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시(詩 능선)

내가 백석이 되어

능선 정동윤 2023. 1. 3. 22:11

내가 백석이 되어 /이생진


나는 갔다

백석이 되어 찔레꽃 꺾어 들고 갔다
간밤에 하얀 까치가 물어다 준 신발을 신고 갔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데 길을 몰라도
찾아 갈 수 있다는 신비한 신발을 신고 갔다

성북동 언덕길을 지나
길상사 넓은 마당 느티나무 아래서
젊은 여인들은 날 알아채지 못하고
차를 마시며 부처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까치는 내가 온다고 반기며 자야에게 달려갔고
나는 극락전 마당 모래를 밟으며 갔다
눈 오는 날 재로 뿌려 달라던 흰 유언을 밟고 갔다

참나무 밑에서 달을 보던 자야가 나를 반겼다
느티나무 밑은 대낮인데
참나무 밑은 우리 둘 만의 밤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울었다
한참 울다 보니
그것은 장발이 그려 놓고 간 그녀의 스무살 때 치마였다
나는 찔레꽃을 그녀의 치마에 내려 놓고 울었다
죽어서도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손수건으로 닦지 못하고 울었다​

나는 말을 못했다
찾아오라던 그녀의 집을 죽은 뒤에 찾아 가서도 말을 못했다
찔레꽃 향기처럼 속이 타 들어갔다는 말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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