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들

시어의 세련됨은 정확한 감정 표현에서 생겨난다

능선 정동윤 2011. 8. 25. 08:14

시어의 세련됨은 정확한 감정 표현에서 생겨난다


우리는 앞에서, 시는 시인의 생생한 현실 체험에 바탕을 둔 문학 장르이기 때문에
시의 모든 특징은 거기서부터 흘러나온다고 말했습니다.

이점은 시어의 세련됨을 말할 때에도 그대로 관철 됩니다.
왜냐하면 시어란 시인의 체험한 구체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어란 그 정서 체험이 어떠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다음 시를 보지요.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대매대 나부끼는 사랑아
내고장 부소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뿌리를 대려서 약으로도 먹던 기억
여학생이 부르면 마아가렛
여름모자 차양이 숨었는 꽃
단추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
여우가 우는 추분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사랑아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

-박용래. 구절초

'시는 고도로 집중 개괄하고 강렬한 감정과 풍부한 상상으로 현실을 반영하되
그것을 만족시켜 주는 세련되고 음악성이 강한 언어들을 사용한다'는,
문학 개론 그대로의 아름다운 서정시입니다.
여러분도 이 시의 여러 부분들. 예를 들어 한 9월쯤이 아니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마디마디 핀 꽃이 아니라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그냥 사랑이 아니라
울림소리의 '아'의 효과가 겹쳐 있는 '사랑아', 또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이나 '눈물 비친' 등의 표현들을 주의 깊게 본다면
정말 시라는 것이 더없이 정확한 감정 표현을 하는 문학의 한 갈래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구절초라는 풀꽃을 알지는 못하지만 이 시를 읽으면서 ,
됀지 그것은 젊음이 서성거리던 언덕과 그 날의 섬세한 사랑의 감정과 서글픔을
간직한 알갱이가 작은 흰색 계통의 아름다운 꽃일 거라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이런 효과는 다름 아닌 정확한 감정 표현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어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문학 교실에서 시쓰기를 가르치다 보면 종종 시어의 세련됨이나
시의 음악성을 오해하여 시어의 세련됨을 '아어(雅語)'로
시의 음악성을 정해진 리듬(정형률)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 듯합니다.
(사십줄에 접어들어 시쓰기를 시작하신 분들은.
기억을 아무리 최근으로 돌려 놓아도 기억나는 것이라곤 입시 공부를 위해 암기했던
서적 어미형이나, 율격 등뿐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어떤 '옷을 세련되게 있었다'고 할 때,
그것은 걸친 옷의 색깔이나 디자인 상태를 두고 말한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몸과 분위기에 알맞은 옷'을 입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처럼 시어의 세련됨도 언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 표현에 가장 합당한 말을 썼을 때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일례로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라는 문장을 '구절초 마디마디 핀 사랑'이라고
바꿔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뒤의 문장이 잘못된 것이 아님에도 시어로서 세련되었다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그 현실이 불러일으킨 시인만의 감정 상태와
색깔이 거의 묻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어의 세련됨은, 시에 쓴 말이 시인의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하나의 사물을 지적하는데는 단 하난의 가장 적절한 명사가 있고,
한 가지 동작을 표현하는 것에는 단하나의 가정 적절한 동사가 있고,
하나의 상태를 묘사하는 데는 단 하나의 가장 적절한 형용사가 있다'는 말을
시쓰기에서 옳게 구현하게 됩니다.

다음 시 한편을 감상해 보시지요.

향아 너의 고운 얼굴 조석으로우물가에 지춰이던 오래지 않은 옛날로 가자
수수럭거리는 수수밭 사이 걸찍스런 웃음들 들여나오며 바구니를 든 환한 얼굴 그림처럼 나타나던 석양......

구슬처럼 흘러가는 냇물가 맨발을 담그고 늘어앉아 빨래들을 두드리던 전설같은 풍속으로 돌아가자눈동자를 보아라 향아 회올리는 무지개빛 허울의 눈부심에 넋 빼앗기지 말고
철 따라 푸짐히 두레를 먹던 정자나무 마을로 돌아가자
미끈더안기생충의 생리와허식에 인이박히기 전으로 눈빛 아침처럼 빛나던 우리들의 고향 병들지 않은 젊음으로 찾아가자꾸나

향아 허물어질까 두렵노라 얼굴 생김새 맞지 않는 발돋음의 흉낼랑 그만 내자
들국화처럼 소박한 목숨을 가꾸기 우하여 맨발을 벗고 콩바심하던 차라리 그 미개지에로 가자 달이 뜨는 명절밤 비단 치마를 나무끼며 떼지어 춤추던 전설 같은 풍속으로 돌아가자 냇물 굽이치는 싱싱한 마음밭으로 돌아가자.

-신동엽. [香아]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이처럼 멋들어지게 표현된 시도 드물 것이다.
그것도언어 그 자체에 대한 고립된 관심에서가아니라,
전달하고자 하는 바의 목표 즉, 반생명으로 기우는인간 사회
('회올리는 무지개빛 허울의 눈부심','미끄덩한 기생충의 생리와 허식', '얼굴 생김새 맞지 않는 발돋음의 흉내')를 넘어
공동체적인 노동과 삶의 건강한 생명력을 복원하고자 하는
시인의 간절한 정서 내용에 가정 알맞은 언어'를 사용한 시로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 시의 시어는 시인의 노래하는 바의 사상 감정과 가정 닮아 있습니다.
음절 하나하나에도 시적 테마를 빛내는 공동체 그 자체의 언어가 시인의 정서 체험과 깊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특히 '향아' 하는 울림소리는 시적 상상력의 확대하는 절묘한 효과
(이 시에서는 공동체적 삶이 있는 곳으로의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함)를 내면서
문자의 향기 같은 후각적 효과마저 불러일으킵니다.

시어는시의 본질적 특성인
'시인의 생생한 체험에 바탕을 둔 감동 있는 감정 표현'에서 구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아어'와 대립되는, 구체적인 감정 표현으로서의 언어입니다.
그래서 시적으로, 세련된 언어는 꾸미는 일과 구별되며 '세련된 그 무엇을
적절히 배합'한 말과도 다릅니다.
세련된 시어는 '언어의 창고' 같은 곳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정서체험과 그 내용에의 적합성에서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시어의 세련됨을 말할 때에도 시의 본질적 특징인 정서적 체험의 직접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정서 체험에 따라 같은 언어라도 시 속에서 완전히 다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시 구절초에서의 '나부끼다'와 향아에서의 그것을 비교하면,
우선 후자의 것은 ' 신명나게'라는 구체적인 감정을 담고 있는 반면,
전자의 것은 '매디매디'라고 앞 단어의 감정 상태의 영향권 속에서
'애조띤 작은 흔들림'이라는 감정의 구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후자의 것이 동적인 의미(사람이 신명으로 뛰쳐나갈 때의 나부낌)라면,
전자의 것은 정적인 의미(마음 졸임이 터져나는 흔들림)가 강합니다.
그리고 그 단어가 전체의 시에서 하는 역할은,
전자의 것이 추억의 환기라면 후자의 것은 역사적 상상력의 펼침입니다.

이같이 같은 단어일지라도 정서 체험의 상태가 다르면 시에서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른 것이 됩니다.
그러니 정서체험의 정확한 표현으로서의 시어를 강조할 수밖에 없지요.
다시 한 번 말하겠습니다. 세련된 시어는 정확한 정서 표현으로부터 생겨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