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야기

紙千年絹五百 - 종이에 천 년의 생명을 불어 넣는 손길

능선 정동윤 2011. 9. 19. 23:55

금지옥엽 기르던 딸이 곱디고운 원삼·족두리에 연지곤지 찍고 시집가는 날,
친정어머니는 새색시의 가마 속에 요강을 준비해둡니다. 가마 멀미에 시달리며 먼 길 가는 도중,
혹시 소변이 급해질까 염려해서 넣어둔 요강은 종이로 만든 것입니다.

종이를 꼬아 과자단지처럼 예쁘게 엮고, 콩기름·들기름을 정성껏 먹여 소변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만든 종이요강은, 소리가 나지 않아 새색시의 민망함을 덜어주었을 뿐더러 가벼워서
가마꾼들에게 짐도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물에 적신 종이를 여러 겹 붙이면 화살도 뚫지 못해 갑옷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병사들의 겨울옷 속에 솜 대신 넣어 방한복을 짓기도 했습니다. 종이로 만든 변기와 갑옷이라니,
서양인들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만, 그것은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과학적 면모를
여실히 입증해주는 사실입니다.

요강이며 갑옷으로도 쓰였다는 종이, 그것은 우리 조상들이 고유의 방식으로 만들어낸
수초지(手抄紙 Hand-made-Paper), 즉 「한지(韓紙)」입니다.  

「종이」라는 말은 주원료인 닥나무(楮木) 껍질 「저피(楮皮)」가 조비 → 조히 → 종이로
변천해왔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종이가 사용되기 전 이미 비단에 글을 써왔으므로,
「비단 견(絹)」에서 「실 사(絲)」변을, 글자의 씨앗이 된다는 이유로 「씨(氏)」자를 합쳐
만든 글자가 「지(紙)」랍니다.
영어 「paper」는 기원전 3,100년 무렵 이집트 나일강 유역에서 종이처럼 사용되던 갈대의 일종인
「파피루스(papyrus)」가 근원으로, 라틴어 파피루스(papyrus)와 희랍어 파프로스(papuros)에서
변하여 된 말이라는군요.

종이는 인류문명의 역사시대가 열린 이래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어온 기록수단입니다.
과거가 현재에 이야기를 걸어오고, 현재가 미래에 말을 전하는 역사적 대화의 도구인 종이는,
서기 105년 후한의 환관이었던 채륜이 발명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채륜 이전의 종이로 판명된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므로 채륜은 발명자였다기 보다,
종이의 혁신적 개량자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입니다.

610년 고구려 승려 담징이 일본에 제묵법·맷돌과 함께 제지법을 전수한 것은 기록에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종이를 만들어 썼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371∼383년) 불교와 함께 전래된 것으로 생각되어 왔지만,
낙랑시대(BC 108∼313) 고분 중 하나인 채협총에서 벼루집과 종이로 보이는 섬유의 형태가
젖은 덩어리로 발견됨으로써 이미 고대국가 때부터 종이가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신라의 종이는 당나라에서 「백추지(白錘紙)」「계림지」라 불리며 천하제일로 일컬어졌고,
매끄럽기가 명주실로 만든 것 같다고 해서 「견지(絹紙)」라는 별칭이 있었을 정도였는데,
신라 제지술의 진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인정받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으로 증명됩니다.

독일의 쿠텐베르크가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로 찍어낸 성서는 겨우 550여년의 수명을 가지고
열람조차 불가능한 암실에 모셔져 있으며, 오늘날의 책들은 저자가 멀쩡하게 살아있음에도
먼저 누렇게 바래어 가는 일이 다반사인데,
750년 경 인쇄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1966년 보수 중이던 불국사 석가탑의 사리함 속에서
큰 훼손 없이 발견됨으로써 1,3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의연히 뛰어넘은 모습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던 것입니다.

신라의 제지술은 고려시대로 이어져 더욱 발전되면서 「고려지(高麗紙)」라 불렸는데,
질기기가 가죽과 같다고 해서 「등피지(等皮紙)」라 부르기도 했답니다. 송과 원나라는 많은 양을
수입하면서 중국 역대 제왕의 전적을 기록하는 데에 고려지만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섬세하고 희고 빛나고 매끄럽다는 뜻의 「세백광활(細白光滑)」이란 말로 고려지를 극찬했습니다.

