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들

사이버 시대 시의 유령적 초상과 창조적 고민의 소멸 / 신범순

능선 정동윤 2011. 9. 20. 16:35

*한국현대문학회에서 퍼왔습니다. '한국현대문학연구 제8집'에 수록
논문입니다.
-----------------------------------

<사이버 시대 시의 유령적 초상과 창조적 고민의 소멸>


신범순(서울대학교 교수)

<차례>

1. 속도의 글쓰기와 글쓰기의 피로
2. 사이버적인 글쓰기의 특징
3. 해체적인 시와 유령적인 시
4. 하이퍼텍스트 시의 실패와 사이버 로봇 시인의 가능성
5. 사이버매체의 충격과 시의 변모

---- 내용 시작, *( )은 출처표시, 네모는 책 표시 ------

1. 속도의 글쓰기와 글쓰기의 피로


현대문화의 특징인 젊음의 문화는 근대 도시 문명의 소산이다. 르페브르는 모더니즘을 젊은이들의 영속적인 문화라고 생각했다. 무한히 변화하며 화살처럼 날아가는 시간 속에서 그 변화무쌍한 삶을 즐기는 것, 그리고 넘쳐나는 다양성을 즐기는 것, 그리고 결국에는 그러한 변화무쌍함 속에서 스스로를 잃고 가볍게 사라져 가며 젊음의 매혹적인 환상으로만 영속하는 것이 그러한 현대문화의 특징인 것이다. 계속해서 새롭고 다양한 욕망을 발굴해 내는 것이야말로 이러한 문화를 지속시키는 원동력의 하나이다. 그러한 속도감 속에서 젊은 존재들은 순간적으로 반짝거리는 조명들이나 허공의 물방울처럼 순간적인 환영적 존재들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에 익숙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속도감 속에서 질리고 지쳐 버리며, 점차 확실한 실재감을 상실하는 느낌들이 오늘날 문학의 한 주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한 젊음의 문화 속에서 느끼게 된 속도와 피로에 대해 식민지 시대의 젊은 李箱은 팽팽한 긴장감이나 아니면 느슨한 유희적 기분 속에서 사물과 언어 그리고 상상의 복잡한 계산과 놀이를 시적인 틀 속에서 보여준 적이 있다. 그의 다소 환상적인 몽롱한 분위기의 ‘거울’은 현대 문명에 깊이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열정이 식어 버린 자의 그 ‘피로’를 보여준다. <시 제15호>의 ‘거울’은 그 복잡한 현대의 뒤엉킴 속에서 불길한 ‘음모’를 본다. 그에 대항할만한 의지를 포기한 자의 피로가 이 세계를 石化시키는데, 그의 숱한 시들에서 보이는 ‘생명체의 인공화’ 모티프가 이 시에서 그 싹을 보인다. 통제되지 않는 거울 속의 존재는 이 현대적인 문명의 모든 대상들과 더불어 점차 나로부터 떠나고 마치 기계적인 존재처럼 인공화된다. <시 제11호>에 나오는 신체는 인공적인 부속물들이 엉성하게 합쳐서 만들어진 인형처럼 보인다. 어두운 밤 속에서 “제웅처럼 자꾸만 減해간다”(<가정>)는 주제는 그에게 다가오는 가련한 연인인 광녀나 ‘작난감 新婦’ 같은 여인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것이다. 그의 놀이는 진정한 생명의 활기가 사라져가는 이 석화된 세계의 단편들을 가지고 점차 수동적으로 폐쇄되어 가는 작은 놀이 공간 속에서 놀이의 활력을 시험하는 것일 뿐이다. 그에게 그것은 “囚人이 만들은 소정원”으로 상징된다. 그가 자신의 지식이나 사유 그리고 언어들을 가지고 복잡하게 이리저리 배열하고 짜맞추며 뒤집고 뒤트는 것들은 일종의 놀이의 기하학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것은 엄격한 이성의 통제와 세상의 구조와 의미를 정복하며 새로운 지평선을 넓혀가려는 건강한 기하학은 아니다. 이미 피로한 자로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를 포기한 자로서, 유폐된 채 스스로를 해체해가며 이상한 신경증적 무질서와 사유의 오만한 계산들을 뒤섞고, 생명의 즙들을 증발시키는 삭막하게 무미건조한 인공물들을 조립함으로써 ‘최저낙원’을 건설하려는 것이 그의 문학적 실천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피로가 요즈음의 시인들에서는 일반적인 것이 된다. 어느 젊은 시인은 ‘먼지의 세월’을 살면서 텔레비젼과 신문과 침대의 먼지 속에서 먼지의 죽음을 만진다(남진우, <먼지 속의 속삭임>, ꡔ타오르는 책ꡕ).
시간의 너무나 빠른 흐름 속에서 늙어감을 감지하는 피로는 한 여성 시인에게 한 박자 늙는다는 표현을 쓰게 만든다. “어제가 아닌 오늘 나는 또 한 번 흘렀다/ 다만 나는 강물이 아닌 육체여서 또 한 번 흐른 내 육체는 어제보다 한 박자 늙어 있는 것이다”(이선영, <어제가 아닌 오늘>, ꡔ평범에 바치다ꡕ). 싱싱한 창조적 생명력의 열기가 사라진 시대의 분위기는 ‘황무지’라는 말을 이 시대를 표현하는 말로 다시 등장시키기도 한다. 마음의 창이었던 눈에서 진실을 읽지 못하는 시대를 “눈은 마음의 창이 아니라 마음의 그림자이다/ 철저히 모욕당한 영혼의 흔적”이라고 하는 시인은 이 시대를 통찰력을 잃어버린 황무지의 시대라고 정의한다(김상미, <잃어버린 눈>, ꡔ검은 소나기 떼ꡕ).
이러한 통찰력의 상실은 위 시인의 시에서처럼 이 시대의 깊이없는 문화를 만들어낸다. 아니 그 반대로 깊이없는 문화의 전면화, 일상화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마음과 영혼의 깊이가 없는 육체, 그 육체의 느슨한 무의식과 일상적 의식의 기묘한 결합에 의해서 글쓰기 역시 깊이를 거부한 채, 긴장된 탐구와 팽팽한 논리나 열정도 없이 복제되고 쉽게 어디에서나 인용되는 언어들의 조합이 ‘시’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 시대 시의 피로와, 바닥의 가벼운 흥분들을 가지고 시로 만드는 행위를 보게 된다. 이승훈의 <난 글쓰는 사람>은 이미 오래 전에 그 피로를 시작했던 이상으로부터 이어받은 한 줄기 현대적 주제가 이 시대에 와서 어떻게 그 종말을 겪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난 글쓰는 사람
불행이여 우린 실컨 싸웠다
난 위대한 작가가 아니야
난 위대한 시인도 아니야
난 글쓰는 사람
난 글을 사랑하는 사람
난 언어를 사랑하는 사람
언어여 우린 실컨 싸웠다
이제부턴 휴식이다
(중략)
나의 병은 글쓰기 나의 병은
나의 건강 오늘도 글을 쓰고 지치고
언어여 당신에게 전화를 했지
내가 쓰는 글은
나의 애인, 나의 정부, 나의 천국
나의 지옥, 나의 숨결, 나의 가슴
나의 가슴의 흉터, 나의 섹스
서지 않는 섹스 오 내 사랑,
나의 항구, 나의 결핍, 나의 몸
이유는 없다
난 그냥 글쓰는 사람
(하략)
- 이승훈, <난 글쓰는 사람> 부분

