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市 능선) 714

추워도 걸었죠

추워도 걸었죠/정동윤 몹시 추운 날 창자처럼 긴 골목 끝의 살점 넉넉한 생선구이 집에서 막걸리로 언 몸을 녹이고 인근 쌍화차 집에서 꽤 묵은 회포도 풀어냈죠 청계천 걸으며 얼음보다 차가운 물이 영하의 냉기로 우릴 감싸도 발걸음은 쉬지 않고 덕수궁 휘감고 돌아 한적한 카페에서 멈췄지요 오래 걸었으면 좋겠어요 세월과 다투지도 말고 풍경에 말을 걸며 서로 위로하고 다독거리며 햇살 따뜻하게 품듯 같은 방향으로 걷고싶네요 (종로5가 광장시장, 신진시장.골목, 생선구이집 전주식당, 한의원 쌍화탕, 청계천, 환구단, 시의회 회관, 성공회 성당, 정릉 영국대사관, 덕수궁 돌담길, 구세군혜마루, 구러시아 공사관, 고종의 길, 캐나다 대사관 회화나무, 성프란치스코수도원, 돈의문 터,대만 교회, 이화학당 정문, 정동극장 이..

눈 내린 고궁

눈 내린 고궁/정동윤 눈이 오는 날은 태백산보다 고궁으로, 창경궁으로 가자 금천교 지나 명정문 사각사각 들어가 보면 문무 품계석이 꼿꼿이 서 있고 명정전 하얀 기와 지봉 잡상과 화려한 단청 투명 고드름의 조화 넓은 조정은 왕의 걸음으로 줄 이은 행랑은 무수리의 눈으로 바라보자 눈 덮인 춘당지 여백이 주는 하얀 여유는 선물로 받아 오고 눈 오는 날의 고궁엔 내 생애 아름다운 날의 하루가 눈 속에 숨겨져 있다.

우리도 철새처럼

우리도 철새처럼/정동윤 중랑천 하류 한강과 만나는 곳에 물새들이 군데군데 뭉쳤다. 무슨 모임인지 몰라도 물 위에서 서로 마주보며 찧고 까불고 푸득거리며 활기차다. 넙적부리 물닭 댕기머리 알락오리 고방오리도 구석의 왜가리도 말 할 기회를 기다린다. 지상으로 인간들이 걸어가는지 자전거로 달리는지 망원경으로 자신들을 훔쳐보는지 신경쓰지 않는다. 나그네새의 삶을, 눈부신 하루를, 빛나는 물결 위에 둥둥 띄우며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하루를 충실하면 온 생애가 충실하듯.

인왕을 넘으며

인왕을 넘으며/정동윤 인왕산 북쪽 홍제동 개미마을 언덕 위엔 하늘로 달리는 묵직한 기차바위에 보름 저녁달 단추 누르면 도시는 단풍색 불로 반짝이고 달도 노랗게 불이 켜진다 밤하늘 동그란 등불 치마바위 아래 단풍색 도시는 은하의 한복판을 통째로 오려 네 개의 산을 기둥으로 박아 달걀 모형의 울타리 안에 누이니 지상의 은하수는 잠들지 못한다 별빛으로 써내린 오천 년 일기 왈본에 두둘겨 맞은 몇 쪽의 역사 상처가 묻힐까 도성 성돌 아래 새벽이슬 내릴 때까지 두 눈 부릅뜬 파수꾼의 조명은 쉬 잊을 수 없는 날들을 곱씹는다 인왕의 남쪽에 하숙한 시인 수성동 계곡을 거닐던 윤동주 '또 다른 고향'을 숲에서 그려보며 일본을 왈본이라 바꿔 불렀지만 이름까지 빼앗긴 후쿠오카의 단발마 그 감옥의 절규는 아직도 들려오네. ..

