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나무, 가을을 품다
가을이 슬금슬금 찾아오는
수직의 돌담
담쟁이에게
지난 여름의 엽록소는
뜨거운 삶의 중심이었다.
새 잎 만들어 영토 넓히랴
짙은 녹음으로 내실 다지랴
참 바쁜 시절 보냈다
울타리 화살나무는
다가오는 누구의 가슴도 찌를 수 없었다
그늘 짙은 곳
햇살 부족한 곳은 애써 피하며
그저 아이의 눈으로
주변 숲을 바라보았다
활 쏘는 자세로 화살나무
어디에도 화살끝 겨누지 않고
텅 빈 공중이 아니면 눈길도 주지 않았다.
여름의 상징,엽록소가 빠져나간 뒤
목마르고 우울해진 신갈나무의
갈색 낙엽도 껴안았다
가을의 붉은 중심이 될 지언정
바람 가르는 화살은 아니었다
겨울옷 입어도 추운 사람,
피곤이 몰려오는 긴 의자
찾아 온 그늘조차 주춤하였다.
햇볕 골고루 나누지만
느끼는 온기는 모두 다르다.
도시에서는 자주 볼 수 없었던 꽃,
들판에 무리 지어 펴야 더 넉넉해 보이는 꽃
구름처럼 몰려 피어야 더 아름다운 자운영.
키 작은 화살나무처럼
내 가슴에 들어와 나를 흔들었다.
풀도 나무도 가을의 일부분.
붉은 화살촉
누구의 가슴에 감동으로 박혀
한없이 떨리게 하고팠던 소망
가을에 정조준되어
개울 속으로 날아갔다.
맑은 개울에 번지는 가을
물결따라 일렁이는 파문에
낙엽, 보석처럼 빛났다.
채 물들지 않은 벚나무 이파리에서
가을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빌딩 틈틈이 스며든 가을은
봄날의 추억이나
목말랐던 지난 여름 잊지 않을 것이다.
하늘 높은 곳에 매달려
산새들 겨울 양식 넉넉히 내주는
팥배나무가 부러웠고,
길 가다 쉽게 문 열고 들어 간
커피점의 수다보다
높은 가지에 고요하게 만찬 나누며
직박구리의 삶과 지혜 나누고 싶었다.
오월에 넘실거렸던 향기
쓰디쓴 이파리 속에 감춘 채
수수꽃다리의 처연한 가을은
지금 물관을 막고 한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가는 가지에 날개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화살나무라 불렸던 오해
이제는 풀고 싶다.
일생을 두고 옷을 벗지 않을 것 같고
평생 시들 것 같지 않은 소나무도
갈색 잎의 가을을 머금고 있었다.
큰 나무도 아니고,향기로운 꽃도 없고,
먹음직한 열매도 맺지 못했지만
남은 세월만은
칙칙하게 보낼 수는 없었다.
길이 있으면 하늘 끝까지 올라가려는 담쟁이,
이파리 떨구고 잎줄기로 열매를 홍보하는
지독한 열매 사랑이 부러웠던 화살나무,
자신이 가진 유일한 재능 감추며
가족을 위해 헌신한 날 뒤로 하고
계절마다 젖는 감성으로
이 가을엔 어떤 나무보다 붉게 타리라.
가을이 시작될 때부터
조용히 자신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높은 가지의 열매는 어렵고
벽을 타는 기술도 없기에
안으로 안으로 내공 쌓으며
평범의 가치를 깊게 새겨나갔다
몇 계절 묵묵히 걸어오며
억눌렸던 자신의 감성
이 가을엔 보상을 받고싶어
화려하게 더 화려하게
온 힘을 다해 탐닉하고 싶었다.
헛되도다, 헛되도다 되뇌이며
훌쩍 떠나지도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지도 못한
애잔하고 자잘한 일상
그래도 주어진 소중한 삶
이젠 주저없이 타오르고 말리라.
-정동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