이제 한 가지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진실이나 진리와 연결시키지 않는 이러한 진술을 더 이상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언어의 기표에서 모든 철학적 성찰이나 판단 그리고 진지한 토론의 가능성을 포기하며 피로 속에 가라앉는 이러한 시에서 시인의 포스트모던한 세계관을 읽는 것은 비평가들의 임무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시인 속에 있는 그러한 비평가의 고상한 목소리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복잡한 문제를 떠나서 이 시는 무한하게 확장되어가는 정보의 물결 속에서 오늘날 언어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가 하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노혜경의 <포스트모던 실종1>에서 ‘잃어버린 편지’는 반대로 기표의 위력을 시위하는 현대의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시인은 그 위력과 맞서는 한판 게임에 들어서 있다.
우리가 위에서 소개한 이러한 문학현상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생명력 있는 대상들의 붕괴현상이다. 대상의 실제적인 무게가 점차 삭제되어가는 언어의 기표들이 주인공이었던 시대만 해도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오늘날 시인들은 회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무게가 나가는 언어들을 가지고 시인들은 그것을 무기처럼 휘두르며 세상을 휘젓고, 또는 그 언어들의 차이들을 점검하고 그 법칙을 탐구하면서 이 세상의 진면목을 파악하려는 야망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출발점에서부터 이상이 그랬던 것처럼 시적인 언어는 현실의 광범한 세계로부터 후퇴하여 작은 공간 속에 유폐된 채 ‘세계에 대한 기억’ 대신에 의식과 무의식의 자유로운 환영으로 나아갈 조짐을 보였던 것이 아니었던가? 우리의 경험들을 소화하여 하나의 견고한 구조로 묶어내던 ‘이야기’와 ‘상징’ 그리고 우주적 신화에 대해 머뭇거리고 비웃으며 거부하는 언어들이 우리 시대에 남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정보가 빛의 속도로 광활한 공간을 여행하는 오늘날 그러한 언어들은 사이버적인 존재와 결합되어 점점 더 빠른 존재, 우리의 육체를 벗어나서 새로운 환영적 존재 속에서 둥우리를 트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2. 사이버적인 글쓰기의 특징

기표들의 빛처럼 빠른 속도 속에서 무한한 정보의 바다를 접하게 된 이 사이버 시대에 과연 시문학은 어떻게 존재하며, 또 어떤 의의를 갖는 것인가? 이러한 사이버적 공간은 시적 창조에 어떠한 신세계를 펼쳐주는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윌터 옹은 전자기술에 의한 컴퓨터 글쓰기가 옛날의 구술적인 문화를 새롭게 부활시키는 측면이 있다고 보았다.
(윌터 옹, ꡔ구술문화와 문자문화ꡕ, 문예출판사, 1995, 205면 참조)
그러나 그러한 구술문화적인 것의 부활이 책과 글쓰기, 인쇄의 속성이 가지고 있던 비인간성과 ‘죽음’을 극복하고 과거 구술문화의 활력과 따뜻한 인간성을 회복한 것인가에 대해서 물어보아야 한다. 컴퓨터는 글쓰기를 속도의 흐름 속에서 뒤흔들면서 글쓰기의 완강함과 고집스러운 지속성을 붕괴시킨다는 면에서는 옛날의 구술적 활력을 되찾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쌍방향적인 대화를 닮아있기는 해도 여전히 ‘말의 활력’과 기억의 내면성을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폐쇄회로적인 답답함과 얄팍한 외면성 그리고 익명적인 평면주의라는 부정적인 모습을 떨쳐내지 못한다. 이러한 부정적 측면은 ‘기억의 내면성’을 기계적인 장치로 전환시킴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컴퓨터의 기억장치는 기계적이며 어떠한 사유로도 자료들을 반죽하지 못한다. 릴케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알게 된 세계에 대한 지식과 체험들을 하나의 무형적인 전체성으로 변형시키는 기억과 망각의 미묘한 변증법을 그것은 만들어내지 못한다. 유기체적 생명이야말로 기억된 것들을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 연결시키고, 본래의 형태로부터 벗어나 새롭게 변형되고 숙성된 어떤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 새로운 의미를 빚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옹에 의하면 플라톤이야말로 이러한 인간적인 ‘기억’을 쓰기와 대립시킨 첫 번째 철학자이다. 물론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견해를 대신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쓰기는 비인간적이고 또 쓰기는 하나의 사물이며 만들어낸 제품”이며 “기억을 파괴한다”. 쓰기에 의해 내적인 수단인 기억은 역할을 멈추고 외적인 수단에만 의존함으로써 인간은 ‘망각’ 속에 빠져든다. 그것은 정신의 약화를 가져온다.
(옹, 위의 책, 125면 참조)

