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 북한산
불광동에서 독박골로
다시 수리봉으로
인적 드문 겨울 아침
수리봉 중턱 바위 사면엔
칼바람도 잔잔하여
가쁜 숨 내쉬던 나는
기어이 윗도리 하나를 벗고
수리봉은 용소나무길
향로봉은 왼쪽 약수터길로
우회하여 비봉능선에 닿았다.
이틀 전 비가 내렸을 때
산에는 눈이 내렸나 보다
잔설은 드문드문 낙엽을 덮고
그늘진 바위는 고드름을
투명 수염처럼 매달고 있었고
땅은 꽁꽁 서릿발을 세웠다.
내 인생의 가을에도
가끔은 겨울비가 내려
마른 약수터엔 물이 고이고
또 어디선가
하얀 눈이 소록소록 쌓이리라
비봉 지나 사모바위
승가봉에서 바라보는 동쪽
문수봉 보현봉 일대와
그 너머 백운대 주변은
회색 하늘을 배경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설경이
파노라마 액자로 달려 있어
벅찬 기쁨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걸어온 길과 다른 길이
새로운 문으로 열리듯
승가봉 아래로
밧줄 잡고 내려서니
공기는 한결 차가워졌고
청수동암문에 이르자
입을 다물 수 없는 풍경의
그 하얀 설경 속
새 세상으로 들어갔다
북한산 걷는 길에
오르막이 문제랴
바윗길이 문제랴
하물며
그림으로 들어가는
미끄러운 눈길이 문제랴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와도
산은 모두 받아주고
기꺼이 설경까지 내어주며
환희에 찬 행복도 나누어준다.
북한산의 북쪽은
가을엔 단풍이 곱고
겨울엔 설경이 알아주지만
박제된 그림이 아니라
살아있는 풍경으로 만들어
나뭇가지의 눈꽃처럼
눈 덮인 바위의 침묵처럼
위대한 자연의 일부가 된다.
청수동암문 기슭
눈 언덕, 눈밭 속에서
황홀한 시간 보내며
잠시 머물자, 먼 길 가는데
생각보다 오래갈지 모르는
긴 겨울 앞 둔 인생길에
휴식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이곳에 머물자
가슴의 먼지 다 씻길 때까지.
뜻밖의 선물
눈꽃 전시회의 작품들
함께 호흡하며 마음에 새기고
오랫동안 간직하고픈 눈 풍경
얼어버린 스마트폰은
단 한 장의 풍경도 담지 못하여
아쉽고도 아쉬웠다.
대남문에서 문수사,
신간 잡지의 부록처럼
보현봉 설경은 덤이었고
눈을 머금은 팥배나무의 열매
숨은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예고 없이 찾아온 함박눈은
삭막한 겨울산의 축복이 되고
가슴 설레는 날로 번져
하산 길 구기 계곡의
여름보다 큰 물소리는
어지러운 세상 밝히라는
문수사 목탁 소리처럼
깊은 울림으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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