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서산,광천,영천에서 올라와 격랑의 한 시대를 함께 보내면서
가족을 이루고 아이들 돌보며 내조해준 아내들에 감사의 뜻으로
점 하나 찍고 가자는 뜻에서 몇몇이 뭉쳤다.
그리고 폭염과 폭우를 피해서 한반도 남단 땅끝마을 너머 청산도로 향하였다.
출발부터 흩어진 좌석을 가족석으로 모두 모을 수 있어서 여행의 예감은 아주 좋았다.
추억으로 살기엔 아직 머리칼이 많이 남아 있고 새로운 꿈에 도전하기에는 얼굴의 고랑이 좀 깊이 패였지만
젊은이가 가진 패기 외에는 부럽지 않은 우리들이라 남은 세월에 대한 경쟁력도 뒤지지 않을 것만 같다.
많이 살아야 두 갑자의 삶에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기 전에 마침표 하나 찍고 가자는 의미를 내세우고
남해바다 멀리 청산도를 점으로 만들기 위해 그곳으로 달려가는 중이다.
중부지방에서 흔히 보아왔던 나무들이 보이지 않고 감탕나무과의 두꺼운 잎을 지닌 먼나무 꽝꽝나무 돈나무 등이 많다고 들었으나
실제 나무를 보면 금방 알아볼 수 없어서 내 짧은 나무 상식이 부끄럽기만 하였다.
광주에서 KTX를 내려 시외버스를 타고 완도터미날에 내리니 남부지방의 낯선 풍경이 구수하게 옮아온다.
아침내내 기차와 택시 그리고 시외버스,다시 택시를 탄 뒤에야 청산도행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기분좋은 피곤함을 즐기며 냉방이 아주 잘되는 객실에서 느긋하게 더위를 식히는 짝궁님들.
그대들이 있어서 우리의 인생도 그나마 완성될 수 있지 않았을까?
나의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이 오르니 그것이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오우가에서
오늘의 벗이 누군가 하니 기헌과 호연이라
앞에서 사진 찍는 인철이, 그가 있어 더욱 반갑구나
청산도 여행에 이들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위의 글 패러디
청산도 숙소에 짐을 풀어놓고 집 주변을 둘러보며 골목의 정겨움에 빠져들었다.
서울 등 중부지방은 폭우로 물폭탄 중이고 이곳도 폭염이 직선으로 터지지만 견딜만 하였다.
골목의 아이들은 어디로 숨었는지 웃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나이든 사람들만 그늘에 앉아 관광 온 사람들이 식상한지
무표정으로 부채만 부치며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아이들 목소리가 사라진 골목은 왠지 생동감을 잃고 막막해 보였다.
마을을 벗어나 서편제 영화를 찍었다는 그 언덕으로 올라간다.
앞에는 남정네가 올라가고 그 뒤로 아낙들이 따라가니
솜씨만 있으면 걸판지게 남도 가락이라도 한곡 뽑아 올리고도 싶었다.
신선한 바람과 고즈늑한 풍경이 더운 날씨도 녹여 버리고 있는데
구수한 남도 창이 유채꽃이 져버린 들판에 초록처럼 번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함께 여행한 날이 많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만나다 보니 서로의 속내를 잘 알고 있는지라
대화에는 막힘이 없고 주저함도 없고 내숭조차 없다.
그저 자주 만나 함께 여행 다니자는 의견이 많지만 한밤중에 쓴 연애편지처럼
아침이면 후회하는 감정의 쏠림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촌에서 올라온 사람들 내조하느라 수고 많았소.
여건이 되면 지구의 어느 구석이라도 함께 다니며
그대들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소.
물방울이 모여 구름이 되고, 나뭇잎이 모여 숲을 이루고, 집들이 모여 마을이 만들어지듯
무엇을 이룬다는 것은 아주 작은 생각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다.
변화무쌍한 구름도, 막힘없이 불어오는 바람도, 7월의 강렬한 햇살도
그저 작은 소품이 되어버리는 풍경은 시간이 정지된 청산도 오후이다.
