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11월의 첫날,모교 운동장에서 동문가족한마당이 열린다는
안내 문자의 극성에 잠시 참가하기로 하고, 남산을 거쳐 걸어서 왔다.
북아등 등산을 거의 하지 못하였기에 짬만 나면 걷기 계획을 세운다.
동문가족한마당에 참가하여 눈도장을 찍고
모교에서,청계천,정릉천,홍릉수목원,고려대,개운산으로 가기로
찬홍이와 주섭이와 함께 가기로 하고 코스를 확정하였다.
.
공식적으로 여러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내가 읽을 책을 여러 권 뽑아서 책상 위에 놓아두는 것과 같다.
오늘은 많은 책 중에서 두 권을 뽑아 서너 시간 길을 걸으며
서로 읽어 가는 것이다.
걸으면서 귀로 읽는다는 것은 참으로 재밌고 유쾌한 일이다.
누군가 정해놓은 길로 다니는 것도 좋지만 나름대로 길을 연결하고
새로운 코스를 만들어 걸어보는 방법도 재미가 쏠쏠하다
걷고 싶은 지역 잘 아는 친구가 있으면 더 좋다.
사전을 찾아 볼 일도 없이 술술 읽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큰 병마를 떨치고 걷기를 시작한 주섭이는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단다.
오늘은 초반엔 주섭이의 줄거리가 주로 전개되었다.
기왕 걷는 길을 그 지역의 문화와 역사 주변의 볼거리를 이야기하고
파란만장한 자신의 삶의 조각들을 들춰내며 산림욕을 곁들이면
한 권의 흥미진진한 책이 금방 읽히는 것처럼 좋다
꽃댕강나무와의 만남은 나는 잊지 않고 있다.
지금은 하얀 꽃이 많이 보이지 않아 화려함이 덜하지만
힘든 시절 자주 찾아와서 머물었던 나무였기에 잊을 수가 없다.
홍릉수목원의 꽃댕강나무 앞에서 올해의 만남을 마무리한다.
자연과 소통하고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교감을 나누려고 노력한다.
근처의 낙상홍도 붉은 열매가 탐스럽게 피어 가을의 풍성함을 더해준다.
"명마는 회초리 그림자만 보아도 잘 달린다"고 한다.
그다음의 말은 한 번 회초리를 맞고 달리는 말이다
어떤 말은 계속 맞아야 달리고 어떤 말은 맞아도 달리지 않는다고 한다.
수목원의 나무는 연구원들의 발소리만 들어도 잘 자랄 것 같다.
걷기 시작할 무렵 살곶이다리 근처까지 걸으며 최근 사회의 격렬한 논쟁인
교과서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우리도 그 논쟁에 관심을 가지고 나름대로
주관적 견해를 밝히면서 흥분하기도 하였지만 가을을 걷는 주제로는
너무 무거워서 더는 이어가지는 않았다.
홍릉소목원 이후의 길 안내는 찬홍이가 맡았다.
인생은 새옹지마,일희일비하지 말고 진인사대천명 하자고.
지구를 둘러싼 태양계,태양계를 안고 있는 우주가
천억 개 이상 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태양의 소멸 시점이 50억 년
남았다는 신문 기사를 본 기억이 있는데 이 주제를 계속 이어간다.
찬홍이의 스크랩북은 주로 이런 천체물리학적 소재가 많을 듯하다.
하루를 충실하게 살겠다고 수첩에 시간 단위별로 계획을 세워 빈틈없이
살아가기는 싫다.좀 헐렁하게 살고 천천히 주변 구경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꼭 해야야 할 핵심을 중심만 챙기며 여유 있게 보낼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
찬홍이가 펼치는 이야기는 하늘의 별과 우주 이야기가 많았다.
방배동 근처에 산다는 주섭이는 방배동의 이름에 엮인 이야기를 한다.
세조의 맏아들 양녕대군은 왕위에 뜻이 없다는 생각을 보여주기 위해
한강을 등지고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설과 우면산을 등지고 경복궁을
바라보았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방배역 근처엔 효령대군 이보의 묘가 있다.
오후 1시쯤 행당동에서 출발하며 청계천을 지났고, 홍릉 수목원에서
산림욕을 하며 걸었고 고려대학교 뒷산인 개운산을 지나
길음역에서 마무리하였다.
홍릉수목원 인근의 천장산에 가보고도 싶고,
번동의 북서울 꿈의 숲으로 가는 길이나
북악을 돌아 다시 남산까지 가는 길도 이을 수 있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걸어보는 서울의 길은
선택하며 걸을 수 있는 재미가 있다.
나무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삶을 자랑하지 않는다.
담담히 보여주며 내면의 나이테에 새길 뿐이다.
자신이 힘들게 만든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것은 더는 소유하면
목숨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가을은 비움의 계절이고 우리들의 시간대이다.
두 권의 책을 서로 읽으며 걷는 서울 산책이 즐거웠다.
-정동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