사이버적인 대화적 글쓰기가 여전히 이 어두운 ‘망각’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 대화는 오랜 기억과 창조적인 사유와 상상 그리고 휴식의 시간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 대화는 서두르는 시간 속에서 어떠한 기다림도 없는 성급한 만남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사이버적 대화는 인쇄적인 글쓰기에서보다 더 심각한 비인간화를 촉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육체에 의해 미묘하게 작동되던 언어의 ‘기억과 망각의 변증법’이 점차 역할을 잃어버리게 된다. 육체의 여행과 체험 그리고 육체의 민감한 표면들에 각인되던 것들이, 언어의 대화적 지평 속에서 작동하던 의미론적 파동들이 이 짧은 그리고 단속적인 기계적 시간 속에서 마멸되고 깊이와 두께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한 모든 복잡함들을 사이버적인 글쓰기와 대화는 몰아낸다. 그렇다고 해서 사이버적인 글쓰기가 인쇄문화적인 글쓰기보다 나쁘게 평가되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몇몇 선구적인 비평가들에게는 근대적인 인간의 글쓰기가 갖는 권력과 그에 의한 통제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글쓰기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데리다와 푸꼬, 보드리야르 같은 사람들이 그러한 생각을 보여준 대표적인 경우이다.
종이 책과 線形的인 글쓰기가 끝나고 있음을 데리다는 ꡔ문자학에 대하여ꡕ에서 말했다. 데리다는 언어와 세계의 조직화가 글쓰기의 선조적인 시간성과 맞물려 있음을 간파했다. 그에게 문제되는 것은 ‘상징의 선조성’을 어떻게 파괴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근대적인 역사관에 바탕이 되는 선조적인 시간은 근대적인 이성적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과거의 신화가 상징들을 다차원적인 의미로 해석하며, 연속적이고 논리적인 역사적 시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대의 역사적 체험이나 사유들을 조응시킨다는 점을 데리다는 상기시킨다. 마렝에 의하면 신화적인 이야기는 시간을 앞서는 시간, 근원적인 시간에 대해 언급한다. 그것은 제의적인 것으로서 역사 이전의 역사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Louis Marin, The Utopic Stage, Mimesis, Masochism, and Mime, The Uni. of Michigan Press, 1997, p.115)
데리다는 그러한 신화적인 것의 창조적 다양성을 억압한 근대적 선조성에 대해 전쟁을 선언하고 파괴적이고 해체적인 글쓰기를 시작하였다.
(Jacques Derrida, Of Grammatatology, The Johns Hospkins Univ. Press, 1977, pp.84~86)
나중에 마크 포스터는 이러한 데리다의 작업을 ‘형이상학적 주체의 틀을 해체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포스터에 의하면 전자적인 글쓰기는 데카르트적인 주체, 칸트적이고 헤겔적인 주체 등의 근대적인 주체들을 분산시키고 해체한다는 것이다.
(마크 포스터, ꡔ뉴미디어의 철학ꡕ, 민음사, 1994, 188면)
데리다의 주장을 포스터는 사이버적인 시대에 대한 데리다의 예언이라고 생각한다. 컴퓨터에 의해서 텍스트는 탈인간화되고 개인성의 흔적들은 제거되며, 글자표시들은 탈개인화된다.
(위의 책, 214면)

이러한 데리다의 생각은 근대적인 형이상학이 계속해서 인간의 본질을 이성적 동물로 규정했던 것을 무너뜨린다. 데리다가 하이데거론에서 대비시켰던 정신으로서의 이성과 육체로서의 동물성 중에서
(Jacques Derrida, Of Spirit, The Univ. of Chicago Press, 1989, p.73)
그는 글쓰기 속에 스며있는 이성적 정신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ꡔ글쓰기와 차이ꡕ에서 비록 프로이트적인 ‘글쓰기의 장면’을 상세히 분석하고 있지만 그것은 역시 문자 속에 스며있는 흔적과 차이의 미묘한 움직임과 극적인 드라마들에 대한 분석이다. 아르또의 잔혹극적인 언어들에 솟구치는 육체적 광기의 드라마들 역시 그러한 글쓰기의 드라마 속에서만 논의된다. 사실 아무리 이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육체적인 것의 흔들림이 개입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텍스트’의 범주 밖으로 나가지는 않는다.
데리다의 이러한 논의 방향이 사이버적인 환영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진입한다는 것은 당연해보인다. 글쓰기와 기억 사이에 있는 공간에서 그 양쪽을 모두 혼란스럽게 만들며 서성이는 유령
(Julian Wolfreys, Deconstruction Derrida, Macmillan Press, 1998, p.139)
이야말로 사이버적인 글쓰기에 와서 전면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유령처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무시하고 전세계적인 규모로 갑작스럽게 출현하는 환각과 정보, 글쓰기들이 오늘날 일반적인 양식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오늘날 세계는 유령이 출몰하는 챨스 디킨즈의 도시처럼 된 것이다.


3. 해체적인 시와 유령적인 시

세계가 순식간에 뒤바뀌는 컴퓨터의 가상세계 속에서 순간적으로 변화되는 삶 속에 불안하게 접속되는 존재들에 대해 시인들은 시를 쓴다. 컴퓨터 속에서 보고 느끼고 주문하며 대화하는 것들은 모두 유령적이다. 이원의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ꡔ현대시ꡕ, 2000.12, 98면)는 그러한 사이버적인 특징을 시로서 서술한다. 둔중하고 확고하며 실체감이 있어야 될 것들이 여기서는 전부 금방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환영으로만 존재한다. 데리다를 좋아하는 이승훈 역시 그러한 생각을 시로 써놓고 있는데 <나의 한 조각에 대해>가 바로 그것이다. “유령선생이신 이승훈 씨가 오늘은 집에서 쉬고---오랜 사고의 광란 속에서 오늘도 쉰다”. 이런 구절들이 사이버적인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은 ‘사고의 광란’이라는 심각함을 가볍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는 심각한 시인인 남진우 역시 그러한 유령적 분위기를 <겨울 저녁의 방문객>에서 보여준다.

