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와 시의 독자들
최 동 호 (시인■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1. 현실에서 가상으로 리얼리즘이 지배하던 세계에서 머지않아 다가올 사이버 현실은 사람들에게 공허한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사이버 세계가 실재 현실보다 더 리얼하게 느껴지는 현실에서 실재 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어쩌면 전시대의 향수를 고백하는 최고조가 되기 쉽다. 혹자의 눈에는 지나치게 많은 시와 소설이 잡지에 발표될 뿐 아니라 수많은 단행본들이 출판된다고 비판당할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문학 종사자들이 느끼는 것은 독자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는가라고 당혹감을 느낄 만큼 독자 또는 수요자의 부재이다. 오늘의 현실을 20■30년 전이나 10년 전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인터넷에 의해 확산된 디지털 세상은 이제 어느 누구나 일부 집단의 독점물이 아니라 만인의 공유물이기 때문이다. 인터넷혁명은 산업혁명이나 그 이전 어떤 문화적 혁명보다 강력하고 절대적인 혁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산업혁명이 활자문화시대의 지식보급을 확대시켰다면 인터넷혁명은 전파문화시대의 기술정보의 가속화를 무한대로 혁신시켰다고 할 것이다. 전파문화가 활자문화 위에 성립한다고 하더라도 전파문화의 급속한 성장과 보급은 활자문화시대의 지식과 교양을 타파하는 새로운 신세대 즉 2030세대 문화를 범세계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확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초 애국계몽운동의 시대를 21세기 기술정보의 혁신과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새 세상을 맞이한 것이다. 시나 소설을 읽을 시간도 자신의 인격을 성숙시킬 시간의 여유도 없을 만큼 급박하게 달라지는 세상에서 왜 시를 읽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고집이라고 한들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가볍고 얇고 발빠르게 움직이는 세상에서 소설은 물론 시도 읽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많던 독자는 정말 다 어디로 갔다는 말일까. 그들은 모두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로 떠나간 신감각의 새로운 종족일 것이다.
2. 디지털 시대와 시의 존재 방식 최근 학교의 ■문학의 이해■ 수업시간에 필자는 두 가지 새로운 경험을 했다. 박목월의 시 ■청(靑)노루■를 다루면서 우선 전혀 다른 이질적인 반응에 놀라게 되었다. 리얼리즘 문학론이 붕괴되고 해체시와 정신주의가 충돌하던 90년대 초반에 이 시에 대해 학생들은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세계가 이미 자신들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이 시에 그들은 전혀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박목월이 그리던 자연은 이미 파괴되어버렸고, 있지도 않은 현실을 그린 시에 어떻게 시적 공감을 느낄 수 있겠느냐는 것이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머언 산 靑雲寺 낡은 기와집 山은 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구비를 靑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 박목월, ■청노루■ 전문 60년대 이후 회화적인 구도를 가진 자연시의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로 거론되어온 박목월의 ■청노루■가 젊은 세대들에게 이처럼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을 보고 필자는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젊은 학생들에게 유행하던 시들은 현실에 대한 풍자나 야유이거나 기성의 작품을 모방하는 패러디적 작품들이었다. 물론 많은 시인들에 의해 전통적인 서정시가 쓰여지고 있었지만 그런 류의 시들은 젊은 세대의 새로운 감각을 반영하지 못하는 낡은 작품으로 치부되는 듯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오늘의 학생들에게 박목월의 ■청노루■를 다시 읽혀보고, 종전과 유사한 반응을 기대했었는데, 의외로 2000년대 초의 학생들은 이 시에서 그들 나름의 시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고 답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더 크게 부정될 줄 알았던 것과 정반대의 반응에서 필자는 일단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최근의 학생들이 이 작품에 공감을 보인 것은 이미 ■청노루■의 자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감각이었다.