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 길(山 능선)

건망증을 기억하는 오류

능선 정동윤 2022. 10. 4. 22:16

건망증을 기억하는 오류/정동윤

출근길 충무로 환승역의
의자에 잠시 앉아
땀에 젖은 겉옷을 벗다가
열차가 들어오는 바람에
의자에 둔 휴대폰 챙기지 못하고
부랴부랴 열차로 뛰어올랐다.
아뿔사, 내 휴대폰!
바깥 의자에 놓인 휴대폰을 보자
놀란 내 마음은
가방을 노약자석에 내려놓고
정신없이 뛰어나갔다
쏜살같이 되돌아오니
덜컹 전철의 문이 닫혔다.
휴~우,
내가 타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면?
몇 가지 경우의 수를 헤아려보니
무더운 아침의 해프닝이 아찔하였다.

숲 체험 준비를 하다가
새총의 표적물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봐도 나타나지 않아
망연자실 창 밖을 바라보는데
건너편 벚나무 가지에 어린 까치가
숲속을 향해 깍깍 울어댄다.
지난 주 금요일 오전에
다른 유치원의 아이들과 놀 때
복자기 나무에 달아둔 기억이 났다.
천천히 나무에게로 다가가니
토, 일요일을 지났으나 표적물은 묶인 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대로 있었다.
다음 꼭지로 자리를 옮기느라 깜박하고
그대로 둔 것이었다.
새로운 풍경을 만나기 시작하면
지나온 풍경을 곧잘 잊어버리듯이...

올 오월에
무더위가 처음 시작될 무렵
막사의 선풍기로
숲으로 찾아온 더위를 식혔다
퇴근길 전철역에 와서야
불현듯 문단속하고 퇴근 하면서
선풍기를 끄지 않았다는
의심의 씨앗이 정수리에 꽂혔다
그냥 가면 토, 일요일을 지나
월요일 아침까지 빈 막사에서
선풍기만 끝없이 작동하다가
과열이라도 되면?
의심의 씨앗이 고목으로 커졌다
가던 길 멈추고 되돌아오며
평소 습관으로 반드시 껐겠지만...
확인하니 역시 선풍기는 잘 자고 있었다.

유난히 더운 팔월,
동네 슈퍼에서 얼음과자를
한 보따리 구입하고
신용카드로 결제하고는
카드도 돌려받지 않은 채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왔다
잠시 뒤
슈퍼 주인이 뒤따라 나왔지만
내가 보이지 않았단다
며칠간 신용카드를 찾으며 전전긍긍,
결국 분실 신고로 마무리하였다
오늘 슈퍼에 다녀온 아내가
슈퍼 주인이 건넨 내 카드를 들고 왔다
이미 사망 선고한 카드를.
그날도 금요일이 아니었을까?

지난겨울에는
서울의 야경이 보고프다는
친구의 요청으로 남산을 돌다
남산 팔각정에 휴대폰 두고 온
사건까지 겪었다.
나중에 다시 올라가 찾았지만
그날도 아마 주말이었을 게다

하나같이 잊어버리긴 했으나
잃어버리진 않았다.
숨 가쁘게 달려온 세월 속에
오백 년을 오십 년으로 살아내면서
앞으로만 앞으로만 달렸으니
어찌 건망증 없으랴? 머리털인들
희어지고 빠지지 않으랴.

이런 일이 올 한 해
나에게 찾아온 새로운 친구였어요
난 이 친구들과 친하고 싶지 않지만
그들은 내가 좋은지 틈만 나면
찾아와 날 놀리려고 합니다.
가을 빗소리 들으며 숲 산책할 때
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어요
이젠 상호적 관계의 활동은 줄이고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주변에 폐를 끼치지 말라는
그분의 뜻이 아닌가하는 묵상이
깊어집니다.

(제가 자주 보이지 않아도
동행할 수 없는 먼 길 떠났다
여기지 마시고
여기 오는 길 깜박 잊었구나
어디 멀리 여행하고 있겠구나
생각해 주세요.
언젠가 잊어버리시겠지만
결코 잃어버리지는 않았다고
눈감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