무공해 달팽이 마을들이 우리를 편안하게 한다.
이야기를 만들어 영화를 찍으면 그 영화는 역사가 되고
장소는 잘 포장되어 현실처럼 느껴진다.
영상 산업에서 선택된 장소의가 영화나 드라마로 성공하면
그 지역은 곧바로 관광 명소가 되어 관광객들로 붐비게 된다.
사극으로 인기가 있는 어떤 지역은 종이로 붙힌 지붕의 단청이 바래어져
흉하게 너덜거리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청산도는 쉽사리 인기가 식을 것 같지가 않다.
이곳은 어릴 때 살았던 고향에 나이가 들어 친구들과 다시 찾아 온 우리집 같았다.
어머니의 손때가 묻어있고 내 유년의 추억이 춤을 추고 있는 마당에서
아우들과 한바탕 뛰어노는 모습을 이젠 아비의 눈으로 바라본다.
첫날의 오후의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 오는 길이다.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지고 있는 시간이다.
숙소에서 곧장 포구로 나가 광어와 참돔으로 푸짐한 만찬을 하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4월과 8월의 성수기를 제외하고는 식당들이 오후 7시면 문을 닫고
하나로 마트도 7시 반이면 문을 닫는다고 한다.
숙소로 돌아오는길에 기헌이는 아침으로 라면을 제안하여 마트에 들렀다.
간밤엔 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는데도 아침 5시 지나서 모두들 일어났다.
숙소에서 나와 해변을 따라 걸으면서 내심 유명한 범바위까지 가 볼 요량으로 서둘렀다.
해가 뜨기 전에 꽤 멀리 가고 싶었지만 모두들 슬로우 템포다.
어디까지 가느냐가 아니라 얼마동안 걷느냐가 중요하다는 의견이 대세다.
아침 안개가 포구에 신비스럽게 피어오르고 주위는 조용하기만 하였다
아침을 먹기 위해 왜가리 한 마리가 우아한 자세로 미동도 하지않고 서 있었다.
물 속을 집중하여 노려 보다가 쏜살같이 뽀족한 주둥이를 물 속으로 내리꽂았다.
꼬리 지느러미를 퍼득이는 생산 한 마리를 잡아 여러차례 고쳐 물면서
조찬을 즐기고 있었다.저 분도 오늘 아침은 몹시 시장하셨는가 보다.
도락리 해변을 따라 걷다가 화랑포에서 해변길이 막혀 버렸다.
다소 위험해 보이는 해변길을 피하여 숲으로 뻐져나오기로 했다.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있었지만 여인네들의 불안해 하는 마음을 헤아려
서둘러 좁은 숲길을 헤치며 나왔다.
종아리가 풀잎에 베이면서 겨우 빠져 나오니 슬로길과 만나게 되었다.
당리 방향으로 내려오는 슬로길은 한적하기도 하고 아침공기가 맑아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주변에 남아있는 산딸기도 따 먹으면서 천천히 아침산책을 즐기게 되었다.
이 섬에서 여러날 머물면서 구석구석 다 걷고 싶은 충동이 인다.
특별한 것은 없지만 보편적인 것들이 잘 정돈된 모습이고
그 풍경을 감싸안은 청량한 공기와 햇살과 초록의 분위기가 참 좋기 때문이다.
작고 사소한 것도 아끼고 잘 관리하면 명소로 남겠지만
어설프게 흉내낸 영화의 세트장처럼 시간이 경과하여 너덜거리는 조악품으로 남게되면
소중한 추억들이 쓰레기처럼 부끄러워질 것이다.
기념물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유지하고 잘 관리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아늑한 포구와 그 언덕.김용철 시인의 시가 생각 난다
떠나가는 배/김용철
<전략>
아득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 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 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헤살짓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거냐
<후략>
현대인이 좋아하는 경관은 물가 근처의 드문드문 나무가 늘어선 전망이 좋은 곳이라 하는데
이곳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아침 산책을 마치고 도락리 포구로 돌아서 숙소로 가는 길.