그대는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일까
사막의 신기루 속에 떠오르는 거대한
모래사나이의 모습을 혹은 북극의 오로라를 등지고
이리로 걸어오고 있는 한 남자의 그림자를
(중략)
어쩌면 그는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다만 내가 지어낸
나와 그대 사이 건너갈 수 없는 시간의 저편에서
우리의 모습을 엿보고 우리의 말을 엿듣는
그는 어쩌면 환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남진우, <겨울 저녁의 방문객> 부분)

오늘날 시인은 마치 유령같은 어떤 존재들과 사귀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과 접촉하고 대화하며, 자신의 기다림을 채우고 정신의 여행을 하며, 모든 시간을 끌어모으는지도 모른다. 데리다적인 해체의 세계는 유령의 세계로 이렇게 해서 진입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세계가 크게 다른 것은 아니며 후자가 전자를 극복한 것도 아니다. 그 둘 모두 들뢰즈가 세계-알(world-egg), 또는 우주적 태아(cosmic embryo)라고 했던 ‘기관없는 육체’의 강렬한 열정적 감수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Ronald Bogue, Deleuze and Guattari, Routledge, 1989, p.95)
해체의 문제는 ‘문자’적 글쓰기 안에서만 논의된 기표의 놀이인 것이다. 유령적인 것 역시 기호의 과잉생산으로 인한 기호의 무의미, 무차별화의 진행 속에서 더욱 선명한 현상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 문단에서 해체주의 시에 대한 논의는 십수년 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해체적 담론들은 당시에 오늘날 같이 인테넷이 왕성하게 발전된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컴퓨터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이 일상의 큰 부분을 지배하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사이의 일이다. ‘종이책의 위기’는 아직까지는 예언적인 말이지만 이러한 인터넷의 발전을 염두에 두었을 때 그 시기가 얼마남지 않았다는 느낌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한 위기감이라는 것이 문학적 글쓰기 전체에 압박해오는 것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많은 문인들이 느끼고 있다. 시인들은 이제는 과거 어느 때보다 잡담같은 수다스러움으로 시를 메꾸고, 길거리에 굴러 다니는 언어처럼 닳고 닳은 그리고 별로 진지하지 않은 언어들을 시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해체’라는 말로 심각하게 무엇을 파괴하거나 비판하려는 열정이나 몸짓도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거꾸로 점차 그 중요성이 적어지는 고전적인 시의 작업 장소인 종이와 연필, 글자에 대한 고고학적 집착이 생겨나기도 한다. 신성함이 사라진 그 장소에서 쓸쓸한 애정의 기묘한 심리학을 펼치기 위해서 말이다.
오늘날 이 땅에는 이제 진정한 떠돌이 시인이 없다. 미당이 떠돌이 창녀시인 황진이를 통해서 추적하던 시인의 초상은 사라져간다. 백석의 유랑이나 정지용의 여행, 그리고 오장환의 방랑은 적어도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자 타락한 세계의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이었다. 함북 경성과 서울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그 틈 속에서 찢겨있던 김기림은 보들레르의 여행을 찬양했다. 그는 그 여행을 통해서 자기존재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서울거리를 배회하는 삶의 형식 속에 세계에 대한 광활한 여행의 형식을 겹쳐놓을 수 있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한 시인에게 다가온 문제 즉 “한 시대와 사회의 流動相의 복판에서 자기의 위치를 의식”
(김기림, 「신춘의 조선시단」, ꡔ조선일보ꡕ, 1935.1.3)하는 것이었던 셈이다.
김기림이 이러한 시인을 근대적인 수난자라고 불렀다는 사실, 그리고 근대 초기에 어떤 시인이 이러한 시인들의 길을 낭만적인 어조로 “피투성이 순례의 길”이라고 멋지게 표현했다는 것이 이제는 조금 멋적어 보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젊은 시인들 몇사람이 요 몇 년 사이에 요절했지만 그렇게 큰 뉴스거리가 되지 못하는 시대에 우리는 있다. 그러한 죽음들은 문단의 한 그룹에서 조용한 애도의 분위기를 넘어서지 않고 그저 평범한 한 개인의 죽음처럼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 매체 속에서 그러한 현실들은 너무 작은 부분에 속할 뿐이다. 신문이나 방송 그리고 컴퓨터 속에서 폭발하는 스펙터클, 해프닝, 수다한 잡담 등에 시인의 죽음은 파묻힌다. 정보의 엄청난 홍수가 무서운 속도로 흘러가는 시대에 어떠한 문자도 이제 삶의 깊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너무나 오랜 시간을 끄는 사색도 몽상도 이 정보의 속도에 휩쓸려나가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오늘날 시인들은 자신들이 쓰는 말들이 새롭게 처한 운명에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어떤 경우에는 새로운 멋진 신세계로 보이는 반면 어떤 경우에는 그러한 것에 대한 극도의 혐오나 비판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오늘날 진정한 시인들은 이러한 환경에 저항한다. 이미 맥루한도 논의거리로 삼았던 현대매체의 ‘자극적(hot)’인 성격은 언어의 진지함을 쓸데없는 재치놀음으로 대체하는 데 공헌했다.
(조너던 밀러, ꡔ맥루한ꡕ, 탐구신서, 1981, 157~158면 참조)
그러한 언어들은 들뢰즈적인 개념인 세계-알로서의 육체가 갖는 강렬도가 없다. 그리고 릴케처럼 체험을 오래도록 반죽하는 창조적인 내면성의 깊이도 간직하지 못한다. 릴케적인 체험은 시인으로 하여금 이 세상을 떠돌면서 자신의 육체를 활짝 그 밑바닥까지 열어놓도록 만드는 것이다. 일찍이 미당은 떠돌이들의 인생과 예술가의 인생을 겹쳐놓고 그것을 주제로 시를 썼으며, 그리고 그러한 체험들 가운데 녹아 있는 영원의 시간을 관조했었다. 그 시간은 마치 <李朝辰砂>(ꡔ떠돌이의 시ꡕ 중에서)의 도자기처럼 생의 가장 강렬한 ‘심장의 붉은 물감’이 되어 이 세상의 무수한 시간 속에서 되풀이되는 수많은 삶들을 윤회하면서 영원회귀하게 된다. 미당의 <沈香>(ꡔ질마재신화ꡕ 중에서)은 그 영원한 시간의 깊이 속에 자신들의 삶을 참여시키는 그러한 삶의 양식을 노래한 것이다. 질마재 마을의 설화적인 이야기들은 모두 그러한 삶에 참여한다. 그의 시들은 구술적인 대화체의 그 끈끈한 삶의 결을 놓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들은 무서운 속도로 날라 다니는 정보의 수집과 전달기관들에 둘러싸여 산다. 오래도록 구워내는 하나의 도자기같은 삶은 질마재 마을의 삶처럼 구닥다리같은 것이 되었다. 이제 이 현대도시는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소문의 여신인 파마가 사는 집들로 이루어진다. 파마의 집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땅과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이 세상의 한 가운데에 있으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내려다보이고, 이 세상의 모든 소리가 들리는 곳이다. 그곳의 산꼭대기에 소문의 여신인 파마가 산다. 그녀의 집은 밤낮으로 열려 있다. 수천 개의 문이 항상 열려 있으며, 집의 재료는 소리를 잘 울릴 수 있도록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 집 안은 오고가는 말로 항상 시끄러워서 침묵과 고요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집의 주인들은 이렇게도 들리고 저렇게도 들리는 갖가지 소문, 참말 같기도 하고 거짓말 같기도 한 갖가지 소문을 모아들인다. 이 집에는 ‘경거망동’, 생각이 깊지 못한 ‘실수연발’, 터무니 없는 ‘기쁨’, 소심한 ‘공포’, 당돌한 ‘선동’,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는 ‘속삭임’이 식객으로 붙어산다.
(오비디우스, ꡔ변신이야기2ꡕ, 이윤기 역, 민음사, 1998, 152면)

