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들

우리 숨결을 옮겨놓은 시를 / 이근배(시인)

능선 정동윤 2011. 9. 20. 00:37

우리 숨결을 옮겨놓은 시를 / 이근배(시인)



제가 시 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일, 제가 읽은 좋은 시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시 읽기란 무엇인가는 저보다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동물하고는 다르다는 것, 일반적인 목석이나 자연 식물과 다른 것은 인간이 영혼을 가진 동물이라는 것이지요. 영혼이라는 말로 포장할 수 있습니다만, 그 안에는 감정이나 정신이라든가 정서, 생각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구별되는 것들이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다른 말을 빌어 표현한다면 시심(詩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심은 시를 쓰는 분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밭을 가는 농부에게도 있고 빨래하는 아낙네나 공장에서 용광로에 쇳물을 끓여 붓는 이들에게도 시심은 있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일상 생활을 해 나가면서 그 시심이 나의 삶 속에서 어떻게 표출되느냐 하는 데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시를 쓰고 시를 생활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가령 여러분들이 입고 있는 이 의상 속에서도 미술이 있고, 또 젊은이들이 무대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데, 끝없이 우리 생활 속에 음악이 있고 노래가 들어 있습니다. 음악뿐 아니라 모든 예술 분야가 우리 삶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를 알게 모르게 생활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다만 생활하면서 시를 즐기는, 즉 의도적으로 시집을 사서 읽고 외우고 하는 층이 있고, 조금 더 나아가서 시를 창작하는 분들이 있고, 또 더 나아가서는 시를 직업적으로 생산해내는 분들이 있을 뿐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 시를 생활화하고 시를 쓰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민족은 아주 고대로부터 시를 생활화해 왔고 또 시 짓기를 잘하는 민족입니다. 우리 민족이 시를 쓰는 민족이라는 걸 가리켜 저는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민족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시인이 될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다고요.

몇 해 전에 제가 중국 연변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세미나장에서 우리 조선족 출신 연변대학 교수 한 분이 주제 발표를 하면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조선족은 누구나 다 시의 천재적 기질을 가지고 있다."
저는 저 나름대로 우리 민족은 누구나 다 시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왔는데, 그분은 한술 더 떠서 시의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증거로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습니다만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여서 시인, 작가를 비롯한 문학인들은 중국 정부로부터 공무원처럼 급료를 월급으로 받습니다. 오늘날 중국에서 정부로부터 급료를 받는 시인 작가 직함을 가진 사람들이 오천 명 가량 있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조선족이 오백여 명으로 십분의 일 정도 된답니다. 중국의 전체 인구는 14억이고 조선족은 중국 전체에서 2백만 명을 헤아립니다. 인구 비례로만 따진다면 적어도 오백 명의 작가를 배출하려면 적어도 한 1억 4천만쯤 있어야 되는데, 불과 2백만 명의 조선족이 14억 전체 인구가 배출한 작가의 십분의 일이나 되는 문학가들을 낳았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5백 명뿐이겠습니까. 다른 분들도 시적 문학적 자질을 갖고 있습니다만 농사도 지어야 되고, 공장에서 일도 해야 되는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탓에 시를 안 쓰고 있달 뿐이지 누구나 다 시를 쓸 수 있고 문학을 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옛날에 서당에 가서 서너 살쯤 되어 [천자문]만 떼기 시작하면 시 짓기부터 배웠지 않습니까. 그래서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로 우리 민족은 누구나 시를 곧잘 쓰고 사랑해 왔습니다.

