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詩論)들

詩人이 되고자 하는 분에게

능선 정동윤 2011. 9. 20. 00:23

詩人이 되고자 하는 분에게
산방거인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을 것인가는 시를 쓰고 계시는 많은 분들의 공통된 희망사항이기도 하거니와 가장 중요한 시 쓰기의 현안 핵심사항이 아닐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흔히들 시는 산문과 다르므로 감정의 흐름에 따라 시를 쓰고 읽으면 될 것이고 따라서 구조는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으며 그 감정의 흐름에 걸 맞는 시어와 조어를 만들어 쓰면 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과, 시어는 시인의 눈과 느낌으로 만들어지며 따라서 아름다운 말(시어)이어야 된다고들 생각하고 있을 줄 압니다.
시를 쓴다는 것을 통상적인 일반상식으로는 가슴으로 시를 써야 한다고들 하며, 시에는 시에서 만이 가져야 하는 특별한 시어를 구사해야 한다고들 생각하기가 일쑤이지요.
가슴으로 쓰는 시는 어느 누구라도 겪어 온, 보석과도 같은 순연한 시인의 감성과 열정이 용솟음 쳤던 한 때를 다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란 것이 그 때의 서정을 그대로 우리를 묶어두고 고착화 시켜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순연의 재기가 반짝이던 한 때의 서정은 세상을 살면서 세파와 시류에 휩쓸려 우리를 삶의 한 가운데로 옮겨가게 할 것이며, 이제 가슴의 시는 정신의 시로 전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더욱 성숙된 시인의 시력에 따라 포착되어지는 순간순간들의 작은 느낌과 변화는 시인의 눈에서 이제는 가슴의 시가 아닌 정신의 세계에서, 자신만의 가슴속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고 볼 수가 있겠지요.
예술이란 공상이 아닌 상상력의 결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며 상상력은 앞뒤가 맞지 않는 허황한 망상에 불과한 공상과 달리 실재하는 것을 보이게 하는 힘일 것입니다.
누구나 쉽게 언제 어디서나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창작의 원동력을 상상력이라고 한다면 이 상상력을 기호화한 예술로서의 시가 독자들로 하여금 공감대를 형성하고 설득력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그 속에 필연적인 내부 구조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가장 먼저 시를 쓰고자 하는 분들이 시의 내부 구조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될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우리의 한시(漢詩)구조를 보더라도 기승전결(起承轉結), 즉 시상을 일으키는 기구(起句), 기구를 이어받아 시상을 발전시키는 승구(承句), 다시 장면과 시상을 전환시키는 전구(轉句), 마지막으로 전체를 묶어 여운과 여정이 깃들 수 있도록 끝맺음 하는 결구(結句)등의 4단계 기본구조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구조란 3단, 4단, 5단 등으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며 이러한 구조는 작품의 내용을 입체화하고 그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는 흐름을 택하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러한 기본구조는 내용에 걸맞게 자유로운 구조로의 변환이 가능할 것이며 또는 새로운 구조로 재창출되기도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산문이라는 글도 기본적으로 서론. 본론. 결론의 3단 구조를 쥐하고 있으며 본론과 결론 사이에 또 하나의 마디를 넣으면 4단 구조를 갖게 되고 또 하나를 더 넣으면 5단 구조를 갖게 되겠지요. 여기서 유념해야 될 것은 이 구조를 완전히 익히면 자기만의 독특한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에서의 구조와 동일어로 사용됩니다만 시에서의 틀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틀이란 것은 그 시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는 매우 종요한 요소이며 구조를 진행상의 흐름, 즉 순서라고 할 때 이 틀이란 세부적인 연이나 행의 짜 맞추기, 시의 제목과 내용이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찻잔에 밥을 담지 않고 밥그릇에 차를 담지 않는 이치와 같이 내용물에 따라 그릇을 달리하는 이치를 생각해 본다면, 물론 아무렇게나 시를 쓴다 해서 시가 되어지지 않음은 아니지만 그 기능이나 효율적인 면을 생각해서 적절한 그릇을 선택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본적인 틀이란 무엇일까요. 틀의 원리를 간단히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의 내용은 크게 추상과 구상으로 간추려 지며, 또한 이 두 가지 내용을 섞을 수 있는 방법으로 네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시의 틀이라고 합니다.
