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등 720
수리봉 오르는 바윗길은
직사광선으로 후끈 달아 올랐지만
맑은 하늘 아래 시원한 바람이 간간히 불어 주었다.
아침부터 푹푹 지는 더위
이런 날은 아주 천천히 걸으며
자주 쉬어야 한다.
일상을 피해 떠나왔지만
일상의 껍질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산,
또다른 풍경으로 가라앉아 햇살이 반사된다.
울퉁불퉁한 향로봉 오름길
눈에 익은 소나무가 손짓을 하였다.
땀도 식히고
컥컥 막히는 숨도 가다듬으며 쉬어 가라고.
대성문 지나 형제봉 넘어
북악의 삼청계곡으로 좀 멀리 가자 했더니
오늘은 그냥 참자고 한다.
혼자 올라오는 60대 산객에게
"이 더위에 왜 산에 오십니까?"
빙그레 웃으며 대답한다 "예, 후회합니다"
나한테 되물어 본다, "나는 왜 산에 왔느냐"고.
"병이지. 주말마다 도지는 깊은 병 때문이야.
"다른 이가 나에게 물으면 그때는 나도 "예, 후회합니다"
저 참나무 숲 속에 소처럼 누워
태고의 밀림에서 인간과 처음 만난 일을 되쇄김하며
맑은 눈 지긋이 감고 한 숨 푹 자고 싶다.
일주일의 노동 모두 내려놓고서...
한 때 떠들썩하게 오르내리던 저 바윗길도
요즘엔 장비가 없으면 갈 수 없는 길이 되어
인기없는 유적지처럼 적막하고 썰렁하다.
풍요롭지만 호화롭지 않고
자유롭지만 무절제하지 않는
저 구름이 한바탕 비가 되어 돌아왔으면 좋으련만...
가지 말아야 하는 길이 있고
하지 않아야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이 산에 오래 머물려면 혈압과 혈당 올리는 일만은 참아야 한다.
지나온 길을 자주 돌아보지는 말자
그 젊음의 짧음도 한탄하지 말자
그저 우리를 불러주고 추억을 담아 준 이 산을 고마워하자.
모든 인생이 5막으로 끝나지 않는다.
연출자의 계획에 따라 3막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것은 연출자의 뜻이지 배우의 몫은 아니다.
우린 주어진 배역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
자연과 한 몸이 된 삶은
누구에 의해서도, 어떤 일에도 빼앗기지 않는
스스로 행복을 얻는 힘을 익히게 된다.
계곡 상류의 물푸레산장도 오랜 가뭄에
풍경의 반이나 말라 버렸다.
물 없는 계곡이지만 그늘만은 서늘하다.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
세상의 무엇도, 그 누구도 부럽지 않다
더 이상 머리칼이 빠지지 않고 등도 더 굽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야할 때가 어디인지를 잘 알고가는,
작은 바람에도 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좁은 산길도 피하지 않고 쉼없이 걸어가고 싶다.
다음 주에는 무대에서 퇴장할 노란 원추리꽃의 한 생애나,
오랜 가뭄에 물길이 끊어진 계곡의 웅덩이나
죽어 삼 년이면 잊혀질 우리의 삶이나 무엇이 다를까?
당파싸음으로 낙향한 옛 선비들처럼
주말마다 자연 속으로 찾아가
한나절 쉬었다 오는 즐거움, 그런 발길은 늘 가볍다.
사물을 바라보는 수 많은 시각이 있겠지만
음지 쪽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는
조금이라도 더 밝게 노력하는 일은 나도 거들고 싶다.
그런 친구들과 더불어
4 시간 숲으로 떠나는 여행은
등산 이상의 기쁨이었다.
밥상이 아무리 푸짐하여도
내가 먹을 수 있는 있는 것은
내 위장의 용량만큼 뿐이다.
오늘도 내가 걸을 수 있는 만큼만 걷는다.
환갑을 넘겨도 세상을 보는 안목은 좁고
우리의 경험은 낡아 도움이 되지 않지만
지식보다 지혜가 우러나는 연륜이고 싶다.
작은 산이 있으니 큰 산이 돋보인다.
바람도 숲 속으로 스며들어 후덥지근한
구파발역으로 가는 작은 숲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