우리 모두 핏속에는 시의 혼이 흐른다

사람에게는 영혼과 육신 두 가지가 공존합니다. [성서]에 이런 말이 있지요. "나에게 두 덩이의 빵이 있다면, 하나는 먹고 하나는 팔아서 꽃을 사리라." 여기서 빵은 육신의 양식이요, 꽃은 영혼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또 좋은 잠자리를 갖기 위해서 참 많은 일을 하고 많은 노력들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 육신의 편안함을 가져다주고 좋은 양식은 살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곧 영혼의 양식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꼭 문학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등 여러 가지 예술을 영혼의 양식으로 마련하는 것입니다.
시심이라는 것이 꼭 시만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시심이 있으니까 미술심도 있고 음악심도 있고 연극심도 있는 것은 아니고 그게 다 통틀어서 시심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영화나 연극을 보면서, 그 속에서 내가 주인공도 되어 보고 내가 아버지도 되어 보고 아들딸도 되어 보곤 합니다. 그런 보상 심리를 통해 사랑을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고, 이별도 해보는 것입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에 담겨 있는 시인의 마음을 내 것으로 삼는 것이 시 읽기 본래의 뜻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위안을 받고 마음의 평화를 받고, 공감하여 때로는 웃고 울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서도 시를 쉽게 접할 수 있고, 2, 3년 전부터 주요 일간지에서도 연재소설을 싣지 않는 대신 매일 시를 싣는 등 서점에 가지 않아도 쉽게 시를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렸을 때는 시집 한 권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가령 소월 시집 정도를 찾아볼 수 있을까 시집이라는 것이 서점에도 거의 없었고, 누구한테 빌려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시가 지하철역에도 있고 속된 말로 보고싶으면 얼마든지 공짜로 인터넷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되지 굳이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것에 우리가 의문을 품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사회적으로도 시 읽기에 대해서 많은 얘기들이 오가고 있고, 특히 초·중·고등학교 교과서, 대학교재 같은 데서는 명시들을 중심으로 다각도로 해석, 분석하는 글들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꼭 옳은 답인가 하는 것은 의문입니다. 실제로 대입 수능시험에 출제된 시에 관한 문제에 따라 제시된 답이 정답인가 하는 것은 누구도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일찍이 T. S. 엘리어트는 "시 해석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고 갈파한 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해석을 하더라도, 심지어는 작자 자신이 "이것은 뭐다"라고 말했다 해도 불변의 정답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일단 그것은 언어라는 기호로 표현을 했을 때, 받아들이는 사람이 각자 지닌 언어의 스펙트럼에 의해서 여러 가지의 얼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낱말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이런 얼굴도 있고 저런 얼굴도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를 생산할 때 이미 같은 사물이라고 하더라도, 즉 장미꽃 한 송이를 본다고 하더라도 보는 사람이 여기 있는 여러분이 백 명쯤 된다고 하면 백 명의 사람이 장미를 보았을 때 각각 느끼는 생각, 거기서 받아들이는 감정들은 동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제3자가 정확히 집어낼 수 있겠습니까.
김시습이라는 천재가 있었습니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밀어내고 왕에 앉았을 때 글을 그만 읽겠다고 삼각산에서 글을 읽다가 책을 불에다 태웠다는 말도 있고, 또 똥통에 절였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천하를 떠돌면서 시를 쓴 아주 천재입니다. 다섯 살 때 이미 {사서삼경}을 마스터하고 세종대왕이 특별히 비단도 내렸다는 전설적인 인물이 김시습입니다. 이분이 돌아가신 지 89년 뒤인 선조 임금 당시, 최대의 등용문인 과거에 율곡 이이는 장원급제를 아홉 번이나 했습니다. 그래서 해동공자라고도 하고 대학자이고 대문장가인 율곡 이이에게 {김시습전}을 쓰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래서 김시습이 작고한 지 89년 뒤에 율곡 이이가 김시습전을 썼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매월당의 시는 귀신이 부르고 대답하는 것 같고, 산 속에도 숨어 있고, 바다에도 들어 있고 해서, 글자를 아로새기는 자들이 넘겨다볼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공부해야 할 점입니다. 율곡 같은 대문장가도 89년 전에 돌아가신 김시습을 시를 가지고 찬탄을 한 것이 있습니다. 아주 시를 잘 쓰는 분들이, 위대한 시인들이 쓴 그 시대의 언어들이 있습니다. "시인은 그 자신을 씀으로 해서 시대를 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그분들이 어떤 생각, 어떤 시대, 어떤 위치, 어떤 상황에서 그 시를 노래했는지 정확히 판별하지 않고 그것을 다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대한 시인들이 쓴 글은 율곡이 김시습의 시를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저 글자나 아로새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속에 있는 깊은 뜻을 어떻게 다 듣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의 시는 모국어로 되어 있습니다. 모국어는 어머니의 나라 말이라는 뜻인데 저는 이것을 줄여서 어머니의 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쓰는 말입니다만 내 나라라고 할 때는 "조국(祖國)"이라고 씁니다. 왜 내 나라라고 할 때는 조국이라는 할아버지 "조(祖)"자를 쓰는데, 굳이 내 나라 말이라고 할 때는 여성인 어머니 "모(母)"자를 쓰는가 하면, 조국이라고 하는 말속에는 아주 강한 우리의 줄기찬 역사가 있습니다. 단군 할아버지도 계시고 을지문덕, 연개소문, 이순신, 강감찬, 윤봉길 안중근 같은 분들의 이름이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우선 총칼과 창으로 나라를 지키는 드센, 뿐만 아니라 민족이 살자면 먹고살아야 합니다. 바다에 가서 고래도 잡고 논밭도 갈고 고구려 벽화에 보면 활로 호랑이를 사냥도 하고 이렇게 농경사회에서 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다 남성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지키고 생활을 일구어 온 조국의 역사를 이끌어온 힘을 조국이라고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 나라 말이라고 할 때 모국어라고 어머니 모자를 쓰는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말을 배우는 것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에게서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어머니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바로 모국어가 아닙니까. 어머니라고 하는 말속에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 젖줄, 부드러움, 눈물 등이 복합적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그 따뜻하고 부드럽고 한 그런 언어들이 어머니의 말입니다. 또 하나는 모국어라고 하는 까닭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충청도 당진에서 할아버지 품에서 자랐습니다. 할아버지는 말을 별로 만들어 쓰시는 분이 아닙니다. 진술적인 말인 밥먹어라 어디 갔다오라든지 딱딱한 말만 쓰시는데 우리 할머니는 아주 유난스럽게 말을 비틀어 쓰셨습니다. 그래서 곁말 쓰기를 많이 하시는데 우리가 쓰는 문학적인 언어들은 다 어머니들이 만든 언어였습니다. 남성들은 말을 잘 만들지 않는데 어머니들은 비틀기를 해서 곁말을 많이 씁니다. 그 예가 속담입니다. 남성적인 속담도 많습니다만 대개는 여성들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 "죽 쑤어서 개 좋은 일 시켰다", "누워서 떡 먹기, 바늘 가는 데 실 간다" 등의 상징적인 말을 쓰는 것은 어머니들입니다. 어머니들로부터 그런 말을 배운 것입니다.

