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가을에 물들다
청주의 가을에 물들다/정동윤
계절은 어느새 입동을 알렸고
아침엔 찬 겨울의 뽀얀 입김이
마스크 속을 촉촉히 적십니다.
더 춥기 전에,
해가 더 짧아지기 전에
양재역에서, 판교역에서
신라 백제 고구려의 요충지인
청주의 가을로 찾아갔습니다.
본격적인 역사 문화 탐방에 앞서
거룩한 의식의 에너지 보충은
잘 내린 커피와 쑥떡 그리고 단감,
한 食口가 되는 나눔의 식단입니다
청주목 관아와 감영이 함께 있었던
옛 청주 읍성의 중심지 중앙 공원은
도처에 인생의 가을, 겨울로 북적이고 출렁거렸습니다
망선루와 정자, 조헌, 영규대사,
한봉수, 박춘무 등을 기리는 비와
900 년 넘은 은행나무의 의연함,
느티나무줄기에 깃든 자작나무와
또 그곳에 뿌리 내리려는 자귀나무
새싹의 생존 게임이 공생으로 끝나길 간절히 응원하면서
또 다른 느티나무에선
가지 하나만 남기고 모두 능소화에
내어준 아슬아슬함도 보았습니다
바로 곁에 용두사지 철당간을
알현하기 위하여 무심천 건너
천태종 명장사까지 다녀오는
공력을 들여야 했습니다
청주가 한 척의 배라면
이곳 철당간은 드높은 돛대랍니다
천 년을 넘겨도 녹슬지 않는 당간,
당초 30 칸 중에 20 칸만 남아
아픔의 역사는 끝내 10 칸의
행방에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일제의 수탈인지
대원군의 횡포인지
또 다른 누구의 절도인지
무심천은 알고 있을까요?
다시 청주 옛 읍성인 중앙 공원을
외곽으로 한 바퀴 돌며 성을 복원
하기 위해 민간에서 찾아낸
성돌로 지은 성벽과 두 군데의
우물 터도 관찰하고 좀 특별한
호떡 한 개씩 간식으로 맛보고
곧장 탑동 양관으로 달렸어요
탑동에 있는 청주 일신 여고는
사립 명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학을 방불케하는 캠퍼스엔
고색창연한 6 채의 양관으로
우리나라 초대 개신교의 특징인
예배당+병원+학교의 모습이
한 울타리 안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런 문화 유적을 세심히 관리하고
열심히 홍보하려는 관계자들의
호의로 철제 난로와 풍금
백두산에서 가져온 목재로 만든
서까래와 처마, 기둥 그리고 선교사의 묘지까지 볼 수 있었던
행운의 방문이 되었습니다.
상당 산성 아래에 도착해서
조금 늦은 점심으로 비빔밥과
묵밥에 막걸리 1 되에 파전과
묵무침을 시켰습니다. 꿀맛이었죠.
상당 산성은 사극 촬영지로도
알려진 4.2km에 동, 남, 서의
성문을 도는 순성 산책도
가을 산책으로 너무 좋겠지만
일정상 순성을 생략하고
조선의 갑부 민영휘 아들 천식의
묘지를 찾아보고 역사의 그림자를
밟아보았습니다.
민영휘는 조선 땅 2300 만평을 소유한 거부로 휘문고등학교
창립하였고 그 아들이 추사 김정희의 새한도를 일본의 추사
전문가 후지츠카 지카시에게
팔아 넘겼지요
이 일대의 논밭 대부분이 여흥 민씨
의 땅이라고 하며 황금빛 들판이
하얀색 참억새밭으로 변하였고
논두렁은 관광객의 산책로로...
농심이 땅을 버린 짠한 그늘은
역사의 빛과 대비되었습니다.
답답한 발걸음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사당으로 옮겨갔습니다.
고령 신씨 신숙주의 후손으로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소문났으며
황성신문 기자, 대한매일신보 주간
으로 항일 언론운동을 하며
민족 의식이 뚜렸한 역사관으로
많은 논설과 저서를 남겼으며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과
다른 노선으로 중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다 뤼순 감옥에 갇혀
10 년 형을 살다 만 56세에 뇌일혈로 순국하였습니다.
한반도 북쪽의 단군조선,부여,
고구려 중심의 유명한 역사서
'조선상고사'도 남기셨지요.
짧은 가을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갈 곳은 아직 많이 남았기에
자동차 엑셀레이터를 힘껏 밟아
삼일공원에 들러 기미독립선언서 작성 민족대표 33 인중 충주 출신
은재 신석구, 청암 권병덕, 의암
손병희, 동호 신흥식, 우당 권동진의
동상과 마주하였는데 또 한 명
청오 정춘수가 있었으나 나중에
친일 행각이 드러나 대학생들에게
동상이 끌려 내려지는 수모를 당하고
철거되었다고 합니다.
배터리가 닳은 핸드폰처럼 조금씩
어둠이 찾아왔지만 김수현 드라마
아트홀과 영화 촬영지, 카페거리로
한 바퀴 돌고 소나무 아래서
남은 감과 고구마, 차를 비우고 서울로 향하였습니다.
덕평 휴게소에서 라면과 회비 정리
그리고 강 교수님과 작별 인사를
하고 양재역에서 헤어졌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