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은?
훈민정음, 승정원일기, 직지심체요절, 동의보감, 일성록, 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 새마을운동 기록물, 난중일기 등과 함께 1997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란 태조(太祖)부터 철종(哲宗)에 이르는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행적을 편년체로 기록한 28종을 지칭하는 말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편찬과정을 살펴보면 왕의 사후, 실록청(實錄廳)을 임시로 설치하여 편찬과정에 접어든다. 실록청에 속한 사관은 전임사관으로 예문관의 봉교(奉敎) 2인, 대교(待敎) 2인, 검열(檢閱) 4인 등 총 8명 중심이 되어 실록을 편찬한다.
실록의 편찬은 대체로 3단계를 거치면서 이루어진다. 첫째 단계는 1·2·3의 각 방에서 춘추관의 시정기 등 각종 자료들 중에서 중요한 사실을 가지고 초초(初草)를 작성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초초 가운데 빠진 사실을 추가하고 불필요하고,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여 중초(中草)를 작성하는 것이며, 셋째 단계는 총재관과 도청 당상이 중초의 잘못을 재수정하는 동시에 체제와 문장을 통일하여 정초(正草)를 작성하는 것이다. 3단계를 거치고 마지막으로 수많은 사초(史草)에서 필요한 정보들을 편집하여 실록으로 완성하였다. 실록의 편찬 과정에서 사초의 관리는 매우 엄격하게 유지되었고, 편찬 당사자들도 사초나 실록의 내용에 대한 기밀 유지와 공정하고 정직한 직필(直筆)의 의무가 강조되었다.
조선 초기 조선왕조실록은 원래 고려실록을 보관하였던 충주사고에 보관하였다. 하지만 1439년 6월 사헌부의 건의에 따라 전주와 성주에 사고를 새로 설치하고 모두 4부를 만들어 춘추관·충주·전주·성주의 4사고에 각기 1부씩 봉안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춘추관과 충주·성주 사고의 실록은 모두 병화(兵火)에 소실되었다. 다행히 전주사고의 실록만은 경기전(慶基殿) 참봉 오희길(吳希吉)과 선비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에 의해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13대의 실록 804권과 기타 소장 도서들을 모두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겨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정은 강화도 마니산,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에 사고를 새로 설치하고 각각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다. 이 4대 사고 가운데 묘향산사고의 실록은 정묘호란 이후, 청나라와 외교 관계가 악화되어가자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에 새로 사고를 지어 옮겼다. 마니산사고의 실록은 청나라 군대에 의하여 크게 파손되어 같은 강화도내의 정족산에 새로 사고를 지어 옮겼다. 그 뒤 철종까지의 실록이 정족산·태백산·적상산·오대산의 4사고에 각각 1부씩 보관되어, 20세기 초까지 온전하게 전해져 내려왔다.
그러나 실록은 1910년에 일제강점기 시대에 큰 수난을 겪게 되었다. 정족산·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규장각 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로, 적상산사고의 실록은 구황궁(舊皇宮) 장서각에 이관되었다. 그리고 오대산사고의 실록은 일본이 동경제국대학으로 탈취해갔다.
그 뒤 동경제국대학으로 탈취해간 오대산 실록은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었고 다행히 보존된 74책 가운데 27책은 1932년,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나머지 47책 2006년 7월 7일 동경대학교에서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옮겨졌다. 한편 태백산 사고 실록은 부산기록정보센터(현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다.
조선 초기부터 편찬되어 21세기까지 보존된 조선왕조실록. 이번 강연을 통해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정과 보관방법을 상세히 알아보고 왜 위대한 기록유산인지 알아보자.
조선왕조실록이 주목되는 이유는 수정실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왜 수정실록이 존재했던 것일까? 실록은 전임 왕에 관한 기록으로 후대 왕의 집권세력에 의해 편찬되었다. 그런데 선조때부터 붕당정치가 가속화되면서 정당간의 권력 교체가 생기면서 권력을 잡은 정당의 입장에서만 실록을 편찬할 가능성 때문에 수정실록이 쓰이게 되었다. 수정실록에는 <선조수정실록>, <현종개수실록>, <경종수정실록> 이 있고 이와 다르게 기존 실록의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부록으로 만든 형태의 <숙종실록보궐정오>가 있다.
