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에서 온 풍경/유병만
베트남 며느리가 순산했다는 읍내 전화에
논두렁이 파랗게 깨어나고 있다
노인의 호흡이 불규칙해지고 완만하게 달라붙어 있던 들판이 뚝 떨어진다
잠시 주춤하던 족보의 한 갈래가 생기를 되찾고
상속되어져야 할 땅의 분량이 새로운 식량을 서두른다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한 혼잣말이 논두렁을 가로지르던 바림에 베어 물리고
들녘 한 켠이 툭 닫힌 핸드폰 밖에서 곰곰히 쭈그려 앉는다
지난 시절은 불임의 푸르름이었다
지난 날들은 불임의 가계였다
일찍 여문 씨앗 몇 훑으려다가 부주의한 손가락이 주춤 열리고
갈길 바쁜 소나기가 허릴 낮게 구부려 담배내음 짙은 안쪽까지 적신다
문득, 월남전에서 아뿔사
그 옛날 그 땅에서 고엽제 뿌렸던 기억을 하자
노인은 숨결이 노랗게 말라버린다
의족을 짚지 않으면 일어서지 못하는 기억들을 챙기려는 듯
낮게 가어다니던 소나기가 더운 열기의 정수리 위로 떠밀리고
웅크려 있던 호흡을 한껏 곧추세운다
며느리가 온 후
집안의 날씨가 더 따뜻해진 것도 태양을 혼수품으로 가져온 때문임을
논두렁에 묻어 두었던 걱정을 가로 질러 읍내로 빠르게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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