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자연 속에 묻혀 사는 일군의 시인들이 최근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전주 모악산의 박남준, 구례 지리산의 이원규, 충남 서산의 유용주와 예산의 이정록, 강원도 영월의 유승도,강화도의 함민복과 거제도의 이진우 시인이 좌장격인 박남준씨의 근거지인 전주의 한옥체험관에 모여 1박2일간 시와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등단 10년 남짓의 30,40대 이 시인들은 우리 시단의 중견(中堅)입니다. 시력(詩歷)이나 연륜으로 따져도 그렇고 무엇보다 그들은 건강하고 믿음직한 시작 활동을 펼치며 우리 시단을 떠받치기에 충분한 어깨들이란 평가를 받는 시인들입니다. 그런 전국의 시인들이 어렵게 함께 모인 귀중한 자리였습니다.
문단 권력과 파벌, 출판 상업성, 도시의 불모성에 휘둘려 작금의 우리 시는 피폐해질대로 피폐됐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특히 유능한 시인들이 그들의 빼어난 글솜씨를 밑천 삼아 삶과 동떨어진 감상이나 영성(靈性)을 팔고 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도시의 책상에 앉아 머리로, 과학적으로 자연시, 생태시를 쓰고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런 때 자연에서 각자의 삶과 시를 일구고 있는 위 시인들은 우리 시의 보루이며 장래이기도 한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큰물이 났다고 하였으나
우린 수마(水魔)란 말을 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물길을 막아놓은 것 아닌가
물의 길에 우리가 살고 있었던 것 아닌가
바닷물을 데워
하늘로 올라가는 수증기의 길에 속도를 가했고
땅으로 내려오는 비의 길을 어지럽혀
어쩔 수 없이 폭우가 쏟아진 것 아닌가
수마가 할퀴고 간 상처라니
수마란 말은 차마 입에도 담지 말자
우리 몸이 물이고
물이 생명인데
물을 마(魔)라고 하면
너무 자학적이지 않은가
너무 반성이 깊지 않은가
함민복 시인의 근작시 '큰물' 전문입니다. 자연스레 터져나오는 일상이나 삶에 대한 달관의 여느 시와는 달리 함씨는 이번 시에서 홍수 피해에 대해 생태학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2연 까지에서는 말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연에서 보십시오. 자연스레 시인 자신도 그 생태의 순환고리에 맞물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시인들과는 달리 시만 쓴답시고 직업 현장을 버리고 '책상 위 전업시인'으로 돌아서는 시인들이 늘고 있고 이런 시인들에 대한 원로, 현장 시인들의 질책도 나오고 있습니다.
"가령 이런 경우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 직장도 그만두었으니까 매일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써야한다, 그래서 의무적으로 시를 쓴다, 생각이 나지 않으니까 아무거나 쓴다, 썼으니까 발표를 한다, 이래서 되지도 않은 시가 마구잡이로 쏟아져나오는 잘못된 현상이 벌어지는 대목은 없는가."
신경림 시인은 '시평' 여름호에 실린 '시인은 직업을 가져야 한다'에서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 전업'풍조에 대해 위와 같이 우려했습니다. 직장 일에 치여 좋은 시를 쓸 수 없는 젊은 시인들의 시에 대한 충정이야 십분 이해 가지만 자신의 반세기 가까운 시작 경험으로 미뤄볼 때 "쓰지 않아도 좋았을 시를 돈 때문에 씀으로써 두고두고 후회하게 만든 경우도 없지 않았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용접공으로 산업현장 일선에서 좋은 시를 선보이고 있는 최종천 시인은 곧 나올 '시인세계' 가을호에 실릴 글 '노동현장의 다양한 은유들'이란 글에서 "노동현장에서 생성되는 은유야말로 살아있는 시다. 그 이유는 다양한 은유들을 의식의 조작의 결과가 아니라 몸이 불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고 합니다. 해서 최시인은 "현장에서 떨어진 기성시인들에 의해 쓰여지는 시는 오히려 우리의 보편적인 생활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대목에서 박용래(1925-80)의 시 '풀꽃'을 읽으며 시와 직업, 시의 현장과 삶의 현장에 대해 생각하려합니다.
홀린 듯 홀린 듯 사람들은
산으로 물구경 가고.
다리 밑은 지금 위험수위
탁류에 휘말려 휘말려 뿌리 뽑힐라
교각의 풀꽃은 이제 필사적이다
사면에 물보라치는 아우성
사람들은 어슬렁어슬렁 물구경 가고.
좋은 상업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 당대로서는 최고 직장이었던 은행도 돈 냄새 싫다며 그만 두고 이후 얻은 교직도 시인으로 정식 등단하자마자 오로지 시를 위해 팽개쳤던 박시인이야말로 말 그대로 타고난 시인으로 통합니다. 평생 술과 울음으로써 시를 썼던 박시인의 시는 그러나 술과 울음으로만 질척이지는 않습니다. 현장, 시적 대상, 삶에 함몰되지 않은 선비적, 모더니스트적 풍모로 적당한 거리를 지키며 삶의 깊이를 독자들에게 보여줬습니다.
삶의 현장에 함몰되지 않고 짐짓 홀린 듯 어슬렁어슬렁 물구경 가는 자세가 문화, 문화의 핵인 시의 현장일 것입니다. 이런 저의 말이 순수, 고급 문화주의라는 비난을 면할 수도 없겠군요. 즉물적으로 각박한 우리의 세태에서는요. 그러나 어디 일상의 현장만이 우리 삶입니까. 좀더 낫고 가치 있는 관계, 끝간데 없는 삶의 깊이를 꿈꾸는 것에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전주에 모였던 한 시인의 말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시 한 편 값이 2만-3만원에 불과하더라도 잘 쓴 시 한 편 건졌다고 생각될 때 가장 뿌듯하다." 도시의 상업사회와 산업현장, 무슨 무슨 권력에 무관한 척 비껴서 시를 가꾸고 있는 젊은 시인들이 있기에 우리의 시와 문화에는 희망이 있고 우리 삶의 깊이도 지켜지는 것 아닐까요. 참고로 전주에서의 자연파 시인들의 허심탄회한 방담과 신작 시편들은 곧 나올 '문예중앙' 가을호에 실립니다.
글쓴이 : 이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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