어머니의 말은 풍성한 시의 원천

우리 나라의 시는 옛날 [찬기파랑가], [제망매가] 등의 [향가(鄕歌)]에서부터 고려 가요나 속요 등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손으로 이루어진 노래들이 많습니다.
병자호란 때 "가노라 삼각산아"를 쓴 김상헌의 형 김상인이 쓴 시조에 이런 게 있습니다. 그는 강화도로 피난차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모시고 갔는데, 오랑캐가 갑자기 쳐들어오는 통에 화약으로 폭사를 한 분입니다. 대단한 기상이 있는 남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그의 시조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임 사랑 거짓말이 님 날 사랑 거짓말이/꿈에 와 뵈온 말이 그 더욱 거짓말이/날같이 잠 아니오면 어느 꿈에 뵈오리"
시인 황동규는 이 시조를 가리켜 사랑시 가운데서 최고의 으뜸이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우리 나라 여류 시인들이 한때는 황진이 "동짓날 기나긴 밤에"를 으뜸으로 치다가, 김상인의 시조를 최고라고 견해를 수정하게 되었습니다. 언뜻 이 시조를 보면, 아녀자들이 안방에서나 할 소리지 오랑캐와 맞싸우다가 나라를 못 지킨 것이 한스러워 자결하고 만 헌헌장부가 쓴 글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따지고 보면 소월의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이며, 김영랑의 "나는 기두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또 만해 한용운의 절창들도 지극히 여성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조시대에 피비린내 나는 당파싸움의 와중에 서 있던 정철의 [사미인곡(思美人曲)]도 여성적인 정조에 바탕하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시에 한결같이 여성적인 정서가 넘치는 것은 어머니의 말을 갖고 쓰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헌헌장부라도 그가 쓰는 시는 여성적인 대목이 많습니다.