섬유를 갈아서 종이를 만드는 중국의 화지(華紙)나 일본의 화지(和紙)와 달리 방망이로 두들겨
섬유질을 길게 보존하는 독특한 제지법으로, 물리·화학적 실험에 의해 강도·인장력·습도조절과
통기성·유연성·방음성·단열성 등에서 두 나라의 종이를 월등히 앞선다는 점이 입증된 한지는,
「문방사우(文房四友 )」의 맏형 격으로 단연 우리 문화의 중심이며 꽃이었습니다.


* * * 경기도 가평군 작은묏골의 장지방(張紙房)에서 백추지와 고려지의 맥을 잇고 있는 장인,
무형문화재 16호 장용훈 지장(紙匠·71).

조부 장경순 씨, 부친 장세권 씨를 이어 장성·전주·임실 등지에서 17살 때부터 한지를 만들기 시작한
장용훈 옹은, 이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에 밴 닥나무향을 벗삼아 묵묵히 외길을 걸어 왔습니다.

2대를 물려오는 가업이긴 했어도 애시당초 종이엔 별 관심이 없던 장용훈 씨는
부친의 말씀을 따라 공부부터 마치려고 했지만,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익힌 재주가 남달랐답니다.
처음 한지를 뜨던 날, 1축(200장) 1권(20장)을 떴고, 열흘째엔 당시 기술자들이 하루 뜨는 양인

500장을 따라갔으며, 두세 달 지나자 파지 한 장 없이 뜨는 양도 두 배 가까이 되는 데다
종이질도 나무랄 데가 없어, 숙련된 기술자들도 소년 장용훈의 솜씨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결국 공부도 중도에 팽개치고 종이 만드는 일에 맛을 들인 장용훈 씨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쟁통에 다 타버린 문서를 새로 만드느라 한지 수요가 급증하자, 20대 중반의 나이로
제법 큰 규모의 한지공장을 운영하며 정부에 납품도 하였으며, 돈도 솔찮이 만질 수 있었답니다.
아버지 역시 아들의 능력을 인정하고 「네게 남길 것은 종이밖에 없다. 너도 종이만은 남겨라」며
평생의 숙제를 남겨 주셨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근대화 바람에 펄프로 대량생산되는 기계지가 넘쳐나기 시작하고,
양옥과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창호지·장판지조차 유리와 비닐에 밀려 한지는 설 자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한지를 뜨던 사람들은 호구지책이 되지 않자 속속 전업을 했지만
결코 한지를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1968년 부친의 탈상을 마친 후 가평으로 옮겨왔습니다.
가평을 택했던 이유는 예로부터 전국의 내로라 하는 지장들도 가평 닥을 으뜸으로 쳐준 데다,
입버릇처럼 「가평 닥이 최고」라던 아버지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질 좋은 닥나무가 산자락과 밭둑에 지천이었고, 닥나무만 바라보아도 배가 부르더랍니다.

남의 일을 해서는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다던 부친의 말씀에 따라 고단한 시절을 보낸 그는
드디어 1974년 작은 공장을 내고 자신만의 종이를 만드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처음 종이를 뜨기 시작한 날부터 오늘까지 50년이 넘도록 단 하루도 쉬어본 일 없이
「종이를 뜨는 일이 너무 좋아 단 한 번도 하기 싫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는 장 옹을
1996년에야 무형문화재 16호로 지정한 것은 너무 늦은 감이 있지 않았는가 싶더군요.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맏아들 성우(38) 씨가 2002년 후계자로 지정되어
자신이 아버지의 종이를 남겼듯, 자신의 종이를 아들이 남겨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우 씨는 지승공예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또 다른 한지의 멋을 찾아내고 있는 중이랍니다.
지승공예(紙繩工藝)는 한지를 좁고 길게 잘라 엄지와 검지로 비벼 꼬아서 실을 만들고,
실 두 줄을 다시 모아 노끈을 만들어, 그 노끈을 심 삼아 실로 옆으로 짜나가면서 원하는 모양의
생활용품과 공예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더욱이 막내아들 갑진(31) 씨도 얼마 전부터 자신의 사업을 접고 장지방에 들어와
일을 하기 시작했다며 환히 웃는 장 옹이 장성한 두 아들을 얼마나 미더워하는지
저마저 어찌나 흐뭇하던지요.

