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들

1. 조병화의 시론

능선 정동윤 2011. 9. 20. 00:28

1. 조병화의 시론

(1) 나의 시론, 나의 스타일
片雲 趙炳華는 1949년 시집 《버리고 싶은 遺産》을 펴내면서 시단활동을 시작한다. 그에게는 《하루만의 위안》(1950), 《패각의 침실》(1952), 《인간고도》(1954) 등을 위시하여 《외로운 혼자들》(1987)까지 30권이 넘는 시집이 있으며, 시선집으로는 《고독한 하이웨이》(1968), 《벼랑의 램프》(1983), 《바람의 둥지》(1985)등 여러 권이 있다. 또한 시론집으로는 《슬픔과 기쁨이 있는 곳》(1967), 《시인의 편지》(1977), 《순간처럼 영원처럼》(1985) 등이 있고, 10권으로 된 《조병화 전집》(1988)이 있다. 그의 초기시는 모더니즘의 흔적을 보여주지만, 후기로 올수록 그런 흔적은 사라진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이런 특성에 대해서 김윤식 교수는 다음처럼 말한 바 있다.

모더니즘 계열에서 출발한 조병화의 시가 기실은 모더니즘적인 방법론적 자각을 관철하지 않고 시인 자신의 기질에 되돌아가 버렸다는 것, 그것에 뿌리를 두고 계속 시를 운영해 왔다는 사실이야말로 시의 존재방식에 관해 많은 사실을 말해줄 뿐 아니라, 또한 그것은 조병화 시학을 살핌에 있어 가장 빠른 길이라 생각되는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약간 비약일지 모르나, 우리는 이 점을 한국근대시사의 측면에서 살펴보아도 좋으리라 믿는다.

조병화의 시가 모더니즘의 세계를 받으며 출발했지만, 시인 자신의 기질로 돌아갔다는 이런 지적은, 김윤식 교수에 의하면, 한마디로 ‘시와 시인의 비분리’라는 개념과 관계된다. 시와 시인이 분리된다는 입장이 모더니즘을 지향한다면, 시와 시인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입장은 이념을 지향하되, 그 이념의 지상적 실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비극적 황홀에 좌초한다. 쉽게 말해서 전자가 형식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내용을 강조한다. 또한 전자가 체계적인 시론과 방법론을 추구한다면, 후자는 그런 이론적 체계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조병화의 경우가 그렇다. 그에게는 여러 편의 시론이 있지만, 대체로 그의 시에 대한 주관적인 성찰들로 일관된다. 이런 특성은 시론 〈나의 시론, 나의 스타일〉(1979)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이 글에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시의 정의문제, 시에 대한 그의 입장, 그의 시적 주제, 언어관 등 크게 네 가지이다.
첫째로 조병화는 시에 대한 정의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에 동의한다. 이런 입장은 그가 ‘시의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는 엘리어트의 말을 인용하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시를 정의하기 어려운 까닭은 시에 대한 정의가 시대나 공간적 특성에 따라 다르고, 또한 시인들이나 이론가들마다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시를 한다로 정의하기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그렇긴 해도 시인들은 저마다 시에 대한 나름대로의 입장은 있게 마련이다. 입장이라는 말이 거슬린다면 시에 대한 태도라고 해도 된다. 조병화의 입장은 어떤 것일까. 그의 경우 시는 ‘유일한 위안이며, 도피이며, 증언이며, 호흡이며, 그 강한 혼자를 사는 종교’로 인식된다. 줄여 말하면 그의 경우 시는 고독한 종교에 해당된다. 이런 발언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실존의식이다. 실존의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후썰과 하이데거가 말하는 이른바 현존재 Dasein 에 대한 관심이 아니겠는가. 현존재란 존재의 무근거성을 강조하면서, 시간의 논리에 따르면, 미래를 강조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미래는 죽음에 대한 의식을 동반한다. 따라서 현존재는 미래를 先取하는 삶. 말하자면 죽음과의 대면 속에서 자아의 진정한 삶을 추구한다. 뒤에 가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조병화가 그의 시적 주제로 죽음과 시간의 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이런 사정을 동기로 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우리시의 50년대적 특성, 흔히 지적되는 전후의 실존의식에 뿌리를 둔 시인이다. 실존이란 칸트가 말하는 물자체와, 많은 관념론자들이 주장하는 본질개념을 부정한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둘째로 그는 이런 의식을 토대로 좀더 구체적으로 시에 대한 그의 입장을 정리한다. 그가 옹호하는 시, 그가 지향하는 시는 그가 어떤 시들을 비판하는 가에 따라 상대적으로 명료해진다. 그가 거부하고 비판하는 시는