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에서 흥미를 느끼는 그들이 ■청노루■정도의 표현에 괴리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것은 그만큼 인터넷의 가상현실 속에서 그들의 삶이 영위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활자문화 세대들의 종이책 독자들이(다른 의미에서 구매자들이) 모두 전파문화의 사이버 세계로 들어가버린 것이라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디지털적 코드가 컴퓨터화면이나 영상적 자막에서 구현하고 있는 세계는 활자문화가 요구하는 읽고 사색하는 노력을 강탈해갔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매력적이고 화려한 것인가를 인정한다면 더 이상 독자들에게 책읽기를 요구하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오늘날 2030세대를 길들이고 있는 것은 기술정보이며 컴퓨터 자판이지 백지의 여백에서 살아 움직이는 활자문화의 인문적 교양의 코드가 아니다. 디지털적 상황에서 시의 존재방식을 필자는 ■디지털 문화와 생태시학■(문학동네, 2000. 9.)에서 다음 세 가지로 전망한 바 있다. 첫째, 거대패러다임으로 대중들의 의식을 통합하고 지배하는 시적 사고는 분화되고 모든 시적 운동들은 소집단화할 것이다. 잘게 분화되어 때로는 작은 취미그룹으로 세분될 것이다. 유사한 기질과 취향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동질감을 공유하며 자기의 삶을 시로 표현하는 즐거움을 통해 자기존재를 확인하고자 할 것이다. 둘째, 출판매체가 활자문화에서 전파문화로 뒤바뀔 것이며, 새로운 기술개발에 의한 매체들을 적절히 사용할 때 그들에게 공감하고 동참하는 사람들의 호응도 커질 것이다. 시를 주도하는 집단이나 이데올로기는 분화되겠지만, 시라는 예술양식은 시와 노래, 춤은 물론 다양한 매체를 종합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것이다. 셋째, 레고 게임과 같은 조립과 해체의 놀이 문화가 일부에서 퍼져나가 있지만 시의 경향은 명상과 관조를 통해 자기 존재를 예술적으로 드높이려는 쪽으로 전개될 것이며, 이러한 방향이 적절치 않을 때 많은 시들은 왜곡되고 불구화될 것이다. 특히 명상과 사색의 시편들을 음악에 실어 노래로 유행시킬 수 있는 음유시인들이 등장할 것이며, 그들은 아탈리(J. Atali)의 표현대로 유목 문화의 대변자가 될 것이다. 디지털적 상황에서 이러한 시의 세 가지 존재방식들은 아직도 거대담론이 완강하게 지배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윤곽이 크게 달라졌다고 보지는 않는다. 문화가 지닌 첨단성과 보수성으로 인해 아직도 상당 부분 20세기적 요소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지만, 머지 않은 장래에 시와 소설은 물론 모든 예술의 존재방식은 필연적으로 격변을 겪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거대담론이 낡은 영향력을 오래 유지하려고 할수록 그 기반이 되는 독자들은 모래사장에서 물이 빠져나가듯 급격히 사라져 갈 것이다. 특히 한국인들의 문화적 첨단성은 우리로 하여금 2002년 6월의 월드컵 신화를 경험하게 했고, 2002년 12월의 대선에서도 인터넷 세대의 열망이 선거의 판세를 좌우했음을 우리 스스로 목격한 바 있다. 이후 20, 30세대와 50, 60세대의 깊은 단절감은 기성세대들에게 정서적 공황감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세계사적 전쟁의 징후가 엄습하는 국제적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암중모색의 혼란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것이다. 식민지 해방이나 마르크시즘적 사회혁명이 20세기에 뚜렷하게 각인될 수 있었던 것은 유토피아를 동경하는 인류의 공동체적 환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유토피아가 가상 현실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때 가상과 현실은 뒤바뀌고 현실보다는 가상에 몰입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시의 독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가상의 현실 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닐까. 보이지 않는 블랙홀 속에 나날의 기쁨에 탐닉하는 것이 오늘의 문학 수요자들인지도 모른다. 활자문화가 열어준 상상의 공간을 종이책이 아니라 전자책을 매개로 마음껏 탐닉할 수 있는 것이 오늘의 독자들이다. 그들에게 꿈에서 깨어나라고 말하는 문학의 생산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저자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출판업자들이 명분 삼아 내세우는 구투의 상술을 코웃음칠 것이다.