그가 지닌 평생의 화두는 고려지의 재현인데, 아직도 마음에 흡족한 작품을 만들지 못했다니,  
장 옹은 백짓장이 무거워질 날까지 그 일에 골몰할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일반적으로 한지는 닥나무로 만든 닥종이로 한정하지만, 한지는 대·삼·모시·볏짚·보릿짚·귀리나
뽕나무·버드나무·등나무 등 다양한 식물성 섬유로 만들어지고, 지역별 농산물의 부차적 생산품을
원료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종은 역시 닥나무이고, 장 옹도 닥나무만을 고집하는데,
가평 닥은 종이를 떠보면 조롱이(닥나무의 마디)가 생기지 않아 아주 결이 곱다고 합니다.

닥나무는 뽕나무과의 낙엽성관목으로 보통 10월에서 2월 사이에 1년생 가지만을 베어 쓰는데,
이 시기에 베어야 섬유질이 잘 생성되어 있으며, 껍질에 수분도 적당하고 잘 벗겨지기 때문입니다.
베어낸 닥나무는 증기로 6∼7시간 쪄서 껍질을 벗겨 내는 데 벗겨낸 껍질을 「피닥」이라고 하며,
이것을 다시 10시간쯤 물에 불린 후 도마에 걸쳐놓고 닥칼로 밀어 겉껍질과 녹색 중간껍질까지
깨끗이 벗겨낸 것을 「백닥」이라고 합니다.    

햇볕 잘 드는 곳에서 말린 백닥은 하룻밤쯤 물에 불려 적당한 길이로 잘라 닥솥에 잿물과 함께 넣고
소뼈를 고듯 7∼8시간 동안 푹 삶아야 합니다(蒸解).
여기서 중요한 점은 메밀대․콩대․고춧대․참나무 등의 재를 시루에 담아 내린 육잿물을 써야
섬유질이 살아있어, 종이의 장력과 강도가 높아져 종이의 생명력을 보다 연장시킬 수 있고,
처음 제작 시의 모습을 장시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성소다인 양잿물을 쓰면 시간도 절약되고, 티도 없고, 백닥의 양도 많아지지만,
강도가 떨어지고 조롱이가 많이 생기며 종이의 수명이 짧아진답니다.

잘 삶아진 백닥은 하룻밤 닥솥에 그대로 두고 뜸을 들인 후, 흐르는 맑은 물에 반나절 정도 담가
잿물·당분·기름기 등을 씻어내고 티 고르기를 하는데, 티 고르기는 일일이 손으로 해야 하는
긴 시간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과정입니다.

티 고르기를 마친 백닥은 닥돌 위에 올려놓고 닥방망이로 두들겨 섬유질을 곱게 풀어헤치는
고해(叩解 )작업을 해야 합니다. 이에 반해 중국은 원료를 맷돌에 갈아 종이를 만들기 때문에
질기지가 않답니다.

이렇게 곤죽이 되도록 짓찧어진 백닥을 지통에 넣고 물과 골고루 잘 섞이도록
둥근 대막대로 충분히 저어주면서(解離) 다시 한번 잡티를 제거한 후, 닥풀 뿌리즙을 넣고
다시 힘차게 저어 주는데 이 작업을 「풀때치기(팔개치기)」라고 합니다.

한지 제작에 있어 주원료인 닥나무에 버금갈 만큼 중요한 원료가 바로 닥풀입니다.
닥풀은 황촉규(黃蜀葵)라고도 불리는 한해살이 풀로 뿌리를 찧어 물에 불리면 셀룰로우즈 성분의
점액이 많이 나오는데, 이 점액이 닥죽에 점성을 주어 발 위에서 물이 흐르는 속도를 조절하고,
닥의 긴 섬유질이 가라앉는 것을 방지하며, 섬유질을 균일하게 배열하여 지질을 고르게 합니다.
또한 떠놓은 습지를 눌러 물기를 제거한 뒤에도 낱장으로 잘 떨어지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데,
건조되면 점성은 소실되어 종이를 말리는 데도 안성맞춤이며, 윤기를 더하고 내구성을 강하게
해준다는군요.

