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지도로 위로 걷다.
오늘은 서울의 관문인 서울역을 출발하여 결혼식이 있는 북촌한옥마을의
가회동 성당까지 옛길을 느끼며 걷기로 하였다.
화재로 소실 되었다가 복원된 숭례문을 통과하여 남대문로를 따라 걸었다.
한 때 숭례문 현판이 세로로 세워져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하기도 하였다.
풍수지리에 따른 화기를 예방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옛지도에는 지금의 세종로가 없다.그래서 한국은행 앞을 지나 을지로 입구의
롯데백화점을 통과하여 종각역에 도착하여 보신각을 바라보았다.
서울을 상징하는 대표적 목조 건물이다.
그래서 서울특별시 기념물 10호로 지정하여 철저히 관리를 하고 있다.
아침에 파루라 하여 33번 종을 치고 저녁엔 인경이라 하며 28번 종을 쳤는데
요즘은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딱 한 번 제야의 타종을 33 번을 치고 있을 뿐이다.
이 중요한 건물의 용마루와 내림마루,귀마루를 보면서 상당히 놀랐다.
기와지붕 용마루가 시멘트로 지어진 것은 처음 보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수기와로 차곡차곡 쌓아 용마루 내림마루 귀마루의 몸통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냥 시멘트로 만들어 버렸으니 전통 한옥하고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내림마루와 귀마루에 올려진 용머리는 몸통이 없는 황당한 모습으로 보였다.
고사상에 올려진 돼지머리처럼 생뚱맞게 보인다.
또 귀마루에 잡상을 올리지 않은 것은 종소리와도 관련이 있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용마루 등의 시멘트 처리는 납득하기 어려운 아쉬움을 남긴다.
문화재 관련 인사들의 무관심도 놀랍고 서울시의 문화에 대한 안목도 겁이 날 지경이다.
더 보고 있기가 민망하여 얼른 갈 길을 잡았다.
운종가(종로)를 질러서 조계사 쪽으로 올라갔다.
조계사에서 백송과 대웅전의 삼존불을 둘러보고 나왔다.
대웅전 건물의 용마루와 처마마루를 보니 새삼 종각의 용마루와 비교가 되었다.
백송을 보러 갔다가 지붕만 본 기분이다.
대웅전의 금빛 찬란한 삼존불(석가모니불,약사여래불,아미타불)을 뵙고,
그 웅장하고 장대한 모습은 보는이들을 압도 할만큼 위풍당당하였다..
인간의 존재가 한낱 미물에 불과해 보일 정도로.
인사동 앞을 지나 종로경찰서,안국역을 지나 북촌으로 갈까 하다가 대원군이 살았던 운현궁에 잠깐 들렀다.
조선 말기 정국을 주도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하응의 저택을 보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지금 민간으로 남아있는 한옥 중에서 그나마 규모가 줄어 들었지만 가장 잘 보존되고 있는 건물이 아닐까 한다.
붐비는 바깥 세상과 달리 이곳 운현궁은 고즈늑하고 여유로웠다.
건물은 노안당, 노락당, 이로당이 주축이고 수직사와 행각들이 부수 건물로 배치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민가의 고택들은 마당채, 사랑채,안채,후원,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게 보편적인데
이곳은 왕의 잠저이고 종묘가 따로 존재하고 있어서 인지 조상을 모시는 사당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뒤뜰을 잠시 걸었다. 한적하기 그지 없다.
예전에는 집안에 나무를 심지 않았다고 한다.
한자의 困. 담장 안에 나무가 있으면 곤할 곤자가 된다.
나무를 심어도 담장 한 켠에 나란히 심지만 마당 한복판에 거의 심지 않았다.
후원으로 생각되는 이곳에도 화려한 꽃나무나 고목 대신에
관목과 괴석으로 단순하게 처리한 정원의 모습이다.
정원의 괴석은 중국 정원의 특징 중에 하나다.
소나무,철쭉,대나무로 수목이 많지 않다.
운현궁에서 한참을 머물다가 북촌으로 가는 중에
헌법재판소 안에 있는 백송이 보고 싶어졌다.
이 근처로 지나가면 빠지지 않고 찾아 보는 나무다.
천연기념물 제 8호이다.
나무의 줄기가 하얗기 때문에 백송이고 리기다소나무처럼 바늘잎이 3개이다.
백송을 보고 돌아 나오다 살며시 꽃을 피우고 있는 박태기나무를 보았다.
박태기 나무는 꽃이 밥알을 튀겨 놓은 것처럼 보여서
나무 이름도 밥튀기에서 박태기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조금 일찍 도착한 덕분에 옥상으로 올라가 북촌의 집들을 볼 수 있었다.
가회당 성당 옥상에서 바라 본 북촌 일대의 모습.
백악을 배경으로 남향 집이 많다.
가회동 성당 내의 건축물 중 한옥은 북촌한옥마을 중에서 가장 완벽한 기와집이 아닐까 한다.
대청마루에는 올라갈 수 없었지만 쪽마루에 앉아 담소를 나누기도 하였고
신발을 벗어야하는 누마루에 앉아서는 결혼식에 오는 친구들을 기다리기도 하였다.
지붕의 암막새와 수막새에는 절편의 무늬와 물고기가 그려져 있었는데
알고보니 성경의 오병이어의 상징이라고 들었다.
또 이 한옥을 지은 기술인들은 거의 무형문화재급의 인물들이고 성당에서도
심혈을 기울여 지었다는 얘기를 들으니 새삼 종각의 시멘트 용마루가 생각난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본당다운 역사와 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기에
새삼 고개 숙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