3. 시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 최근 거의 모든 국문과 대학원생들의 전공은 소설에 압도적으로 기울어져 있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대략 9 : 1이나 8 : 2 정도로 소설 전공자들이 대학원을 메우고 있다. 시에 비해 소설 전공자들의 진로가 그렇게 밝기 때문은 아니다. 시 전공자가 많았던 80년대와 비교해 보면 놀라운 역전이다.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하려는 학생들의 흥미가 이렇게 소설에 기울은 것은 영화나 애니메이션 게임에서 요구되는 서사적 구성이 그들의 관심을 끌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두 훌륭한 작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 대하소설이나 SF소설을 제외하면 창작소설이 잘 팔리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대학에서도 유능한 소설 이론의 전공자를 구하기보다는 지명도 높은 작가를 찾는 상황에서 그들의 진로가 결코 밝은 것도 아니다. 학부에서 ■시 창작■ 수업시간에도 수강생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 처음에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지녔던 약간의 호기심 때문에 청강을 시작한 학생들도 한 달 이상을 버텨내는 경우가 많지 않다. 문예창작과의 창설이 한 때 유행이었지만 상당한 문학수업을 거쳐 문예창작과를 졸업해도 유명 시인이나 작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많은 학생들이 자주 전공을 바꾸기도 한다. 한 편의 시나 소설을 쓰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동시에 한 편의 시나 소설을 읽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학생들에게 왜 시를 쓰기가 어려운가라고 질문하면 그들은 시를 쓸 것이 없다고 한다. 시를 쓸 수 있는 체험이 결여된 탓이다. 체험 없는 소설은 SF적 상상력 주변을 배회하게 되겠지만, 체험 없는 시는 증류수와 같은 언어를 조작하거나 할 것이다. 괴테는 어디선가 “빵 한 조각을 가지고 울면서 밤을 새워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 아파트에서 지하철과 컴퓨터로 이어지는 생활에서 무슨 시가 나올 수 있겠는가. 시가 나올 수 없는 생활이 젊은 세대의 대다수에게 통용된다면 그들은 시를 읽을 마음도 가지기 힘들 수밖에 없다. 나날이 혁신되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자기 복제를 뒤쫓기에도 바쁠 것이다. 모두가 숨돌릴 사이 없이 바쁘다고 하지만, 왜 그러한가 생각해 보면, 자기라는 존재가 현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상 공간을 부유하듯 떠돌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만화경적 상황을 고려할 때 과연 시가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필자 나름으로 판단해 보면 거기에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디지털 시대의 여러 매체들을 종합적으로 사용 가능한 것이 시의 쟝르적 특징이고, 이를 살려 시와 음악, 시와 무용, 시의 연구 등이 결합하는 방식이다. 그 중에서도 시와 음악 즉 시와 노래의 결합은 우선적으로 가능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시와 노래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었다. ‘시가(詩歌)’에서 시(詩)와 가(歌)가 분리된 것이다. 디지털 시대는 중심이 없고 높낮이가 없는 동시다발적인 것이 특징이다. 앞에서 디지털 시대의 유목민을 대변하는 음유시인의 도래를 논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선이 무너진 상황에서 활자문화시대의 엘리트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독단적이고 폐쇄적인 발상일 뿐이다. 디지털 시대를 대변하는 음유시인이 출현한다면 대중적 관심은 그 어느 시대보다 폭발적인 것이 될 것이다.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김소월이 민요시인으로 불리우면서(본인은 그 명칭을 거부했다고 하더라도) 한국인의 20세기적 정서를 대변하는 시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김소월과 대극점에 이상의 시가 있고, 김수영이나 김춘수 같은 시인은 관념의 세계를 파고들어 그 나름의 시적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앞으로 노래와 결합되지 않는 시는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 예견된다. 신경림이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된 것(■동아일보■, 2003. 2. 2)은 그의 민요 찾기 운동이 밑거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정지용이 오늘의 독자들에게 기억되는 것은 노래로 불리워지는 ■향수■와 ■고향■과 같은 시편들 때문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칼하다. 