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시(詩 능선)

비오는 날에 소주를 마시다/조태진

능선 정동윤 2011. 9. 29. 15:45

비오는 날에 소주를 마시다/조태진

 

 

칼놀림에도 세월이 배여서

쉰줄의 여자는 날샌 동작으로 개불을 썰고

머리가 희끗한 그의 남자는

포장 밖을 기웃거리며 손님을 기다린다

그림자의 움직임 없이

조용히 취해가던 두 사내가

해삼 한 접시를 더 주문한다

운치있게 말했는지 말해서 운치를 배웠는지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후배가

은행빚을 걱정하며 선배의 빈잔을 채운다

솔찬히 술잔을 비우던 후배는

보증서 준 장인에게 면목이 없다하고

선배는 후배에게 해삼을 씹으며

-아줌마,하루에 매상이 얼마나 오르요?

하고 묻자 무료하던 참의 그 남자가

-싄찮아요 경기가 예전 같지 않소!

하며 몇 마디 말을 마칠 쯤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이 포장을 치고

한떼의 젊은 남녀가 포장을 들추며 들어와

경쾌한 목소리로 이것저것을 시키자

쉰줄의 여자는 낙지를 볶고 생선을 굽는다

근방의 나이트클럽이 파했을 것이다

쌀값으로 술값을 치룬 두 남자

겨울비 내리는 자정 속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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