오늘날 이 파마의 여신이 사는 집은 현대도시에서 현실화되었다. 신문과 텔레비젼 그리고 컴퓨터 망으로 이어진 대중매체의 거대한 그물은 이 도시 전체를 하나의 ‘소문의 집’으로 만들어버렸다. 모든 소문들의 시끄러운 말들로 가득한 이 공간에서 현대인들은 태어나고 죽는다. ‘청동의 거실’이라고 오비디우스가 표현한 그 공간은 항상 웅성거리는 소리로 울려대는데, 오비디우스는 그러한 소음들이 귀얇은 사람들로부터 모아진 소문들의 거대한 합성음임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소문에 의해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잡고 미래를 설계하며 타인들의 욕망을 숨쉬며 산다.
노혜경은 그러한 소문의 집으로서의 현대를 특징짓는 오늘날의 가상존재를 하나 만들어낸다. <멀티미디어 베이비 자장가1>에서 그녀는 그 얇은 껍질 같은 현대의 삶을 환상적인 희극으로 그려보인다. 소문의 허영적인 포장들로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극적인 모습들이 죽을 때까지 늙지 않고 아기로 남아있는 ‘날개달린 아기’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나오는 텔레비젼 기자는 “모든 심오한 진리는 전파 속에 있거든­그 가운데서도 가장 심오한 것은 전파는 임신시키기도 한다는 사실이야”하고 말한다. 다소 해설적인 면이 있다고 해도 현대적인 삶의 한 본질을 극화시킨 이 시는 오늘날 소문의 집에 사로잡힌 사람들 속에서 시인의 언어가 어떤 식으로 맞서 있는지 보여준다. 그것은 소문의 유령적인 성격을 간파하고 그것에 홀려서 일생을 허망하게 탕진하는 삶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김상미는 이러한 소문의 유령을 단순화시켜 “타인들의 시선이 둘러싸고 있는/ 포장꾸러미”인 ‘캄캄한 밤’으로 표현한다. 그 어둠은 타인들의 ‘넋두리’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녀는 “넋두리는 포장지와 같다/ 포장지를 뜯어보지 않고선/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넋두리>, ꡔ검은 소나기떼ꡕ 중에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벤야민이나 엔젠스베르거 등이 매체의 발전이 가져올 대중적 해방이라는 긍정적인 가치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생각하고 기대하는 움직임들이 상당히 거센 조류로 움직이고 있다. 어떤 경우는 그러한 매체를 주도하는 기관들이나 회사들의 거대한 지원 속에 있는 비평과 창작적 활동이 있으며, 그 밖에서 개인적으로 새롭게 다가오는 사이버적인 환경에 대해 매혹되며 그 환상적인 새로운 낙원에 대한 꿈으로 흥분하는 예술가들도 있다. 이러한 움직임들에 의해 새로운 예술들이 탄생하는 것은 기대해볼만한 일이다. 인쇄문화가 처음 시작될 때에도 그에 대해서 비판하고 회의하며, 창조적인 것의 사망을 점쳤던 수많은 논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새로운 글쓰기의 발전을 통해서 근대적인 문학의 거대한 봉우리들을 만들어냈었던 것이다. 사이버 매체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4. 하이퍼텍스트 시의 실패와 사이버 로봇 시인의 가능성

컴퓨터의 새로운 정보축적 기술과 현실 이상의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가상 시뮬레이션에 도취된 많은 사람들은 사이버 유토피아를 꿈꾸며 그 세계를 건설하는 일원이 된다. 백여명 이상의 시인들이 문예진흥원 새로운 예술의 해 사업의 일환인 ‘언어의 새벽’이라는 하이퍼텍스트 작업에 매달렸는데 거기서 시인들은 문자의 주도적 지위 하락을 인정하면서 다른 매체들 즉 동영상, 음향 등에 매달리는 실험을 하였다. 이 실험의 의도에 대해 설명한 한 부분을 읽어보면 이렇다.