저항운동의 시대가 지나간 다음 이육사나 윤동주의 시가 서서히 독자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살펴보아야 할 사항이다. 김소월에서 신경림으로 이어지는 노래시의 전통이 우리 시의 중요한 흐름을 되살리고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어느 시대에서나 진정 잘된 시에서 적절한 음악의 형식은 발견되어야 한다”는 김우창의 지적(■시의 리듬에 대하여■, ■세계의문학■, 1999, 봄호)은 좀더 깊이 음미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민족적 공동체의 열망을 되살리고 이의 지향점을 제시하는 길이다. 이는 20세기의 리얼리즘적 가치지향을 일부 이어받기도 하지만 또한 이를 부정하고 한 단계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어야 할 사항이다. 오늘날 시의 부재는 예민한 감각은 살아 있지만, 시적 방향이 제대로 가늠되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있어서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정립된 것이 없다. 독재권력의 타도라는 눈에 보이는 적이 제거된 다음 타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이 때 뼈아픈 자기부정을 치루어내야 한다. 세계사의 중심은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태평양에서 동아시아로 거대한 변전을 거듭하고 있다. 한국이 동북아시아에 중심점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한 때 우리는 또 다시 20세기적 굴욕을 감내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의 힘 겨루기는 이라크에서 북한에서 첨예하게 나타나고 있다. 국민국가에서 민족 국가로의 전환은 세계화 대 지역주의의 대결처럼 헤게모니 쟁탈의 양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쟁점들을 스포츠로 분출시켜 준 것이 월드컵이다. 시청 앞 광장에서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그리고 세계 각 곳에서 한민족은 20세기에 누적된 민족적 열등감의 찌꺼기를 떨쳐버리는 공동체적 환희를 체험한 바 있다. 단군이 개국하여 신시를 연 이후 한민족이 체험했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다. 그 체험은 시적인 엑스타시였다. 시가 할 수 없었던 그러나 시가 도달해야 되는 극치의 한 순간을 우리는 경험했던 것이다. 밀폐된 시 의식에 갇혀 정신분열증적 시가 거듭 복제되고 있다면, 시는 몇몇 정신불안 징후의 사람들의 자기 위안 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시가 민족 공동체적 열망을 분출하는 첨단에서 설 때 민중시대와는 전혀 다른 디지털 시대의 선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30세대를 체험이 결여된 세대라고 단언할 수 없다. 월드컵에서 ‘꿈은 이루어진다’는 아젠다를 내걸고 이를 성취시킨 것은 그들이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민족의 꿈을 성취시킬 수 있는 세대일지도 모른다. 월드컵 경기장을 가득 메운 붉은 깃발의 환호성에서 5060세대는 가슴이 철렁하는 아니면 모종의 불안감에 바둥거려야 하는 레드콤플렉스를 느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무모하다고 할 만큼 그런 감정의 찌꺼기가 없다. 그런 까닭에 진취적이지만 불안정해 보이기도 한다. 그들이 갖고 있는 자신감은 5060세대의 참담한 자기 희생으로부터 솟아나온 것이다. 디지털 시대는 5060세대의 체험으로 헤쳐나가기에는 전혀 이질적인 세계이다. 한국적 사고의 중심축에는 5060세대의 체험이 깊게 자리잡고 있지만 디지털 시대의 첨단적인 도전은 2030세대의 무모한(?) 자신감이 필수적 추동력이다. 그들이 앞선 세대의 체험을 추종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만의 잘못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활자문화와 전파문화 사이의 커다란 단절이 어쩌면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더 큰 도약대가 될 수도 있다. 정치적으로 아직도 후진적이라고는 하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한국이 기술정보산업의 세계 최첨단에 서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우리 스스로를 놀라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는 서구의 근대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근대의 초극을 보여 주는 한국만의 독특한 사례일 것이다. 1930년대 이상(李箱)은 근대 산업사회의 산물인 유리거울 앞에서 분열된 자아를 발견했다. 21세기초 한국의 젊은 세대는 한국에서 생산된 세계 최첨단 LCD판 앞에서 사이버세계의 화려한 불꽃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녹슨 구리거울 속에서 참회록을 써야 했던 것이 식민지 시대의 윤동주(尹東柱)였다면, 초대형 LCD판 앞에서 현실보다 더 가혹한 현실의 섬광을 홀린 듯한 눈으로 멍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오늘의 2030세대인 것이다.
