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백석이 되어 /이생진
나는 갔다
백석이 되어 찔레꽃 꺾어 들고 갔다
간밤에 하얀 까치가 물어다 준 신발을 신고 갔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데 길을 몰라도
찾아 갈 수 있다는 신비한 신발을 신고 갔다
성북동 언덕길을 지나
길상사 넓은 마당 느티나무 아래서
젊은 여인들은 날 알아채지 못하고
차를 마시며 부처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까치는 내가 온다고 반기며 자야에게 달려갔고
나는 극락전 마당 모래를 밟으며 갔다
눈 오는 날 재로 뿌려 달라던 흰 유언을 밟고 갔다
참나무 밑에서 달을 보던 자야가 나를 반겼다
느티나무 밑은 대낮인데
참나무 밑은 우리 둘 만의 밤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울었다
한참 울다 보니
그것은 장발이 그려 놓고 간 그녀의 스무살 때 치마였다
나는 찔레꽃을 그녀의 치마에 내려 놓고 울었다
죽어서도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손수건으로 닦지 못하고 울었다
나는 말을 못했다
찾아오라던 그녀의 집을 죽은 뒤에 찾아 가서도 말을 못했다
찔레꽃 향기처럼 속이 타 들어갔다는 말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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