그려져 있음을 확인하였다.

어느새 우리도 기억조차 흔들리는 나이에 접어들었나 보다.

 

하산 후 순질이는 귀가하였고 남은 우리들은 영등포의 프로 투, 당구장으로 향하였다.

당구는 끊임없이 점수를 매기며 등수를 확인하는 승자독식의 게임이지만

이곳에서의 승자는 분배의 작은 이익으로 만족하고 만다.

고수와 최고 득점자의 우월한 지배가 아니라

협력과 화해 협상의 논리가 힘을 받아 때론 역지배의 현상도 나타난다.

인류 초기의 수렵 시대에도 사냥물의 독점은 허용되지 않았다.

혼자 독식하였다가 나중에 알려지면 눈 밖에 나서 다른 사냥물에 대한 정보나

큰 사냥감을 만났을 때 주변의 협조를 전혀 받지 못하여 왕따를 당한 뒤 도태되는 것이다.

사자 무리의 일부가 사냥에 성공하면

사냥에 참가하지 않은 사자들도 당당하게 식사에 참여하는 것도

독점을 허용 않는 생존전략이 아닐까 한다.

아무도 사냥에 참가하지 않은 사자에게 먹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없다.

프로 투에서는 약자도 좋은 파트너와 힘을 합치면 승자가 되고,

게임에 진 고수도 그닥 억울해 하지도 않는다.

500만년 인류 역사에서 짧은 농경시대와 산업사회의 빈익빈 부익부의 논리가 아니라

구석기 시대부터 수백년 동안 이어 온 평등한 분배의 수렵시대의 법칙을 적용해가는,

뇌가 큰 인간의 놀이로 당구 게임은 발전해 나갈 것 같다.

이런 곳에서의 생존을 위해서는 겸손이 최고가 전략이 아닐까 판단된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시간이 금방 지나가고

성호가 차려 준 맛있는 저녁을 먹은 뒤에 총총 빠져 나왔다.

 

 -정동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