이 실험의 기본적인 의도는 동영상 음향을 주된 매질로 하고 감각적 반응 시간을 최대한도로 단축하는 하이퍼텍스트를 순수한 문자언어로만 구성하여 감각적 반응시간을 가능한 한 지연시키고 그 사이에 사유와 상상이 개입될 여백을 열어놓음으로써, 문자 언어 특히 문학의 고유한 본성인 반성적 활동을 하이퍼텍스트에 심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www.spritandeye.com의 <언어의 새벽­하이퍼텍스트와 문학>에서 <언어의 새벽이란?>의 일부)


이 작업은 김수영의 <풀>을 기본 텍스트로 하고 있다. 최초의 씨앗글인 이 시의 한 부분(한 단어나 한 구절)을 클릭하면 이어서 새로운 시를 접목시킬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제한적 규정이 있다. 즉 적어도 김수영의 시 <풀>의 중심단어인 ‘풀’이나 ‘눕는다’ 등 몇가지를 반드시 몇군데 집어넣어야 한다. 글의 분량은 400자 이내로 제한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시는 또 하나의 씨앗글이 되는데 이 글에 접속한 사람은 새로운 시를 거기 덧붙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언어의 숲’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 작업은 문학과 멀티미디어의 만남을 통해 문학의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작업의 결과는 참담한 모습을 드러낸다. 소위 집단창작의 한 유형이 거대한, 시작도 끝도 통일성도 없는 텍스트를 통해 드러났다. 글쓰는 시인들은 이름을 남겼지만 누구라도 좋을 정도로 익명의 상태가 되었다. 해체주의 이후 비판의 초점이었던 부르조아적 개인의 글쓰기 주체는 이렇게 해서 사라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익명의 거대한 사이버텍스트가 단순한 퍼즐식 언어 게임 수준 이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시인들이 가지를 치는 시들은 단지 몇가지 단어들의 공유라는 연관성만으로 엮인 채 각각 고립된 섬으로 흩어져 있다. 그 각각의 시들은 김수영의 시 <풀>을 이리저리 잘라내고 다른 구절들을 적절히 이어붙인 모자이크적 텍스트들이다.
이러한 작업은 80년대 중반에 프랑스에서 료타르가 벌였던 실험에서 힌트를 얻은 것 같다. 료타르는 <非實物>이라는 제목의 전시회에서 집단적인 컴퓨터 글쓰기를 실험했는데, 이것은 작가 26명에게 전시회가 선별한 50개의 단어들을 컴퓨터를 이용해 정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의는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었고 다른 작가들이 이 데이터베이스의 텍스트에 자신의 논평을 덧붙였다. 료타르는 여기서 언어들이 합의를 지향하기보다 분쟁(differend)을 지향한다는 것을 예측했다.
(마크 포스터, 앞의 책, 216면 참조)