나무의 겨울

나무의 겨울/정동윤 겨울, 참 고마운 휴식의 계절이죠 봄부터 가을까지 얼마나 바빴고 분주했나요 꽃 피우랴, 나뭇잎 내랴 열매 맺으랴, 단풍 만들랴 식량 저장하랴, 낙엽 보내랴 모든 일 마치고 비로소 따뜻한 땅속으로 다리 뻗으며 긴 휴식에 들어갑니다 바람 불어도 눈이 쌓여도 아주 작은 센서만 남긴 채 우리는 모두 땅속에 깃듭니다 어느 날 해가 길어지고 기온이 올라갈 즈음 기지개 켜고 위로 올라가겠지만 그날이 올 때까지 긴 겨울의 달콤한 휴식 걱정마세요,제가 사는 방식입니다.

백세청풍 백운동천

백세청풍 백운동천/ 정동윤 이야기를 많이 품고 있는 산 유서 깊은 인왕산 깊숙이 들어가면 백세청풍 골짜기는 김상용의 집터 백운동천 계곡은 김가진의 별장 인왕산의 동쪽 창의문엔 인조반정의 공신록이 적혀있고 그 아래 깊고 조용한 동네가 청풍과 백운이 합친 청운동 청운동은 안동 김씨 집성촌 겸재도 그 그늘에서 출세했고 송강도 근처 마을에서 놀았고 위항문학 모임도 인왕을 바라보았다 조선의 절개와 지조의 상징인 청음 김상헌의 형은 김상영 병자호란으로 강화도가 함락되자 76 세에 폭약 터뜨려 자살했다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갈 때 가노라 삼각산아 청음의 시조비는 궁정동 안가에서 들려온 총소리에 역사의 아픔 안고 펑펑 울었으리라 김상영의 11 대손 김가진은 서출 갑신정변 이후 적서 차별 폐지로 대한제국 법무대신까지 올랐..

가을, 안녕

가을, 안녕/정동윤 짧은 만남이었지만 잘 헤어지고 싶은 가을, 그가 베풀어준 단풍과 낙엽 높은 하늘 풍성한 열매는 진정 은혜로운 축복이었다 가을이 담긴 산의 다양한 몸짓을 보며 이끼 낀 역사의 울타리와 계절 품은 나무 사이로 걷는 우리의 의식은 경건하였다 묵은지와 잘 볶은 닭 향기로운 커피와 달콤한 빵 그리고 다채로운 이야기와 아이들 같은 맑은 심성은 가을을 향한 정중한 예의 따뜻한 영상의 날씨 마른 낙엽 밟는 소리와 슬픈 역사의 남한 산성 계절 품은 고목의 침묵은 이별을 위한 거룩한 배경 안녕, 가을이여 빵집 탁자에 둘러앉아 밝은 얼굴로 빵을 나누며 미소짓는 사람들 표정처럼 우리의 가을은 행복이었다.

어젯밤에 한잔했소

어젯밤에 한잔했소/정동윤 노련한 신념의 셔터에 일상은 섬세한 예술이 되고 예리한 역사의 붓끝에서 통 큰 가을은 숨을 멈추고 감성 어린 추억에서 촉촉한 시가 흘러나오는 늦가을의 만남은 가로등 불빛 아래 흘러 우리의 불콰한 얼굴은 고매한 풍경으로 떠돌다 또 한잔 하고 헤어진 자리엔 그리운 액자만 걸려있소 시선이 다르고 구도가 어긋나고 느낌이 차이나도 뿌리 깊은 우리 삶은 늘 그 자리 그대로 그러나 서로 다른 풍경처럼.

경의선 숲길

경의선 숲길/정동윤 경성 신의주 만주 시베리아 영국의 런던까지 내달리다 휴전선 철조망에 막혀 숨 가쁜 기적소리는 들풀이 되고 공덕동 로터리 지나 경의선 철로 위에 덜컹거렸던 검은 철마의 바퀴 소리는 지하 도시로 숨어 버렸다 지하를 달리는 전철에 왕따 당했던 녹슨 철길이 우체통 옆 문화로 번역되고 철로는 숲길로 살아났다 줄지은 나무들 사이로 경의선 꿈은 철새가 되어 시베리아로 향한 고매한 날갯짓 북쪽의 밤하늘로 솟구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