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시(詩 능선)

사평역에서/곽재구

능선 정동윤 2011. 8. 17. 12:45

사평역에서/곽재구

 

 

막차는 좀체로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룩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으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이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말도 하지 않아다

산다는 것이 때로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 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치묵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는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움도 뼈 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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