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에서/곽재구
막차는 좀체로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룩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으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이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말도 하지 않아다
산다는 것이 때로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 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치묵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는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움도 뼈 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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