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시(詩 능선)

들깻잎을 묶으며/유홍준

능선 정동윤 2011. 9. 2. 16:05

들깻잎을 묶으며/유홍준

 

 

추석날 오후, 어머니의 밭에서

동생네 식구들이랑 깻잎을 딴다

이것이 돈이라면 좋겠제 아우야 다발

또 다발 시퍼런 깻잎 묶으며 쓴 웃음 날려보낸다

오늘도 철없는 것들이 밭고랑을 뛰어다니며

들깨 가지를 분질러도 야단치지 않으리라

가난에 찌들어 한숨깨나 짓던 아내도

바구니 가득 차 오르는 깻잎 이파리처럼 부풀고

무슨 할 말 그리 많은지

맞다 맞어, 소쿠리처럼 찌그러진 입술로

아랫고랑 동서를 향해 거푸거푸 웃음을 날린다

말 안 해도 빤한 너희네 생활

저금통 같은 항아리에 이 깻잎을 담가

겨울이 오면 아우야

흰 쌀밥 위에 시퍼런 지폐를 얹어 먹자 우리

들깨 냄새 짙은 어머니 밭 위에 흰 구름 몇 덩이

머물다 가는 추석날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한나절 푸른 지폐를 따고

돈다발 묶는, 이 얼마만의 가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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