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시(詩 능선)

정글에서 온 풍경/유병만

능선 정동윤 2011. 9. 2. 11:32

정글에서 온 풍경/유병만

 

 

베트남 며느리가 순산했다는 읍내 전화에

논두렁이 파랗게 깨어나고 있다

노인의 호흡이 불규칙해지고 완만하게 달라붙어 있던 들판이 뚝 떨어진다

잠시 주춤하던 족보의 한 갈래가 생기를 되찾고

상속되어져야 할 땅의 분량이 새로운 식량을 서두른다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한 혼잣말이 논두렁을 가로지르던 바림에 베어 물리고

들녘 한 켠이 툭 닫힌 핸드폰 밖에서 곰곰히 쭈그려 앉는다

지난 시절은 불임의 푸르름이었다

지난 날들은 불임의 가계였다

일찍 여문 씨앗 몇 훑으려다가 부주의한 손가락이 주춤 열리고

갈길 바쁜 소나기가 허릴 낮게 구부려 담배내음 짙은 안쪽까지 적신다

문득, 월남전에서 아뿔사

그 옛날 그 땅에서 고엽제 뿌렸던 기억을 하자

노인은 숨결이 노랗게 말라버린다

의족을 짚지 않으면 일어서지 못하는 기억들을 챙기려는 듯

낮게 가어다니던 소나기가 더운 열기의 정수리 위로 떠밀리고

웅크려 있던 호흡을 한껏 곧추세운다

며느리가 온 후

집안의 날씨가 더 따뜻해진 것도 태양을 혼수품으로 가져온 때문임을

논두렁에 묻어 두었던 걱정을 가로 질러 읍내로 빠르게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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