정몽주 선생은 다 알다시피 고려 오백 년 왕조를 한몸으로 지탱하려가 목숨을 던진 분입니다. 그분이 남긴 시조에서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

쳐 죽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고 노래했는데,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는 춘향이가 변학도 앞에서 해도 그만인 노래가 아닙니까. 다 이게 여성적입니다. "임"은 연모의 대상일 뿐 아니라 "나랏님"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우리 시가는 모두 여성적인 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에는 겉말과 속말이 있습니다. 중국 청나라의 문인 "원매(袁枚)"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언제언(言制言) 의제의(意制意) 경제경(景制景), 이것이 아니면 시는 납을 씹는 거와 같다." 즉 "말 밖의 말, 뜻 밖의 뜻, 풍경 밖의 풍경, 이런 것이 아니면 시는 납을 씹는 거와 같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시의 속내를 다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를 파고들어가고 그 몸 속으로 들어가 보면, 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지금 강남 성모병원에는 미당(未堂) 서정주 선생께서 누워 계시는데 저한테는 은사이십니다. 제가 그분께 처음으로 시를 배웠고, 1960년에 제가 처녀 시집을 낼 때 서문도 써주셨고, 세계여행 떠나실 때 동국대학교에서 그분이 하는 "시론(詩論)"을 제가 한 학기 동안 대강한 적이 있을 정도로 깊은 인연이 있는 어르신이십니다. 저는 학교 다닐 때 그분의 시집을 통째로 한 권을 외운 일이 있습니다. 1966년에 미당 서정주 선생님이 현대문학 5월호에 [동천(冬天)]이라는 시를 발표했습니다. 1936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이 되어서 시단에 나오셨으니 그로부터 만 30년 뒤의 일입니다. 오늘로부터 34년 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미당 선생의 시작 활동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절정기에 한 것입니다. 지금도 평론가들이 미당 서정주 선생의 시를 이야기 하려면 {동천}을 반드시 들춰냅니다. 며칠 전에도 제가 나가는 한 학교에서 젊은 시학 교수가 뭘 자꾸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동천}이라는 시를 놓고 중얼중얼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몇 줄 안 되는 걸 가지고 그러느냐고 제가 했습니다만 우선 {동천}을 가지고 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동천] 전문

이것은 7.5조입니다. 너무 시를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동천은 겨울 하늘인데 거기에 눈썹을 하나 심어놨다는 겁니다. "즈믄"이라는 것은 천인데 그냥 많다는 겁니다. 많은 밤의 꿈으로 그 눈썹을 씻고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동지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서 시늉하며 비끼어 간다고 노래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들 논의가 물끓듯 합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밝혔듯이 그 속내를 알면 간단합니다.
미당 선생은 어느 자리에선가 이렇게 글로 밝혔습니다. 질마재가 있는 고창의 수대동이 당신의 고향인데, 고향 마을에 살 때 열여섯 살쯤 되는 한 처녀의 눈썹이 유난히 좋았던 것 같습니다. 모시밭 사잇길로 물동이를 이고 지나가는 처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집 할머니가 자기 집에 들락날락 하는 것을 봤는데 아마 혼삿말이 오가는 것 같았답니다. 미당 선생이 고향을 떠나 대처로 나오는 통에 결국 혼인은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평생 미당 선생은 눈썹만 찾아다니는 겁니다. 1966년 현대문학 5월호에 {동천}을 썼는데, 같은 해 9월 29일자 중앙일보에 {추석}이라는 시를 발표합니다. 그것을 옮기면 이렇습니다.

대추 물들이던 햇볕에 눈 맞추어 두었던 눈썹
고향을 떠나올 때 꾸려 가지고 온 눈썹
열두 자루 빗은 날에 숨기어져 살던 눈썹
비수들 다 녹슬어
시궁창에 버리던 날
삼시 세 끼 굶던 날에
역력하던 너의 눈썹
안심찮아 먼 산 바위에 박아넣어 두었더니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추석이라 밝은 달아
먼 골방에서 한잠도 안 자고 앉았다가
그 눈썹 뽑아들고
기왓장 너머 오는고