주체의 분산이 이 실험의 주제이다. <언어의 새벽> 역시 하나의 완결된 작품을 만들기보다는 서로 상이하게 흩어지는 분산적 텍스트, 어떠한 중심도 시작도 결말도 없는 텍스트를 지향한다. 그러나 그것 뿐이다. 이 문학의 숲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문학의 형편없는 가난함과 무기력일 뿐이다. 타매체와의 결합 속에서 언어문자는 가장 재주없는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영상들의 하이퍼리얼한 발전과 가상적 시뮬레이션들의 역동적인 드라마와 비교해볼 때 선명히 드러난다. 마치 어떤 바보들이 문학이 성취했던 사유와 상상, 기법이나 문체 등을 다 팽개치고 가장 빈곤한 수준에서 이리저리 헤매는 것을 두고 새로운 경지라고 착각하는 것과도 같은 꼴이다. 주체의 분산이 이러한 헤매임을 두고 말한다면 얼마나 한심한 일이란 말인가?
주최측은 이 실험을 두고 ‘시민민주주의적 실험’이라고 했으니 ‘주체의 분산’에 대해 우리가 논의한 것 자체를 부정하는 꼴이 되었다. 시민이란 근대적 주체의 확립과 관련되는 것이므로 근대적 주체를 비판하려는 마당에 오히려 그곳으로 되돌아간 꼴이 된 것이다. 김수영의 시민성, 4.19의 시민혁명이 이 실험의 사상적 기반으로 제시되어 있다.
아마도 이 실험이 진정 새로운 사이버문학의 수준높은 가능성을 지향하려 했다면 이러한 사상적 혼란부터 극복한 자리에서 출발했어야 할 것이다. 언어퍼즐 게임에 오락적으로 참여하는 대중을 끌어들이는 것이 문학의 민주주의라고 착각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순진한 일인가. 집단의 참여는 그 양으로 측정되어야 할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의 참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간에 어떤 관계가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심심풀이 낙서장 수준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적어도 논쟁적인 주제가 던져졌어야 했다. 김수영이 시를 쓴 관점과 맞서서 그에 대해 논쟁적으로 된 다른 사상이나 상상력에 의해 <풀>을 해체하고 다시쓰는 텍스트들이 그로부터 출몰할 것이다. 적어도 그러한 것들은 그저 약간의 오락적 흥미에 머물러 인터넷을 들락거리는 태도를 지양하게 될 것이다.
대중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그러한 골치아픈 논쟁거리들을 집어치워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중을 우롱하는 태도이다. 오락게임의 치밀한 전략들에 대해 끈질기게 접근하는 대중들은 누구인가? 스타크래프트의 복잡성은 문학의 대중성에서는 걸림돌이 되는 것인가? 대중성을 위해 문학의(여기서는 시 장르의) 고도한 기술과 언어의 전략들을 포기한다는 것은 여전히 대중에 대해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자만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 <언어의 새벽>이 보여준 실험은 우리에게 사이버 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사이버로봇 시인의 가능성이다. 먼저 가장 기본적으로 컴퓨터의 데이터베이스에 들어있는 수많은 시 텍스트와 언어 사전 그리고 사회 문화 예술의 텍스트들을 검색하는 기계와 문장 구성 기계가 결합된 상상적 로봇이 필요하다. 시인의 역할을 맡을 사람은 언제나 이 로봇을 하나의 시인 기계로 만들어내도록 조작하고 그 기계를 시적으로 숙련시켜야 할 것이다. 이 로봇은 처음에는 초보적인 시인이 되는데 예를 들면 어떤 가상의 숲을 만들어내는 일부터 시작한다. 휴식과 몽상 그리고 공포와 괴기가 뒤얽힌 숲을 만들어보자. 휴식과 공포가 동시에 깃들이려면 어떠한 숲이어야 하는가? 로봇은 휴식과 공포의 기본개념들과 연관된 정보들과 단어들을 뒤져내야한다. 조작자는 로봇과 함께 자신의 휴식과 공포를 어떤 층위에서 결정할 것인지 선택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로봇은 쥬라기공원의 섬을 검색해낼지 모른다. 공룡들이 서식하는 숲 속의 유리공원이 선택된다. 그리고 ‘섬’은 ‘숲’을 보완하는 의미론적 담이 된다. 로봇은 여기서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이제 참여자는 이 섬과 숲에 대해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싶은가? 거리, 시간, 친밀도의 관계. 어떠한 영역의 주제로 접근하고 싶은가? 심리학적, 정치적, 고고학적, ---등등. 그리고 선택한 것들의 구성요소들로 이루어진 가장 기본적인 문장을 가지고 변형을 시작한다. 시적인 여러 가지 장치들을 준비한 기계가 이때 동원되기 시작한다.
너무 방대한 정보를 담고 있어서 무한하게 여겨지는 보르헤스적인 바벨도서관을 건드려서 로봇시인을 미로에 빠뜨린 것은 아닌가 걱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제한들을 두고 작업한다거나 몇몇 시들을 기초로 패러디하는 작업에서 출발한다면 그렇게 막막한 이야기는 아니다. 앞으로 누구나 이러한 로봇시인을 만들어내고 키워내고 성장시킬 수 있다. 만일 이러한 일이 실제로 상당한 수준에서 실현될 수 있다면 이러한 물음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로봇시인은 ‘창조적 주체’를 가지고 있는가? 그의 가상세계는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보드리야르는 엔첸스베르거를 통해서 ‘인간기계론의 환상’이라는 비판적인 생각을 개진하고 있다.
(보드리야르, ꡔ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ꡕ, 이규현 역, 문학과지성사, 1992, 205면 이하)
엔첸스베르거는 대중매체가 주체와 대상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유연한 역할교환과 되먹임구조(feedback)를 보여준다고 하였지만, 보드리야르는 엔첸스베르거가 기대했듯이 그러한 것이 검열과 통제를 벗어나서 민주주의적인 기능을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다고 보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다. 우리가 위에서 거론한 로봇시인은 사실 이러한 대중적 소통관계 속에 참여해야 하며, 수많은 되먹임 구조들을 소화해야 한다. 그것은 사이버가수처럼 대중들의 시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드리야르가 생각했던 것은 이러한 대중매체의 조작이 그 자체 속에 통제적인 검열작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로봇의 인공두뇌는 이러한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한 사회 속에서 저절로 작동하는 많은 대중적 삶의 구조들을 닮을 뿐이다. 그의 가상세계는 대중들의 조작된 환상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5. 사이버매체의 충격과 시의 변모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진정한 하이퍼텍스트 시나 사이버 시는 없다. 컴퓨터 작업 속에 뛰어든 문학적 글쓰기들은 여전히 종이 위의 글쓰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이버문학관인 ‘시인학교’나 ‘현대시엔터테인먼트’ ‘offoff’ 등 시에 관련된 사이트를 모두 뒤져보아도 새로운 사이버 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컴퓨터 밖에서 볼 수 있는 작품들을 사이트에 올려놓았거나 그러한 것들 중 좀 쉽다고 여겨지는 작품들을 선정해서 올린 것들이 눈에 띈다. 오히려 사이버 시대의 강렬한 충격과 인상을 새긴 시들은 컴퓨터 안에서 찾기보다 밖에서 찾는 것이 낫다. 이러한 시대의 충격을 예언한 먼 조상은 식민지 시대의 李箱이다. 그의 시들은 언어의 미묘한 건축학적 설계이다. 자신의 영혼과 현실의 지시대상이 삭제된 언어기호들의 미로적 건축에 대해 그는 흥미를 보였다. 그에 의해서 최초로 언어의 인위적인 실험과 조작, 게임이 하나의 미학으로 제시된다. 그는 도시의 인공물들이 증식되는 공간 속에서 가상들과 가면들의 무한한 복제와 대량생산이 주도적이 되는 사회의 미학을 그려냈다. 인공물화된 천사, 수수께끼의 쾌락을 맛보게 하는 도시의 미로, 위조된 모조품과 장난감들을 통해서 그는 희극적 유토피아(최저낙원)를 알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실재의 불완전한 모사, 자연의 불확실한 모방 때문에 희극적이 되었다. 그러나 이 희극적 가상들은 우울한 분위기에 감싸인 것들이다. 근대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시인의 눈에는 단지 어린아이들이 유희처럼 만든 장난감 세계에 불과하다. 이상은 이 근대적 세계를 축소시켜 희화적으로 자신의 폐쇄적인 방 속에 가둔다. 그것은 마치 벤야민의 그것처럼 ‘집안에 있는 도시’와도 같은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상이 가지고 놀던 어린아이의 장난감 도시가 거인들의 도시가 되었다. 폐쇄된 자아도 없다. 가상들은 어린아이가 졸라서 간신히 갖게된 장난감들과 달리 도처에 깔린 현실이 되고 우리 현실 전체를 끌어들이며 거대한 가상세계로 자라났다. 이상은 인공물들에 대해 그것이 지닌 위장과 가면의 독특한 느낌들을 생생하게 포착할 수 있었지만 이제 오늘날은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애매해지고 의문시 되었으며 그 경계 자체에 대한 탐색이 삶의 한 측면으로 된다. 가상들은 빠른 속도를 갖게 되었으며 그것들이 빨아들인 현실을 빠른 속도로 변화시킨다. 이상은 이러한 가상들의 속도가 느린 시대에 살았고 그 가상의 가면 뒤에 숨은 진실이 무엇인지 알려 애썼던 시대에 살았다. 가상과 가상의 연결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의 복잡한 연결인 미로 속에서 그는 해학적으로 쭈그러들면서도 진실을 찾는 게임을 벌였었다. 역설과 패러디, 아이러니로 뒤집히고 긴장되어 있는 그의 언어들은 여전히 그러한 진지함을 간직하고 있다.
90년대 이후 이상의 후계자인 이승훈은 이러한 진지함을 포기한다. 그는 ‘포스트모더니티’를 자신의 시학으로 삼는다. 긴장이 풀어진 언어, 그저 빠져나오는 언어, 아무 의도도 없이 새어나오며 자의식을 지워없애는 언어가 등장한다. 잡담과 비슷해지는 언어가 그의 시들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김혜순의 시들이 요즈음 이러한 수다스러움을 확장하며 또 동시에 길게 늘어지는 말들을 수없이 토막낸다. 그 토막들은 비슷한 어조들을 지니며 연결되지만 어떠한 내적 필연성을 강력하게 요구하지 않는다. <신파로 가는 길> 연작들 중에서 1과 4가 특히 그렇다. 박상순의 여러 시들, 예를 들어 <고독의 이미지>같은 것들 역시 비슷하다. 고독에 대한 성찰은 없으며 단지 고독이라고 여겨지는 것과 관련된 어조의 진술들이 어떤 익명의 삶의 조각조각들과 만난다. 그러한 조각들이 부담없이 여겨지는 ‘사이’를 넘어서 이어지는 것은 부담없는 상상적 연상작용에 의해서이다.
김혜순의 <출구를 찾아라>는 주체의 가상과 실재가 뒤섞인 혼돈을 보인다. 비디오의 줄거리를 가지고 시인의 의식과 뒤섞어 보여주고 있는 이 시는 컴퓨터 시스템과 연관될 때 더욱 설득력을 얻을 것 같다. 잠에 빠진 몸의 무기력은 가상들이 육박해오는 거대한 세계 속에서 움츠려든 수동적 육체와 대응된다. 가상 세계의 무법자 팩맨은 잠에 빠진 ‘나’를 마구 침범하고 그의 세계를 가지고 ‘나’를 포착해서 가두어버린다.
사이버매체의 충격은 언어의 흐름을 정보의 속도 속에서 조절한다. 하나의 언어 속에 깊이 머무르지 않게 되는 현상들이 보편적인 언어상태로 나타난다. 옛날 정지용 같은 시인은 어떤 이미지나 언어에 망각의 깊이를 집어넣었다. 그것이 시의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언어의 금욕주의는 사라졌다. 상상과 논증, 체험, 의미의 이해를 위해 필요했던 시간들이 욕망의 재빠른 달성을 위한 속도 속에서 무너졌다. 볼츠가 말하듯이 “현대에 와서 시간구조들은 합의구조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되었으며 “속도는 논증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되었는지 모른다.
(볼츠, ꡔ구텐베르크 은하계의 끝에서-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상황들ꡕ, 문학과지성사, 2000. 147면 참조)