① 추상 + 구상
② 구상 + 추상
③ 추상 + 추상
④ 구상 + 구상
위의 도식은 시의 전면적인 구조에도 적용이 되지만 제목과 내용의 관계로 전개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 행, 한 연의 내부 구조에서도 긴밀하게 작동한다 하겠습니다.
물론 위와 같은 창작방법은 매우 도식적이고 기계적일 수 있기에 습작의 단계를 지나 어느 정도 자기의 색깔을 가질 수 있는 내공을 쌓고도 위와 같은 도식으로 창작에 임한다 함은 금물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에 대한 이해와 습작과정을 거치면서 자기만의 색깔을 지닌 시인이 되었다면 이는 이미 자기만의 틀을 재탄생 시킨 시인이라고 봐야 할 것이며 독자적인 개성 있는 영역을 개척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시에 입문한 초보자일 경우, 또는 시를 쓰고는 있으나 아직 감이 제대로 잡히지 않고 있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틀은 위의 ①과②에서 시작훈련을 하시기를 권합니다. ③과④는 보다 능력을 가질 경우에 그 힘을 배가 시킬 수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예컨데 ‘돌은 돌이다’는 ④에 해당되므로 구상 + 구상이지만 평범하기 짝이 없지요. 허나 ’돌은 마음이다‘로 고쳐 쓴다면 ②의 구상 + 추상에 해당 되는 바 ④의 경우 보다 긴장관계가 고조됩니다. 나아가 ③,④의 경우에도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습니다. ’돌은 돌이다‘가 첫행 이라면 마지막 행에 ’마음은 마음이다‘를 대비시키거나, 돌의 내용이지만 제목에 물이라는 추상어를 도입함으로써 돌의 의미를 확대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시의 매 행에서 ①②의 방법을 교직하는 식으로 연과 행, 도입부와 마무리, 내용과 제목을 안배함으로써 좋은 구조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상상력에 관한 문제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상상력이란 표현의 내용이며 날개라고도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도 잠시 말씀을 드렸지만 상상력은 실재하는 것을 보이게 하는 힘이며 그 힘은 실제적인 것, 즉 오브제의 채용에서 나옵니다. 오브제란 상상력이 발동할 수 있는 태반입니다. 상상력이란 보여 지거나 만져질 수 없는,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오브제를 통해서 그 힘을 극대화 시킬 수 있음입니다.
따라서 한 편의 시는 그 도입부에서 오브제를 보여주고 전개부에서 오브제에 걸 맞는 상상력을 전개하며, 전환부에서 오브제를 강화시킬 수 있는 갈등을 보여주고, 결말부에서 그 갈등을 시인이 풀어 낼 수 있을 때 그 시는 형식과 내용이 일체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속에서(오브제) 새로운 발상이 담겨지고 상상력을 따라 그 내용이 증폭될 수만 있다면 더 없이 좋은 작품이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상력 훈련은 먼저 대상물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어 버리는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란 감정과 정서의 흐름입니다.’이 말은 처음 시를 접하시는 상당수의 분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 관념 중의 하나 일 것입니다. 먼저 이 감정이란 개념과 시에서 사용하는 서정과의 차이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흔히 체험하는 일이겠지만 시의 1차적인 발상 차원은 이 정서라는 측면을 우선 이용합니다. 여기에서 정서라는 측면은 고조된 감정의 직접적인 표출로서 시의 일차적인 발상차원에서 동기 유발 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한 송이의 아름다운 꽃을 보았을 때 환기되는 반응적 감정은 어떤 것일까요! 시인은 이러한 감정을 표출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정서는 시를 성립시키는 동기 유발 적인 발상 차원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정서란 어떠한 사물에 대하여 체험적으로 직면했을 때 일어나는 온갖 감정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희. 노. 애. 락. 애. 오. 욕. 공포. 불안 등의 감정이나 정서는 일종의 본능적인 내면 경험으로서 시간에 영향을 받는 내면적 정신 산물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정서는 심리적, 육체적인 본능의 유로적 표출로서 그 발상의 동기가 시간. 공간. 분위기에 따라서 또는 본능에 따라서 심한 가변성을 보이고, 개인적으로도 다르게 표출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시란 멋진 말이나 철학적 언어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시어들은 이러한 시를 쓴 작가의 자기 성찰 적인 정서를 표출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사용되기도 하겠지만, 그러한 의도는 추상적 시어에 묻혀 울림이 약하게 전달되어져옵니다. 이 경우 일반적으로 감정을 멋있게 혹은 깊이 있는 철학적 언어로 표현하려는 특정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어들이 시적 깊이를 형성해 주지는 않습니다. 피상적인 느낌으로 읽혀질 소지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다시 말하자면 시는 관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구체화되고 형상화되었을 때 시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그리고 고백적 성향의 수필이나 일기 같은 시어, 감정의 과다 노출 등이 드러나는 이러한 시어들 역시 자제를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일은 상투 언어에서 벗어나 '낯설게 하기'와 새롭게 보기의 기법을 익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투성이란 이미 많은 시인들이 사용한 바 있는 언어를 말함이요, 예를 들면 이미 많이 알려진 상징물을 구태의연하게 시어로 사용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느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의 나열일 뿐, 이러한 상투적인 시어들은 독자들을 식상하게 하며 진부한 느낌을 주게 되어 감동을 주지 못하게 되지요.