신문사에서는 추석 이야기를 써달라고 청탁했는데, 미당은 "대추 물들이던 햇볕에 눈 맞추어 두었던 눈썹"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고향을 떠나올 때 꾸려 가지고 온 눈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미당의 [수대동시]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오기도 합니다. "속옷 초록 저고리 금녀 나와 둘이 있던 곳 / 머잖아 봄은 다시 오리니/ 금녀 동생 나는 얻으리 /눈썹이 검은 금녀 동생"이라고 노래했는데, 여기에도 "눈썹이 검은 금녀 동생"이 등장합니다.
미당은 어느 글에서 술회하기를 낙원동에 있는 밥집에 자주 들렀답니다. 선생은 밥집 여자의 손목 한번 잡아본 적이 없는데, 그 여자에게 예의 고운 눈썹이 있었답니다. 이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미당은 여자의 미를 고운 눈썹에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마음에 두는 것은 "눈썹"으로 되어 있다는 거죠. 또 [여행가]라는 시에서는 "어젯밤 내 꿈 속의 네 눈썹이 무거워/그걸로 여기 한 채의 절간을 지어두고 갔느냐"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미당에게는 눈썹이 모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동천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선 겨울 하늘에 눈썹 같은 달이 하나 떠 있었겠지요. 밝은 달을 보며 미당은,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겨 심어놨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새가 나는 걸 보면 마치 눈썹같이 날고 있었고, 반달도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간다고 노래한 겁니다. 그것만 가지고 무슨 뜻인가 하겠지만, 거기에는 미당 선생 개인의 눈썹에 대한 의지가 여러 가지로 환생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눈썹은 눈썹으로 있지 않고, 열두 자루 빗은 날에 숨기어져 살던 눈썹도 되고 삼시 세 때 굶던 날의 눈썹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그 시의 비밀을 알았을 때 [동천]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1964년에 박목월 선생이 {가정}이라는 시를 발표를 했습니다. 그 무렵에는 박목월 선생이 대학 교수도 하시고 유명한 시인으로 책도 많이 낼 무렵이었는데, {가정}을 읽고 시의 내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의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 구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최근 우리 사회에도 고개 숙인 아버지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이 시에 보면 시라는 것은 멀리서 가져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도 흔히 학생들에게 자기 자신을 움파는 일이다라고 말해 줍니다. 박목월 선생의 "가정"이라고 하는 말은 아홉 식구의 가장으로서 그 힘이 얼마나 드는지를, 십구문반의 신발에다 얹힌 것입니다. [가정]이라는 시에서 보면 박목월 선생의 십구문반의 신발은 짚신도 아니고, 구두도 아니고, 운동화도 아닌 그 시대 고무신의 단위입니다. 그 신발을 떠올리게 됩니다.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면,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로 시작하죠. 지구 위, 하늘 아래는 모두가 지상입니다. 이 지상에 아홉 켤레의 신발이 있습니까. 지금 같으면 60여 켤레의 신발이라고 해야 되는데, 그건 다 필요 없습니다. 박목월 시인의 어깨에는 오직 아홉 켤레의 신발만이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신발과 등가성을 갖는 무게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시는 멀리 있는 게 아닌 가까운 삶 속에

끼니때가 되면 온 가족이 다 모입니다. 알 전등이 켜질 무렵에야만 직장에 갔던, 학교에 갔던, 밖에 나갔던 온 가족이 모이는 그 때에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이 모이는 거죠. "내 신발은 19문 반 /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곁에 벗어놓으면 / 육문 삼의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하고 노래했는데, 가장인 박목월 선생에게 "눈과 얼음의 길"은 추워서가 아니라 바깥 세상이 늘 살얼음판같이 춥고 냉혹하다는 걸 그린 겁니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는 밖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가장은 늘 넉넉하고 자신이 있어야 함을 말한 겁니다. 영국의 경찰은 뛰지를 않는답니다. 경찰이 뛰면 시민이 불안하다고 해서 말입니다. 어쨌든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어도 아버지는 웃습니다.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 여기는 / 지상." 하는 대목도 얼음집이 아니라, 세상은 그렇게 냉혹하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굴욕과 굶주림의 추운 길을 걸어 / 내가 왔다. / 아버지가 왔다. / 아니 십 구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하는 대목은 박목월 선생의 절창이라고 봅니다. 일제와 해방과 육이오를 지내면서 살아온 십구문반의 신발을 신은 아버지지만, 그는 여전히 웃습니다.
이런 시 하나를 보더라도 그 시대상 그 자신을 씀으로 해서 시인은 그 시대를 쓴다고 했는데, 목월 선생이 사시던 시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미당 선생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앞에서 잠깐 말씀드린 [수대동시]의 무대인 수대동은 미당 선생이 나신 마을입니다. 이 시는 사회집에 실려 있고, 41년에 [사회집]이 나왔으니까 30년대 후반에 쓰신 [자화상]과 같은 무렵에 씌어진 시일 것입니다.