이렇게 긴 과정을 거쳐 드디어 닥죽이 마련되면,
대나무 발을 얹은 발틀에 닥죽을 올려 종이뜨기를 시작합니다.
종이를 뜨는 방법에는 「흘림 뜨기」와 「가둠 뜨기」가 있는데, 우리 한지는 발틀 하나만을 사용해
「외발 뜨기」라고도 하는 흘림 뜨기로 제작되며, 가둠 뜨기(쌍발 뜨기)는 중국·일본의 방법입니다.
종이의 두께나 모양은 물질에서 결정되는데, 발틀을 전후로 흔드는 앞물질 한 번으로
종이 전체의 형태를 잡고 발틀을 좌우로 흔드는 옆물질을 통해 종이에 살을 붙이게 됩니다.
이 방법은 네 방향 모두 닥물이 흐르기에 섬유질이 서로 얽혀 잘 찢어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한지는 습지(막 떠낸 젖은 종이) 두 장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겹쳐 한 장의 종이를 만드는
「음양지」라서 한결 질기고 강하답니다.

「소리만 들어도 종이 두께를 알 수 있지요」라고 말하는 장 옹에게서 장인의 면모를 엿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종이를 뜰 때 천연염료를 사용해 색지를 만들기도 하고,
발틀에 문양을 넣기도 하는데, 이 문양지나 요철지는 장 옹이 개발한 그만의 기법이라고 합니다.

발틀에서 떼어낸 습지를 500~600장씩 차곡차곡 쌓을 때 종이 끝부분에 실을 걸쳐,
나중에 종이를 떼어 내기 좋도록 하는데 종이가 베고 있는 것이라 하여 「베개」라 하며,
옛날에는 왕골을 썼지만 요즘은 나일론 실을 씁니다.
이 베갯자국으로 종이제작 연도를 짐작할 수도 있답니다.

쌓아놓은 습지는 된틀로 눌러 물기를 짜낸 후 한 장씩 떼어 온돌 방바닥이나 벽에 붙여 말리는데,
요즘은 증기로 열을 가해 철판을 데워, 그 위에 한 장 한 장 종이를 펴서 빗자루로 쓸어 붙인 후
건조시키는 열판건조방법을 씁니다.

잘 말린 한지는 도침(搗砧)작업을 마무리하여 완성됩니다.
도침은 우리 선조가 세계 최초로 사용하였던 종이 표면 가공기술로
적당한 습기를 머금은 종이를 겹겹이 쌓고, 방망이나 디딜방아로 두드려 표면의 섬유질을 눌러 붙여
평활성과 치밀성을 향상시킴으로써 종이를 곱고 질기고 강하고 탄력 있게 하며, 윤기를 주고,
먹물 번짐을 막아내는 역할도 한답니다.

「닦달하다」라는 말도 종이를 만들기 위해 베고, 두드리고, 찧는 힘든 과정을 빗댄 것이라는데,
이렇게 복잡하고 고된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 한 장의 한지.
사실 손쉽고 싸게 구하는 종이에 길들여지고, 고된 제작과정을 모르는 이들에게
전통 한지는 그저 비싸기만 한 종이에 불과할 뿐일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장 옹의 한지는 국외에서 더욱 그 가치를 인정 받아, 일본이나 미국의 유명 예술가들 중에는
장지방 종이만을 고집하며 작품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 주문량 대기도 만만치 않다는군요.
그들로서는 정작 「한지」라는 세계 최고의 전통의 주인인 한국인들이 장 옹의 종이에 어째서
그토록 덤덤한지 몹시 궁금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일 100부씩,
절대 바래지 않는 특수지에 로열판을 인쇄해 놓는다고 알려진 영국의 「The Times」에
장용훈 옹의 한지에 대해 귀띔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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