4. 기계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디지털 기술은 모든 예술로부터 예술적인 것의 아우라를 빼앗아 갔다. 원본보다 더 생생한 원본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에서 논한 복제품과 원본 사이의 거리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2002년 말 한 종교집단은 인간 복제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아직 그 과학적 검증이 공인되지는 않았지만, 인간 복제의 시대가 현실로 눈앞에 다가온 것만은 사실이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를 지배해 온 것은 인간 존재의 유일 절대성에 기반한 것이었다. 종교와 예술과 문화의 역사가 이를 전제로 성립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인류사가 부정되거나 새롭게 씌어져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인간의 삶이 역사에 기록되고 종이책에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가상의 공간에 저장되고 가상의 공간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시대에 종이책에 기록된 시와 소설을 읽는 고루한 독자들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머지않아 사이보그 인간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기술정보를 장악한 몇몇의 인간들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나 예술의 존재는 인간이 인간이기를 원할 때 존재하는 것이다. 얼마 전 필자와의 한 대담에서 황동규는 “시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준다”(■자기 갱신의 시인■, ■서정시학■, 2002년 여름)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인간이란 긍정적인 면도 포함되지만 부정적인 온갖 요소도 포함된 존재이다. 예술은 부정적 탐욕적 인간에게 욕망의 긍정적 자기갱신의 계기를 만들어 준다. 인간이란 지고지선의 존재가 아니다. 지고지선을 동경하고 지향하지만 추악한 충동에 더 휩쓸리기 쉬운 존재가 인간이다. 시나 예술이 탐욕적 충동에서 인간을 구원할 때 인류사의 미래도 존재할 것이다. 한민족이 지닌 열정의 폭발이 예술적으로 승화될 때 거칠고 조야한 삶은 순치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야성적 추동력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 확인과 자기 갱신이 없는 일방적 전진은 그 속도감만큼 위험성을 내포한다. 단거리 질주자처럼 질주해 온 한국 경제가 성수대교와 같이 한순간에 무너질 위험이 있거나 기술정보산업의 강국이라 자부하던 한국이 컴퓨터 바이러스의 침입에 무방비 상태라는 것은 이러한 속도전의 취약점을 극명하게 드러낸 예가 될 것이다. 독서 행위는 이러한 속도감으로부터 일탈적 행동이거나 침잠의 여유를 가져다 준다. 1980년대의 시는 사회적 추동의 최첨단에 서 있었다. 지금 기술정보사회에서 사회적 첨단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 끝에 있고, 그것을 작동하는 프로그래머의 머리 속의 연상 작용에 있다. 그러나 시를 읽고 시를 쓰는 마음이 없다면 그러한 속도전은 기계적 인간을 산출하게 될 것이다. 시를 읽는 시간은 인간의 정서적 결핍을 충족시켜 주고, 자신의 삶에 풍요로움을 되살려 줄 것이다. 테크노피아의 사막에서 과연 인간적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라고 사이버 세계로 사라진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다. 디지털 시대를 뒤쫓는 말단의 소비자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 창출의 소프트웨어의 운용자는 풍요로운 인간성에서 비롯되는 자기 성찰의 존재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디지털적인 속도전에 대다수가 몰려가고 있을 때 필자가 떠올려 보는 것은 “아마 朝鮮文壇 전체로도 이대로 3年이면 3年을 나는 것보다는 지금의 작품만 가지고라도 3年 동안 推敲를 해 놓는다면 그냥 나간 3年보다 훨씬 水準 높은 文壇이 될 것이다”라는 1930년대 이태준(李泰俊)이 그의 ■무서록(無序錄)■(1940)에서 한 발언이다. ‘날림’공사는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을 것 같고, 오늘의 처지는 더욱 날림을 성행하게 하는 것 같다. 밀려드는 청탁서 때문에 쉴새없이 써내는 유망한 젊은 시인들에게 그리고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는 마비된 손을 기지고 스크린만 쳐다보는 매니아들에게 이태준의 이 발언을 되새겨 보라고 말하고 싶다. 사이버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 다시는 되돌아 나올 수 없는 사이버 중독자들은 더할 나위가 없다. 끝내 발딛을 현실을 갖지 못하게 되는 컴퓨터 중독이 때로는 마약중독보다 더 심각하다고 경고하는 것은 지나친 기우가 아닐 것이다. 모두가 자기들의 주장만 떠들어대는 세상이란 필경 들뜨고 중독된 얼치기 세상임에 분명하다. 시나 소설이 그리고 다른 여타의 예술들이 이러한 중독의 치료제나 완충제가 되지 못한다면, 디지털 유토피아는 그 끔찍한 얼굴로 인해 대면하는 순간 그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쳐 20세기나 그 이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가혹한 신세계가 될 것이다. 물질의 풍요를 향해 치달리는 디지털적 속도전이 인간을 인간으로서 온전히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