흰 무명옷 갈아입고 난 마음
싸늘한 돌담에 기대어 서면
사뭇 쑥스러워지는 생각, 고구려에 사는 듯
아스럼 눈감었던 내 넋의 시골
별 생겨나듯 돌아오는 사투리.
등잔불 벌써 켜지는데……
오랫동안 나는 잘못 살았구나.
샤알 보오드레―르처럼 섧고 괴로운 서울 여자를
아주 아주 인제는 잊어버려,
선왕산 그늘 수대동 십사번지
장수강 뻘밭에 소금 구어먹던
증조할아버지 적 흙으로 지은 집
어매는 남보다 조개를 잘 줍고
아버지는 등짐 서른 말 졌으니
여기는 바로 십 년 전 옛날
초록 저고리 입었던 금녀, 꽃각시 비녀 하여 웃던
삼월의
금녀, 나와 둘이 있던 곳.
머잖아 봄은 다시 오리니
금녀 동생을 나는 얻으리
눈썹이 검은 금녀 동생,
얻어선 새로 수대동 살리.
-[수대동시(水帶洞詩)] 전문

이 시는 제가 보기에는 미당 선생이 타향에 나와서, 고향인 수대동이라고 하는 마을을 돌아다보며 쓰신 시 같습니다. 그런데 제일 처음 이렇게 시작합니다. "흰 무명옷 갈아입고 난 마음" 저는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가 목화를 따서 명을 자아, 베틀에다 무명을 짠 옷을 입고 자랐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옷을 자주 얻어 입지를 못했는데, 요새는 얼마든지 시장이나 백화점 같은 데서 기성품을 많이 사서 입습니다만, 그때는 명절 때나 한 벌 얻어입는 설빔이나 추석빔 같은 것이지요. 우리의 시어, 모국어라는 것은 그렇습니다. "흰 무명옷 갈아입고 난 마음"을 서양 말로 옮겨 놓으면 그 뜻이 전혀 통하지 않겠지요.
미당의 시를 영어나 불어로 번역하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옷을 갈아입은 게 어떻단 말이냐 하겠지만, 미당은 당신이 어렸을 때 어머니나 할머니가 새로 지어주신 흰 무명옷을 갈아입었을 때의 그 마음, 산 게 아니라 어머니, 할머니가 손수 짜고 손바느질된 것을 입었을 때의 기쁨과 편안함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재작년인가 금강산을 찾았을 때의 일입니다. 장전항에서 배가 돌아오는데, 어둑어둑해질 무렵 배가 동해 바다로 돌려고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궁금해서 갑판 위로 나가 보았더니 "어머니 어머니!" 부르면서 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향에 부모를 두고 온 이산가족들로, 고향 근처까지 왔는데 안부도 전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서야 하는 슬픔이 북받쳐 그렇게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인지상정이니까 어머니를 부르며 울 수 있겠다 싶어서 별로 감동스럽지 않아, 당연하다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저를 울린 말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찬 바다를 향해 울부짖으며 하는 말 가운데 이런 게 들렸습니다.
"어머니, 저는 김치만 먹고 살았습니다. 어머니를 그렇게 두고 제가 어떻게 잘 먹겠습니까?"
저는 이 말을 듣고서, 박완서 선생께 "저건 시인이나 작가들이 상상력으로는 쓸 수 없는 말입니다"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 중에서 "어머니, 저는 김치만 먹고 살았습니다."라고 한 건 참으로 절묘하지요. 이것도 축자적으로 번역한다면, 서양인들은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모국어라는 건 무엇일까요. 김치만 먹고 살았다는 말은 곧 "잘 먹고 잘 살지 않았다"는 뜻이듯, 축자적으로만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 속에는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과 어머니의 가난한 삶과 그리움이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미당의 "수대동시"에서도 흰 무명옷으로 갈아입고 난 마음을 그냥 두면 안 됩니다. "싸늘한 돌담에 기대어 서면 / 사뭇 쑥스러워지는 생각, 고구려에 사는 듯"이라는 대목은 미당의 레토릭(수사법)인데, 왜 고구려까지 가는지 모르지만 아주 먼 옛날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얼마 안 되는 세월이지만 "내가 고향으로부터 너무 멀리 왔구나" 하는 감회를 노래한 게 아닌가 합니다. "아스럼 눈감었던 내 넋의 시골 /별 생겨나듯 돌아오는 사투리." 하는 대목도 좋습니다. 고향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내 넋의 시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스럼 눈감었던"은 "한동안 잊고 살았던"의 뜻일 것입니다. 초저녁이 되면 하늘에서 별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하듯이, 고향을 생각하면 고창의 동네 아저씨들이며 어머니들이 부르는 소리 들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등잔불 벌써 켜지는데…… / 오랫동안 나는 잘못 살았구나." 하고 노래한 걸 왜일까요. 저녁 시간은 늘 자기를 반성하는 시간이 되기 마련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지요. 객지에 와서 사느라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가 끓여주는 국밥을 먹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성에서 "오랫동안 나는 잘못 살았구나" 하고 시인은 생각했겠지요.
"샤알 보오드레―르처럼 섧고 괴로운 서울 여자를 / 아주 아주 인제는 잊어버려" 하는 대목은 무슨 뜻일까요. 보들레르는 여자가 아닌 남자입니다. 미당이 그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서울 여자가 "샤알 보오드레―르"가 될까요. 미당이 보들레르의 시를 좋아해서 불어로 읽으시는 것도 보았습니다만, 그의 시집에 {악의 꽃}이 있지요. 눈썹이 검은 금녀 같은 그런 데 살다가 객지에 와서 서울 여자를 보니까, 전부 "악의 꽃들"로 보인 거죠. 이상하게 사랑을 주는 것 같으면서도 아니고, 돈에 눈이 멀어 있는, 즉 샤를 보들레르 같은 서울 여자가 아니라 "악의 꽃들 같은 서울 여자"를 노래한 것입니다.
중앙일보의 문학담당 전문기자 이경철은 미당을 가리켜 "우리 시의 정부이고 시의 학교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미당 팔순 잔치 마당에서 황동규는 "이 나라에서 미당 시를 읽지 않고 시를 쓴 사람이 있으면 나와 봐라."라고 했습니다. 미당은 지금 자리에 누워 계십니다만 그분이 끼친 모국어에 대한 새로운 해석, 모국어를 어떻게 쓰면 다양하게 쓸 수 있나 하는 것을 보여준 점은 위대하다 할 것입니다.

