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시(詩 능선)

허공에 뿌리를 내리는 나무/김혜순

능선 정동윤 2011. 8. 29. 16:19

허공에 뿌리를 내리는 나무/김혜순

 

 

물구나무 기록 보유자가 그것도 자랑이라고

두 손으로 계단을 짚으며 내려간다

계단 옆에는 동백나무들이

일생을 물구나무 선 채

멀뚱이 쳐다본다

 

동백나무는 물구나무 서서

아직도 언 땅 속을 손톱으로 후벼 판다

후벼파다 말고 그 속에서

밥 알갱이를 주었는가

얼른 입 속으로 가져간다

 

이파리의 기억은 뿌리에 있다

우리 내장의 기억이 입술 밖

저 푸른 하늘에 있듯이

 

꽃들 속에 벌레라도 숨어 들었는가

꽃봉오리 속마다 소란하다

질식할 것 같은 땅 속에 입술을 부비고

넓디 넓은 허공을 향해

 

저리도 얇은 태반을 내다 걸어

새끼를 매다는 저 꽃나무

밤이 오면 누가 새끼라도 건드릴세라 전전긍긍

한쪽 눈마다 충혈된 고양이떼 같다

 

일진광풍이 멈추자

알뿌리처럼 웅크린 뇌를 허공에 두고

하루종일 허공에 입질을 하다

여수 오동도까지 내려온 가련한 한 인생이

동백나무에 기대어 섰다

거꾸러 서서 비틀거리는 나무의 몸통에

알뿌리를 기대고 서서

해 지는 쪽으로 내려 간

물구나무 기록보유자를 아직도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