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들

'다작(多作), 다독(多讀), 다사(多思)

능선 정동윤 2011. 9. 20. 16:01



'삼다(三多)'는 당송(唐宋) 팔대가의 한 사람인 송나라 때의 구양수(歐陽修)가 글 짓기에 필요하다고 말한 '다작(多作), 다독(多讀), 다사(多思)'의 세 가지를 말합니다.
'다작(多作), 다독(多讀), 다사(多思)'는 글자 뜻 그대로 '많이 짓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라'는 것으로서, 이는 글 짓기에 숙달되는 데 필요하다는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즉 '많이 듣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라.'는 것과도 비슷한 말입니다.
이들을 종합해서 생각해 볼 때, 글을 잘 짓기 위해서는 '많이 체험하고, 많이 듣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지어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다작(多作)

글을 쓴다는 것은 머리에 든 생각을 문자로 표현하는 작업입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 있다 하더라도 문자로 표현하지 않으면 글이 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많이 써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글 쓰기'와 '글 짓기'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나는 '쓰기'와 '짓기'를 구분하여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쓰기'는 '머릿속의 생각을 말로 하지 않고 문자로 그냥 옮겨 적는 일'이며, '짓기'는 '머릿속의 생각을 문자로 그냥 옮겨 적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자기만의 시각에서 창의성을 발휘하여 표현하되, 고치고 다듬어서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표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다작(多作)'을 한다고 하여 많이만 지을 것이 아니라 사물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그 사물의 본질을 파악한 다음, 창의성을 발휘하여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표현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그런 노력이 없는 '다작(多作)'은 시간 낭비에 불과합니다.
뿐만 아니라 습작을 할 때는 외래어나 외국어보다는 순수한 우리의 모국어로 표현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의 모국어에는 우리의 사상과 감정 등을 표현하는 데 알맞은 삶의 경험과 역사, 정서 등이 녹아서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괜히 잘 알지도 못 하면서 외국어나 외래어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일은 특히 초심자들이 피해야 할 일이며, 그것은 지적인 허영으로 끝나기 십상입니다.
그리고 시를 지을 때 사춘기적 감상이나 기본적으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감정의 표현은 삼가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은 비단 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문학이 예술인 이상 예술적 표현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야 하므로 개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 창작' 공부를 한다고 하여 시만 지으려 할 것이 아니라, 편지나 수필 등의 긴 글도 병행하여 써 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제2강의 문장 연습과 마찬가지로 문장 구조를 익히는 데 많은 도움이 되며, 그것은 시 창작으로도 이어집니다.
끝으로 '다작(多作)'을 얘기하면서 꼭 당부하고 싶은 것은 국어 사전을 항상 곁에 두고 살면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있으면 사전을 찾아 보는 습성을 기르라는 것입니다.
특히 '시 짓기'에서는 더욱 그것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 하면 시는 산문처럼 긴 글이 아니기 때문에 글자 한 자, 맞춤법 하나, 문장 부호 하나까지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2. 다독(多讀)

'다독(多讀)'이란 '많이 읽는다.'는 뜻인데, 이것은 결국 글을 짓기 위해서는 내 글만 지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남의 훌륭한 글을 많이 읽음으로써 그 독서를 통하여 자신의 실력을 키워 나가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다독(多讀)'에 대해서는 무애 양주동 박사의 '면학(勉學)의 서(書)'에 나오는 글로 내용을 대신하겠습니다.