사이버 매체가 가져온 이러한 충격을 수용하는 시들이 중요한 논쟁점으로 부각되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처럼 평가되는 것은 꼭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새로운 현상이기는 하지만 대개의 경우 문학의 위축을 가리키는 것이다. 빠른 속도로 소비되고 유통되는 언어들은 마치 어떤 여가수의 ‘바꿔 바꿔’라는 소리의 경련적인 리듬에 강박관념적으로 대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깊은 사유를 담지하는 총체적 주관성, 자신의 사유 속에 신성한 중심을 깃들이게 하는 주체가 이제는 낡은 세계의 골동품처럼 취급된다. 해체주의 이후의 급진적인 사조들은 그러한 주체와 중심을 파괴하고 그것을 다수적인 것으로 분열시켜 화려한 불꽃놀이 게임으로 만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이 공격하던 대상인 근대적인 주체의 인간주의적 형이상학만이 파괴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서둘러서 찾아내고 되돌아가야 할 곳은 오히려 신성한 중심에 있다. 그것만이 이 숨가쁜 혼돈과 혼란의 물결들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이며, 인간과 자연의 진정한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심을 되찾는 일은 자연의 신화를 파괴한 근대적 주체를 거꾸로 넘어서서 그 이전의 신화적 세계로 되돌아가는 길이다. 컴퓨터의 세계가 이상향을 가져다준다고 섣불리 예언하는 자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비판해야 할지 진지하게 모색해보아야 할 때이다. 우리의 미래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진할 수는 없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때이다.


-- 참고문헌 --

보드리야르, ꡔ기호의 정치경제학ꡕ, 이규현역, 문학과지성사, 1992.
볼츠, ꡔ구텐베르크 은하계의 끝에서­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상황들ꡕ, 문학과지성사, 2000.
밀러, 조너던, ꡔ맥루한ꡕ, 탐구신서, 1981.
오비디우스, ꡔ변신이야기ꡕ, 이윤기역, 민음사, 1998.
옹, 윌터, ꡔ구술문화와 문자문화ꡕ, 문예출판사, 1995.
포스터, 마크, ꡔ뉴미디어의 철학ꡕ, 민음사, 1994.
Bogue, Ronald, Deleuze and Guattari, Routledge, 1989.
Derrida, Jacques, Of Grammatatology, The Johns Hospkins Univ. Press, 1977., Of Spirit, The Univ. of Chicago Press, 1989.
Marin, Louis, The Utopic Stage, Mimesis, Masochism, and Mime, The Univ. of Michigan Press, 1997.
Wolfreys, Julian, Deconstruction Derrida, Macmillan Press, 1998.





'시론(詩論)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인이란 무엇인가?   (0) 2011.09.20
시작(詩作) 과정의 이론   (0) 2011.09.20
글쓰기   (0) 2011.09.20
[박재삼] 고치고 또 고치고   (0) 2011.09.20
시에 대한 간단한 이해  (0) 2011.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