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야기

문학산 사모지고개에 있는 술바위와 갑옷바위 전설

능선 정동윤 2011. 9. 20. 16:47

문학산은 해발 232m, 4,126천㎡의 산으로 문학산이라는 명칭이 불리게 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향교와 서원이 있어 문인이 많이 배출되고 학처럼 생겼다 하여 문학산이라 하고, 18세기 중엽부터 널리 불려졌다 한다. 또 다른 여러 이름이 있는데, 인천의 남쪽에 있어 남산(南山)(서울의 남산은 도성의 남쪽에 있어 남산이라 했겠죠!), 산모양이 학의 형상이라 하여 학산(鶴山), 봉화둑산 즉 산봉우리가 마치 사람이 배꼽을 내놓고 누워 있는 모양이라 하여 배꼽산, 오랜 옛날 축성되어 내려오는 산성이 있어 성산(城山)이라 하였으며 이미 기원전 4세기부터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한 산이다.

 

고구려에서 내려온 비류가 미추홀(인천)에 도읍을 했다는 설화와 "문학산위에 비류의 성터가 있으며, 성내에는 비류가 파놓은 우물이 남아 있다"고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는 실려있어 이렇듯 비류백제와 함께해온 성스러운 산임을 역사서는 전하고 있다.

 

문학산봉우리와 노적봉 봉우리사이에 관교동에서 청학동으로 넘어가는 긴 고개 길이 있는데 이길을 사모지고개(삼호현, 함호재고재, 삼해주현, 사모현) 라 부른다. 이 고개는 4세기 백제의 근초고왕때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백제를 침공했으나 오히려 백제에 밀려 평양성에서 화살에 맞아 죽고, 백제는 영토는 지켰지만 고구려와의 사이가 불편하여 중국(남조)과의 육로교류가 봉쇄되어 새로운 해상로을 물색하게 되고 이곳 연수구아래 한나루(나진항)을 택하게 된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사신과 가족들은 지금의 장수IC근처 성현(현재 星峴으로 뜻이 와전됨 옛 이름은 이별고개 별리현이다.)에서 손을 맞잡고 이제 다녀오리다 하고 인사를 하고, 다시 이곳 삼호현(사모지고개)에서 가족들에게 3번 크게 잘다녀오마고 이별을 고하는 고개였다는 얘기이다. 이곳 삼호현을 지나 능허대 쪽으로 멀어져가는 사신의 뒷모습과 조국을 위해 생사의 기약없는 망망한 항해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저민다.

 

"꼭 살아서 돌아와요! 마음속 메아리를 품고, 꼭 살아서 다시 오리라"

 

백제시대때 한나루(대진항)는 국제항구으로 많은 배가 출항을 하였다 한다. 그러나,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를 치고 계류왕을 죽이면서 이곳이 고구려에 함락되고, 백제의 수도가 웅진으로 내려가면서 이곳도 항구로는 잊혀지게 된다. 고구려는 중국과의 육로교류가 활발했으므로 위험한 해상로의 이용필요성이 없어 사신보다는 인천지역주민의 교통로로 사랑받게 된면서 구전되는 전설등을 많이 품게 되는데 바로 사모지고개 양옆으로 재미나는 전설이 있는 바위가 2개있다.

 

KBS 전설의 고향에서 소개된 술바위와 갑옷바위 전설이다. 전설에는 꼭 금기가 있다. 전자인 술바위전설은 3잔만 허용된다는 것이고, 후자인 갑옷바위에는 아무리 궁금해도 보려들지 말 것이다.

 

남구와 연수구를 매일 다니는 길손들은 한참동안 산을 올라오다보면 꼭 사모지고개에 이르러 한쪽 바위에 걸터 앉아 쉬어가게 되는데 이때 선녀보다 더 이쁜 처자가 바위구멍에서 나와 술을 한잔 권하며 따라준다. 한잔 더 줄 수도 있다, 마지막 3잔까지는 줄 수 있다. 하지만 3잔이상을 요구하면 큰일이 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3잔 이상을 청한 적이 없다. 그러던 어느날, 도를 닦는 스님이 이곳을 지나가면서 매번 그러 했듯이 예쁜 처녀가 따라주는 술은 3잔을 마셨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1잔만 더 먹고 싶어서 금기인줄 알면서도 스님을 끝내 처녀에게 1잔을 더 달라 간청을 했다.

 

그러자 그 예쁜 처녀는 술이 나오는 바위 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스님은 못내 아쉬어 바위구멍에 목을 길게 빼고 양손을 바위에 대고 무릎을 꿇고 아무리 애타게 불러봐도 처녀는 구멍 속에서 나오질 않았다. 욕심 많은 중놈 때문에 술을 가득담고 있던 술바위는 더 이상 길손들을 반갑게 맞아주는 영물이 아니며 그저 큰 바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술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지금도 그때 중놈의 손자국가 발자국이 그대로 새겨져 있다 술바위는 일명 중바위라 불러지고 있다.


문학산 갑옷바위


사모지고개를 사이에 두고 술바위 맞은 편에는 갑옷바위가 있다. 옛날 어떤 장군이 인천에 난리가 나면 이곳을 구원해 준다고 하여 이곳바위 밑에 갑옷과 투구를 숨겨놓았는데 이곳에도 금기로 절대 열어보지 말하고 하였다. 그러나 이곳 안관당을 지키는 당지기(일명 무당)는 호기심에 그 바위 안에 숨겨는 장군의 갑옷을 확인하려 했고, 바위를 깨뜨릴려고 몰래 도끼로 바위를 내리치는 순간 그만 벼락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바위가 중간이 깨져버리면서 갑옷도 살아져 버렸다. 나는 하루하루 욕심을 불리며 살아가는데 우리 옛 선조들은 매일 매일 욕심을 버리면서 살라는 가르침을 보내는 구나.

 

문학산을 찾아 떠난 시간여행, 1500년 전 비류왕에서부터 일제강점기, 6.25전쟁, 군사독재시대, 지금에 이르는 동안 문학산에 숨어있는 산 속 문화유산을 살펴보았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생각은 더 빨리 변하고, 모든 것이 새로 창조되고 새 것으로 바뀌어야만 할 것 같은 세상에 나는 살고 있다.

 

단지 시멘트와 대리석으로 만들어 놓은 표지석만 있을 뿐 옛 정취는 사라졌다. 청계천이 그러했고, 지금도 개발을 위해 밤낮없이 장비를 들이대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옛 문화와 유산을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