섣부른 감정을 억제하고 간접화법으로 노래하라

마지막으로 김기림의 수필 [길]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 글은 1936년 그가 스물여덟 살 때쯤 발표한 것입니다. 김기림은 함경도 성징 태생으로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습니다. 1914년, 즉 막 한일합방이 되던 무렵, 아버지는 계모를 들였고, 어린 소년이 어떻게 자라왔느냐를 짧은 수필에 담았습니다.

"나의 소년 시절은 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喪輿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져 때없이 그 길을 넘어 江가로 내려 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江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이 수필은 몇 대목에서 우리가 음미할 대목이 있습니다. 즉 도입부는 한 문장입니다. 첫 문장에서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자기 마을의 풍경과 두 번째로는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라는 대목으로 어머니를 일찍 여의였음을 말하고, 세 번째로는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라는 대목에서 유년 시절이 방황과 배회로 점철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두 번째 문장의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는 얼마 전 작고하신 황순원 선생의 [소나기]에서와 같은 사랑을 그린 겁니다. 그래서 푸른 하늘 빛에 이끌려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줏빛으로 젖어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강가라는 공간과 노을이 지는 시간이 자기 속에 어떻게 각인되느냐를 이미지로 그린 게 실감나게 그려졌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가마귀는 텃새입니다. 반면에 두루미는 철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새를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가마귀와 두루미로 상징되는, 어린 소년을 보살펴 주던 어머니며 누이들이 떠나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 "모래둔(모래언덕)"과 "어두운 내 마음"은 병치되어 있습니다. 쓸쓸한 마음을 깔깔하고 음산한 모래둔에 비긴 것입니다.
"어느 새 어둠이 기어와서"에서는 동구 밖에 우두커니 서 있는 소년이 보이고, 뺨의 얼룩에서는 그 소년의 볼에 흐른 눈물이 보입니다. 어둠이 눈물을 가려주는 것을 수사법으로 그린 것입니다.
제가 이 수필을 굳이 들려 드리는 까닭은, 가령 저 같으면 한번쯤이라도 슬프다거나 울었다거나, 눈물이라거나 그립다거나 외롭다거나 하는 말들을 쓸 법한데 잘 절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을 쓸 때 직접적인 말을 쓰지 않고, 어떻게 간접화법으로 수필이며 시를 썼는가 하는 것에 눈뜨게 하는 명편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도 간접화법을 이용하여 말맛을 자아내면서 자신의 심상을 그리는 훈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