ⅰ) 의미(뜻)가 없는 시
ⅱ) 감동·감격이 없는 시
ⅲ) 즐거움이 없는 시
ⅳ) 새로움을 주지 않는 시
ⅴ) 리듬이 없는 시
ⅵ) 무리하게 엮어 내린 시
ⅶ) 우리들의 생존에 관계가 없는 시
ⅷ) 나의 마음을 풀어주지 않는 시
Ⅸ) 아름다움을 지니지 못한 시

이다. 이상 아홉가지 유형의 시는, 그에 의하면, 시의 본질에 위배되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된다. 시의 본질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선험적 순수시론을 주장했던 조지훈과 비슷한 시적 태도를 보여준다. 조지훈이 그의 시론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경향파의 시와 모더니스트의 시였다. 조병화 역시 조지훈과 유사한 입장을 나타낸다. 이런 사정은 그가 ‘건조한 다다이즘의 유역에서 허덕이는 시나 아름다운 이미지가 흐르지 않는 쉬르리얼리즘의 유역에서 언어의 시체로 나뒹굴어 있는 시나, 지식이 부족한 판단으로 엮어 내린 모더니즘의 유역에 시들어 있는’ 시를 외면한다는 말이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가 지향하는 것은 ‘보다 높은 현대시’이다. 한마디로 그는 모더니즘의 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주면서, 그의 말에 의하면, 보다 현대적인 시를 지향한다.
그가 비판하는 시의 항목들 가운데 특히 ⅰ) ⅴ) ⅵ) ⅸ) 등은 모더니즘과 관계된다. 이상의 항목들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그가 김춘수의 무의미시론이나 이미지즘의 시, 지적인 시를 비판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비판은 논리적 체계를 결여함으로써 주관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보다 높은 현대시’에 대한 이론적 검토가 없고, 그런 시와 모더니즘의 관계에 대한 객관적 검토가 생략되고 있다. 다만 그의 경우 시는 언어의 미학, 이미지의 창조, 언어예술의 조각같은 이론을 초월하는 ‘생존의 실감’, 그의 표현에 의하면 ‘철학’으로 인식된다. 앞에서 김윤식 교수는 조병화의 시세계가 보여주는 특성에 대해 말하면서 이른바 ‘시와 시인의 비분리’라는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이런 개념을 지향할 때 시는 시인의 인생실천이 되기 때문에 방법론은 잠재적인 양상을 띤다. 김윤식 교수는 이 방법론적 자각, 제작정신이 결여되거나 잠재되는 경우 ‘근대성’을 문제삼기 어렵다고 말한다. 조병화의 시론이 제기하는 것은 이런 의미로서의 근대성 혹은 현대성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세째로 그가 시에서 관심을 두는 주제는 시간과 죽음으로 요약된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사건이 계기적 질서에 따라 발생한다는 관념을 기본으로 하는 인식의 한가지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흔히 그것은 과거→현재→미래의 방향을 취한다. 따라서 인간의 삶 역시 이런 질서를 따르게 마련이며, 그것은 좀더 부인하면 탄생→생존→죽음의 방향을 취한다. 그러나 이런 시간개념은 고대부터 해결될 수 없는 시비거리를 제공한 바 있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 시대만 하더라라도 이런 시간개념 속에서 변화와 생성을 주장하는 헤라클리투스의 견해와, 반대로 그런 변화나 생성은 비합리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파르메니데스의 견해가 대립된다. 말하자면 변화/영원, 생성/불변의 개념이 나타나고, 이런 대립개념들은 시인들의 경우에도 풀기 어려운 시간개념의 딜레마로 수용된다. 조병화의 경우 시간은 ‘생명의 한계’를 뜻한다. 쉽게 말하면 우리의 삶은 시간의 한계 속에서 운영된다. 따라서 죽음은 생명의 한계라는 숙명의 종말을 뜻하고, 사랑은 그런 한계 속에서 영위되는 동반의 우정을 뜻한다. 