조선왕조실록 중에는 '일기'라는 이름의 실록이 2종 있다. <연산군일기>와 <광해군일기>가 그것이다. 이들은 반정에 의해 쫓겨났기 때문에 왕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왕자 시절의 호칭인 군으로 남아 일기라 쓰인 것이다. 단종도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노산군 일기>로 남아 있다가 조선후기인 숙종 대에 복위되면서 <단종실록>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우수성을 더욱 잘 볼 수 있는 것은 조선왕조실록과 더불어 실록 편찬의 전 과정을 완벽하게 정리한 ‘실록청의궤’가 다수 남아있다는 것이다. 또한 실록의 꾸준한 관리를 위해 ‘실록형지안’을 작성한 것이 주목된다. ‘실록형지안’은 실록의 봉안(奉安)이나 포쇄(暴灑), 실록의 고출(考出:사고에서 열람함) 등으로 사고를 열어야 할 때 그 사유와 함께 당시에 보관되었던 서책의 상황을 기록한 서류이다. 이때 사고의 문은 중앙에서 파견된 사관이 아니면 함부로 열지 못하도록 하였다.
실록에 대한 엄격한 관리를 보여주는 것이 3년마다 행했던 포쇄(暴灑) 작업이다. 포쇄는 책을 바람과 햇볕에 말려 습기를 제거하여 서적을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한 것으로서 주로 봄․가을에 길일을 택하여 작업이 이루어졌다. 포쇄의 구체적인 의식 절차가 기록되어 있는 책이 바로 <한원고사(國學資料)>이다.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사관인 신정하(申靖夏, 1681~1716)는 1709년 가을, 포쇄관에 임명되어 태백산사고에서 포쇄를 갔다 온 적이 있었다. 신정하는 이때의 상황을 「태백기유」라는 기행문과 「포사」라는 시로 남겨 놓았다. 기행문인 「태백기유」와 시 「포사」에는 포쇄의 광경과 포쇄에 임하는 사관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실록에는 생활사에 관한 다양한 기록들이 눈에 띈다. 왕의 정치 관련 기록뿐만 아니라 생활에 관한 내용이 풍부한 것은 각 관청의 업무 일지에 해당하는 시정기의 기록이 실록 편찬에 참고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에는 정치에 관련하여 토지세법에 관한 의견을 국민투표로 조사한 결과가 기록되어 있다. 각 지역의 찬·반 투표결과가 상세히 나타나있는 점으로 세종의 민주정치 실현을 엿볼 수 있다.
실록에는 홍수나 우박, 해일 뿐만 아니라 가뭄, 지진 등 자연재해에 관한 기록을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농업이 중심이 되었던 만큼 자연재해는 국가의 경제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인데 홍수나 가뭄 등 자연재해가 빈번한 경우 왕은 신하들에게 피해를 막는 방법을 상소문으로 올릴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고, 자연재해의 피해가 큰 경우 자연 현상을 관측하는 기관인 관상감의 관리들이 처벌하는 경우도 있었다.
실록에는 국왕의 건강과 관련된 기사도 찾을 수 있는데, 조선의 대표적 성군인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과 탕평책을 펼친 영조에 대한 기록이다. 위대한 업적 뒤에 숨겨진 실록 속 생활모습은 어떻게 달랐을까? 조선의 최장수 왕 영조의 경우 채식 위주의 식단을 주로 한 것이 나타나며, 조선시대 최고의 업적을 쌓았음에도 각종 질환에 시달렸던 세종의 경우 육식을 좋아했음이 나타난다. 실록에서 왕의 건강과 같은 세세한 부분까지도 살펴볼 수도 있다는 점은, 실록이 지닌 기록의 우수성을 보다 돋보이게 하고 있다.
<태종실록>에는 코끼리가 일본에서 건너 온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에 처음으로 들어온 코끼리는 엄청난 식사량과 사람을 밟아 죽게 했다는 죄목으로 전라도 장도라는 섬에 보내졌다. 이렇게 흥미로운 생활상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드라마 장금(長今)도 실록에 여섯 번이나 등장하는 실존인물이다. “대비전의 증세가 나아지자, 국왕이 약방(藥房)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의녀 신비와 장금(長今)에게는 각각 쌀과 콩 각 10석씩을 하사하였다.” 장금은 위의 실록과 ‘호산(護産)의 공이 있다’거나, 왕의 병환에 ‘오령산, 밀정(蜜釘) 등의 약재를 썼다’는 기록에서 보이듯 약재에 밝았던 전형적인 의녀로, 드라마 속 ‘궁중음식의 달인’이라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영 화 ‘왕의 남자’의 주인공 공길 역시 『연산군일기』에 기록된 실존 인물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실록 속 실존인물들을 모티브로 하여, 많은 콘텐츠들을 계속해서 생산 할 수 있는 발전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태종이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라는 『태종실록』의 기록을 보아, 사관이 얼마나 기록에 철저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왕의 행위 하나하나를 있는 그대로 기록한 사관들, 이러한 기록문화는 우리 시대에도 계속해서 계승되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