'독서의 즐거움은 현실파에게나 이상가(理想家)에게나 , 다 공통히 '발견의 기쁨'에 누워 있다. 콜룸부스적인 새로운 사실과 지식의 영역(領域)의 발견도 좋고,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노나."식의 워어즈워드적인 영감(靈感), 경건(敬虔)의 발견도 좋고, 더구나 나와 같이 에머슨의 말에 따라, "천재(天才)의 작품에서 내버렸던 자아(自我)를 발견함."은 더 좋은 일이다. 요컨데, 부단(不斷)의 즐거움은 맨 처음 '경이감(驚異感)'에서 발원(發源)되어 진리의 바다에 흘러갈 것이다. 주지(周知)하는 대로 '채프먼의 호머를 처음 보았을 때'에, 키이츠는 이미 우리의 느끼는 바를 대변(代辯)하였다.
그때 나는 마치 어떤 천체(天體)의 감시자(監視者)가
시계(視界) 안에 한 새 유성(流星)의 헤엄침을 본 듯,
또는, 장대(壯大)한 코르테스가 독수리 같은 눈으로
태평양을 응시(凝視)하고 ㅡ모든 그의 부하들은
미친 듯 놀라 피차에 바라보는 듯ㅡ
말없이 다리엔의 한 봉우리를.
혹은 이미 정평(定評) 있는 고전(古典)을 읽으라. 혹은 가장 새로운 세대(世代)를 호흡한 신서(新書)를 더 읽으라. 각인(各人)은 각양(各樣)의 견해(見解)와 각자(各自)의 권설(勸說)이 있다.
전자(前者)는 가로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후자(後者)는 말한다.
생동(生動)하는 세대(世代)를 호흡하라.
그러나 아무래도 한편으로만 기울어질 수 없는 일이요, 또 그럴 필요가 없다. 지식인으로서 동서의 대표적인 고전은 필경 섭렵(涉獵)하여야 할 터이요, 문화인으로서 초현대적(超現代的)인 교양에 일보(一步)라도 낙오(落伍)될 수는 없다. 문제는 각자의 취미와 성격과 목적과 교양에 의한 비율(比率)뿐인데, 그것은 역시 강요하거나, 일률(一律)로 규정할 것은 못 된다. 누구는 고칠현삼제(古七現三制)를 취하는 버릇이나, 그것도 오히려 치우친 생각이요, 중용(中庸)이 좋다고나 할까?
다독(多讀)이냐 정독(精讀)이냐가 또한 물음의 대상이 된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는 전자(前者)의 주장이나, 박이부정(博而不精)이 그 통폐(通弊)요,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함."이 후자(後者)의 지론(持論)이로되,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함."이 또한 그 약점(弱點)이다. 아무튼 독서의 목적은 "모래를 헤쳐 금(金)을 나타냄."에 있다면, 필경 다(多)와 정(精)을 겸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 역시 평범(平凡)하나마 '박이정(博而精)' 삼자(三字)를 표어(標語)로 삼아야 하겠다. '박(博)'과 '정(精)'은 차라리 변증법적(辨證法的)으로 통일되어야 할 것ㅡ아니, 우리는 양자의 개념을 궁극적(窮極的)으로 초극(超克)하여야 할 것이다.

3. 다사(多思)

'다사(多思)'는 '많이 생각한다.'는 뜻인 줄이야 다 알고 계시지요?
그럼 생각만 많이 하면 될까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생각에도 종류가 많지 않습니까?
실현 불가능한 헛된 생각인 '공상(空想)', 머릿속으로 그려서 생각하거나 또는 현재의 지각(知覺)에는 없는 사물이나 현상을 과거의 경험이나 관념에 근거하여 재생시키거나 만들어 내는 마음의 작용인 '상상(想像)', 있지도 않은 사실을 상상하여 마치 사실인 양 굳게 믿는 일이나 그러한 생각, 또는 정신 장애로 인하여 생기는 잘못된 판단이나 확신인 '망상(忘想)' 등이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준에 따라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 유용한 생각과 무용한 생각...... 등등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 중에서 '시 창작'에 필요한 생각들만을 골라서 해야만 하겠습니다.
'공상(空想)'도 '상상(想像)'도 시 창작에는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망상(忘想)'은 시 창작에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은 물론, 유용한 생각은 시 창작에 도움을 주지만 무용한 생각은 시 창작에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 창작을 위하여 필요한, 도움이 되는 생각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럴 때에도 고정 관념을 깨뜨리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정 관념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에는 자유로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 고정 관념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이제까지 경험이나 교육 등을 통하여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자신의 내부에서 해체하여 자신의 사고 밖으로 배설해 버려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고정 관념을 깨뜨릴 수 없으며, 고정 관념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생각의 자유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생각의 자유를 찾지 못한다면 시 창작은 어렵습니다.
여러분.
결론적으로 말씀 드려 '다사(多思)'에서는 이제까지의 경험이나 교육을 통하여 습득한 지식을 해체하여 자신의 사고 밖으로 배설함으로써 고정 관념을 깨뜨리고, 그런 상태에서 '공상(空想)'이나 '상상(想像)' 등 유용한 생각을 하도록 하십시오.
항상 '흥부는 착하고 놀부는 나쁘다.'라고 하는 식의 사고는 이제부터 버리십시오.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를 하면 항상 거북이가 이긴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진리는 영원하다는 말 같은 것은 믿지 마십시오.
사물을 정면에서만 바라보지 말고 비껴 서서 바라보십시오.
꽃은 모두 아름답다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사물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에 공감하지 말고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을 가지십시오.
남들 모두가 질서를 지켜야 한다고 줄을 서면 여러분은 그 줄 밖으로 나와서 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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