물안개는 햇살에 증발되어 버렸고 아침일 하던 마을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해송이 바닷바람을 맞으며 늠름하게 줄지어 서 있다.곰솔이라고도 하고 흑송이라고도 한다.
소금끼 많은 바닷바람을 견디어 내는 강한 어부들처럼 완강해 보이기도 하였다.
기헌이가 끓인 싱거운 라면으로 아침을 먹으면서
11시 배를 탈 것인지 13시 배를 탈 것인지 의논을 하다가 최종적으로 랜트카로
청산도 전부를 둘러보기로 하고, 운전은 호연이가 하기로 하고, 상황를 봐 가면서 시간을 정하기로
결정하였다.(13인승 랜트비 5만원)
잘 자리고 있는 벼들은 숨 쉬는 삶의 터전이다.맑은 공기와 깨끗한 햇살이 무한정 공급되고
예기치 못한 놀라움이나 뜻하지 않는 만남이 가득하길 기대하면서 발걸음을 재촉해 보지만
이곳은 느림의 달팽이가 상징인 것처럼 모두들 서둘지 않고 천천히 걷기만 한다.
등산이나 여행은 어느 계절,어떤 날씨,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계절마다 풍경이 다르고 날씨에 따라 감상이 다르고 동행하는 사람에 따라
어떤 이야기를 나누느냐에 따라 감동도 달라진다.
어쨎던 오늘의 기분은 만땅이다.
차를 주차장에 세워놓고 범바위를 찾아 올라갔다.
가야산은 화재,수재,풍재가 없는 산이라 들었는데 청산도도 그 삼재를 피한 섬이 아닐까 유추해 본다.
다만 이곳 현직 군수의 송덕비만 세간의 웃음거리를 만들어 주었을 뿐이고.
그래서일까 간밤에는 별을 한 톨도 볼수 없었다. 흐린 날씨 탓이겠지만 아쉽고도 아쉬웠다.
자연이 보내는 신호를 빨리 받아들이고 잘 반응하는 종은 살아 남았고
그렇지 못한 종은 소멸했다. 자연을 훼손하면 위험을 알려주는 센서를 망가뜨리는 것과 같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 조심하며 전망대 있는 곳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올랐다.
새끼 범바위에서 전망대 지나 우뚝 선 어미 범바위가 바다를 향해 포효하고 있다.
산에 다니다보면 산에도 중독되지만 나무나 숲에 중독되기도 한다.
아편 같기도 하고 끊기 어려운 니코틴 같기도 하다.
그것은 쉼없이 솟아나는 엔돌핀이 온몸으로 번지고
땀으로 젖어내려도 피곤한 줄 모르는 중독의 달콤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 범바위에서는 나침반도 방향을 잃고 돛이 부러진 나룻배처럼 흔들거린다고 한다.
서로의 젊은 시절을 기억해 주는 친구와 더불어 떠나는 여행은 그 시도만으로도 높은 가치가 있다.
"꽃보다 할배"가 아니라 "꽃보다 아재" 아니면 "꽃보다 동무"의 심정으로 짧은 1박2일의 마침표 여행은
남은 날을 위한 성스러운 행사였다. 언젠가는 특정한 장소를 여행하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어떤 어려움이
있드라도 감수하며, 고생이란 시간만 되면 찾아오는 당번처럼 생각하고 꾸준히 걸어갈 것이다.
여행은 마무리로 해남의 천일식당에서 떡갈비 정식을 시켰으며 라면으로 견뎌낸 공복감을 시원하게 달래주었다.
시간이 허락했드라면 우리나라 3대 정원의 하나인 보길도를 찾아서 호사스러웠던 윤선도의 전원생활을 살펴보고도 싶었지만
시간에 쫒겨 같은 바닷물을 머금고 있는 남해의 파도 위에서 다시 오우가 한 편 중얼거리며 돌아선다.
월(月)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의 광명이 너만한 것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정동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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