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市 능선) 714

도시와 바다

도시와 바다/정동윤 목멱산서 내려다보면 도시에 구비치는 여울물 소리 남산의 등대를 휘감고 도는 파도는 붉은빛으로 출렁이고 밀려온 파도가 백악산에 부딪쳐 밤 하늘의 희미한 별들이 산봉우리로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어둠 속으로 사그라드는데 눈이 부신 불빛의 서울역에서 전철로 한 시간만 서쪽으로 가면 아직도 자연의 솜씨가 남은 작은 섬 월미도에 닿을 수 있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 바다의 품에 안긴 인간의 삶 신과 인간의 경계에서 반달의 꼬리 닮은 월미도는 여유롭다 은퇴 후 난 바다와 산을 아내는 백화점과 병원을 가리키다 우린 쉽게 손을 잡았다 도시에 머물며 자주 바다로 가기로.

비 내린 남산

비 내린 남산/정동윤 벚꽃이 군림할 때 서울의 인왕과 북악에서는 산불이 검게 피어올랐다 때맞춘 그윽한 봄비 남산 산책로 가장자리엔 하얀 벚꽃 개울이 졸졸 흐르고 떠나는 벚꽃 잔치에 초대받아 찾아온 수수꽃다리가 봄을 챙긴다 계곡마다 물길 라일락 뿌리 흠뻑 적시고 보랏빛 의미 촉촉이 재촉하니 벚꽃에 빼앗긴 눈길 향기의 수수꽃다리로 옮겨 빗속에도 따뜻한 미소가 고웁다

이별 준비

이별 준비/정동윤 이 봄에 잠시 떠나노라 고마웠던 산들아 그리울 골목들아 눈 감고도 찾아갈 오솔길아 다시 올 때까지 잘 있거라 해 질 무렵 낙조들아 불콰한 구름들아 홀로 뜨는 저녁 별아 함께 가자꾸나 하늘을 달리는 태양 마차야 그리움 사무치는 달빛 수레야 태평양 날아날아 함께 떠나자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시렸던 가슴아 일 년 내내 한 계절인 땅 가슴 시린 날이 사그라질까 익숙한 내 땅의 아침 공기야 참으로 귀한 오전의 일상들아 즐거웠던 오후의 외출아 가을이 올 때까지 잘 있거라. *4월 20일에 떠나 9월 중순쯤 돌아올 예정입니다.

꽃 치매

꽃 치매/정동윤 지금 남산은 벚꽃의 절정 인파의 홍수 하얀 터널 아래선 잠시 선글라스를 벗습니다 저 빛나는 봄꽃을 어찌 유리알을 통해 보겠어요 몇 해 전 장모님 돌아가시기 전 치매로 소녀가 되었을 때 만날 때마다 벚꽃 이야기 하고 또 하셨지만 늘 처음인 양 귀 기울였지요 유모차 탄 아이부터 지팡이 짚는 할아버지까지 산책길에 넘치는 사람들 모두 낯선 사람뿐이지만 멀쩡한 사람도 꽃그늘 아래서 그저 웃으며 사진 찍네요 벚꽃 피울 때마다 휴대폰에 담으며 지난해의 그 흥분과 감동 까맣게 잊어버리고 새 벚꽃에 또 열광하는 걸 꽃 치매라 불러야겠어요

일상이 여행

일상이 여행/정동윤 일을 놓았으니 한가하고 한가하니 여유롭다 약속은 하루에 하나 시간이 걸리적거리지 않아 좋다 오전 한나절은 맘에 드는 책을 보거나 쓰고픈 글을 적으며 부부는 각자의 일에 빠졌다가 점심 후에는 약속이 있으면 약속 장소로 없으면 시장이나 마트나 병원 등 일상의 일을 함께 꾸려나간다 마음 내키면 근처 산이나 동네 공원을 가끔은 한강으로 서해 섬으로 가 엉킨 마음을 풀고 온다 올해는 더 나아가 중미 아열대의 나라 파나마의 야자수 그늘 아래서 네댓 달 머물다가 오기로 했다 여행은 늦었다 해도 늦지 않았고, 좀 이른 듯해도 이르지도 않기에 마음에 연기가 피어오르면 '지금이 바로 여행할 때'라 여긴다. 4월 중순에 떠나기에 요즘은 여행 준비로 들뜬 시기 설레며 구름을 밟고 다니는 나만의 오롯한 시간.

세종대로의 강

세종대로의 강/정동윤 광화문에서 서울역까지 흐르는 강을 세종대로의 강이라 불러본다 어떤 흐름에서는 강물이 붉게 물들고 어느 지점에서는 노란 물결이 반짝이고 또 한 교차지에서는 파란 물이 흐르기도 한다 저주의 악담이 들려오는 여울목에선 내 친구의 모습이 물빛에 출렁이기도 하고 또 다른 분노가 휘청이는 물결 소리엔 다른 이웃의 얼굴이 물 위를 스치고 지나간다 주말마다 격랑으로 흐르면서 물결과 물결이 부딪히고 친구와 이웃이 눈 흘기는 넓은 세종대로의 강물 언제쯤 깊고 잠잠히 흐르는 고요한 강을 볼 수 있을까

그대 생각에

그대 생각에/정동윤 흐르는 세월에 어떤 이는 어둠보다 눈이 먼저 흐려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사립문보다 귀가 빨리 닫히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마음보다 머리칼이 먼저 바래기도 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나윤의 얼굴을 볼 수 있고 창을 열면 귓속에 새들의 노랫소리가 쌓이고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아침 창가의 햇살은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이따금 규환 생각만으로도 내 마음은 연기처럼 일렁이고 그대가 멀리 있어도 귓속엔 늘 속삭임이 흐르고 그대가 휴대폰을 울리면 차오르는 그리움에 울컥합니다 도시의 공원에서나 산길이나 바닷길 지날 때,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도 둥지를 지키는 한 쌍의 새처럼 노을이 빠져나간 어둠 속에서 꼭 잡은 두 손 놓지 않고 가야할 먼 길 끝까지 가렵니다 임규환/이나윤 결혼을 축하하며 나윤..

처마 밑의 장작

처마 밑의 장작/정동윤 장작이 파란 불꽃 일구지 못하면 그저 불쏘시개일 뿐이지요 시골 집 처마 밑에 흙벽 따라 쌓아둔 나무토막들 굵직한 놈 하나 골라 아궁이에 던지면 새파랗게 타올라야 장작이죠 어느 봄날인들 꽃피우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어느 여름인들 그늘 만들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지금은 온돌을 데워야 하는 시절 흘러간 영광에 취해 아련히 추억만 곱씹을 수는 없죠 뒤돌아보며 나아갈 수 없는 풀꽃처럼, 물기 말리며 불꽃 피워내는 우리네 인생처럼. 내 휴대폰 시의 창고에 미완성된 시 한 편이 없다면 꺼내서 퇴고할 글 한 편이 없다면 나는 더 이상 장작이 아니겠죠 부엌 바닥에 흩어진 알량한 불쏘시개일 뿐.

겨울나기

겨울나기/정동윤 잠자기 전에 가습기 대신 물 적신 수건 솔방울 담은 그릇엔 물을 넉넉하게 뿌려둡니다 수건 다 마를 때까지 솔방울 꽃으로 피어나며 그들이 간직한 물기 한 톨 남김없이 돌려줍니다 메마른 방 적셔주는 수건과 솔방울, 그들은 입도 뻥긋 안 합니다 자신의 가슴 다 말라버려도 나는 누군가를 위해 추운 겨울 건조해진 가슴에 물 한 방울 내어준 적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