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시(詩 능선)

나팔꽃 씨/정병근

능선 정동윤 2011. 9. 2. 16:13

나팔꽃 씨/정병근

 

 

녹슨 쇠울타리에

말라죽은 나팔꽃 줄기는

죽는 순간까지 필사적으로 기어간

나팔꽃의 길이다

줄기에 조롱조롱 달린 씨방을 손톱으로 누르자

깍지를 탈탈 털고

네 알씩 여섯 알씩 까만 씨들이 튀어나온다

손바닥 안의 팔만대장경

무광택의 암흑 물질이

손금을 빨아들이고 있다

마음에 새기는 것은 얼마나 힘드는 일이냐

살아서 기어오르라는

단 하나의 말씀으로 뻑뻑한

환약 같은 나팔꽃 씨

입 속에 털어넣고 물을 마셨다

오늘 밤, 온몸에 나팔꽃 문신이 번져

나는 한 철 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