그의 경우 이런 시간인식이 계기가 되어 시는 ‘사는 시’와 ‘떠나는 시=죽는 시’로 나뉘어 진다. 전자는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를, 후자는 어떻게 죽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한다. 결국 그의 시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기본적인 주제로 한다. 나는 앞에서 이런 시간인식을 실존의식과 관련시킨 바 있거니와, 결국 그가 자신의 시를 철학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런 의식이 시의 미학을 앞서기 때문이다. 그는 미학 대신 철학을 강조하고, 시의 형식 대신 내용을 강조한다. 죽음의 주제는 하이데거가 주장하듯이 ‘본래적인 존재의 실존론적 투기’라는 내용을 거느린다. 말을 바꾸면 죽음은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을 입증한다. 죽음에 관련되는 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의 말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문제가 된 죽음에 관련되는 존재는 분명히 죽음의 현실화를 지향해서 배려적으로 관심하면서 노리고 있다는 성격을 가질 수 없다. 첫째로 죽음은 가능적인 것이기는하나, 그 어떤 가능적인 도구적 존재일 수도, 또는 사물적 도구일 수도 없고, 현존재의 하나의 존재가능성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둘째로 이 가능적인 것의 현실화를 배려적으로 관심한다는 것은 바로 落命의 초래를 의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현존재는 죽음으로 실존하면서 단련되는 그 어떤 존재, 바로 그같은 존재를 위한 기반을 스스로 제거해버리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에 관련되는 존재에 의해 죽음의 ‘현실화’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면, 죽음에 관련되는 존재는 그 가능성에 있어서의 종말 곁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할 수 없다. 그같은 태도는 ‘죽음을 생각한다’고 할 경우에는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인용이 다소 길어진 감이 없지 않지만, 요컨대 하이데거의 경우, 죽음의식은 어떤 도구적 존재도 사물적 존재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낙명, 곧 현실적인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런 죽음의식은 비도피성과 비은폐성을 지향하고, 그것은 죽음을 先取하는 삶을 지향한다. 조병화의 경우 죽음은, 철학의 논리에 따르면, 이런 의미에 접근한다. 그러나 비은폐성의 문제, 이른바 開示性의 문제에 대한 언급은 없다.
끝으로 그는 지혜로 빚어지는 다정한 언어들을 탐색한다. 그런 언어는 항거보다 순응을, 고발보다 순화를, 참여보다 독백을, 단정보다 회의를, 도식적 언어보다 市井人의 언어를, 논리보다 자연의 언어를, 남들보다 나의 언어를 지향한다. 한마디로 그가 추구하는 언어는, 유종호 교수가 지적하듯이, 말하듯이 쓰련다는 자세로 요약된다. 유종호 교수에 의하면 조병화의 시적 노력의 한 중요한 특성은 그가 말하듯이 쓰련다는 자세로 일관해 왔다는 점이다. 또한 이것은 그가 산문을 지향한 것이 아니고 자연스러움의 경지를 자기계율로 삼아 왔음을 의미한다. 말하듯이 쓴다는 태도는 우리 현대시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문제점을 제기한다. 또한 이런 태도는 시적 공간과 일상적 공간의 동일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의 시적 특성인 이른바 시와 시인의 비분리성 개념과 관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