사람들은 낯선 것을 보면 우선은 호기심을 느끼면서 주목하게 됩니다. 신기하게 생각하고 이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살펴보다가  아 이건 뭐지! 이건 이런 곳에 쓰는 거구나! 하고 알게 된 후 감탄하게 되지요. 그러나 낯익은 것,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보면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미 익숙해져 있기 있음으로써 관습적인 지각을 야기하는 때문이겠지요. 모름지기 시인은 상투의 틀에 붙잡히지 말고 끊임없이 새로운 정신으로 긴장을 살려나가야만 할 것입니다. 낯설게 하기라는 이 기법은 20세기 초에 러시아와 체코에서 일어났던 이른바 러시아 형식주의가 표방한 분석방법과 객관적 서술묘사의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예술은 실생활의 정확한 재현이 아니라 도리어 생활의 모습을 낯설게 만들어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예술은 새로운 사실의 개발이 아니라 우리의 습관적 반응을 일으키는 일상의 사실을 비상(非常)하게, 낯설게 보이게 한다는 생각입니다. `예술의 목적은, 사물이 알려진 그대로가 아니라, 지각되는 그대로 감각을 부여하는 것이다 라는 측면으로 설명이 됩니다.
문학의 생명이 신선함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과거를 답습한다거나 모방의 차원에 그친 문학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벌써 문학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라고 보면 틀림없는 말이겠지요. 그래서 작가들은 늘 신선한 눈을 갖기 위한 고민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안 됩니다. 주변의 사물에서부터 심오한 철학에까지 다 방면에 걸쳐 새로운 눈으로 그것들을 대하며 뛰어난 관찰력, 상상력, 추리력 등이 발동해야 합니다. 이는 바로 문학이 신선한 창조이게 하는 생명력이지요. 언어생활이 인간적인 삶의 기본이라는 측면을 덧붙인다면 더더욱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겠지요. 앞에서 언급했듯이 문학의 생명은 관찰력, 상상력, 추리력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은 관찰력입니다. '사소한 사물이나 현상도 그냥 내버려두지 말라. 거기에 기기묘묘한 착상이 있고 원리가 있고 언어가 있다.'는 이 말은 시인의 기본 정신으로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말을 확대 해석해 보면, 요는 관찰하라는 말이 되는 것이며, 이 관찰하라는 말은 일상적인 시각에 머무르지 말고 거기에서 벗어난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라는 말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낯설게 하기'란 개념은 일상적인 시각의 파괴란 의미로 이해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김소월의 시  금잔디 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이 시가 어떻게 일상적인 지각을 막고 시인의 경험을 생생하게 전달하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잔디잔디금잔디심심산천에 붙는 불은가신 님 무덤가의 금잔디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심심산천에도 금잔디에
<김소월,금잔디>
1922년에 발표된 <금잔디> 전문입니다. <금잔디>는 일반적으로 봄의 소생하는 생명력을 노래한 시로 평가되어 왔지만, 이 시를 자세히 살펴보면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님의 죽음을 슬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1~3행의 잔디/잔디/금잔디는 행을 구분해 놓음으로써 마치 잔디에 대한 시각적인 생생함을 의도한 듯 느껴집니다. 3, 4행의 심심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덤가의 금잔디는 에서 불은 일상적 언어에서 금잔디가 될 수 없지요. 그러나 시에서는 일상 언어에서는 불가능한 것들을 강제로 결합시키고 새로운 문법 질서를 확립함으로써 시의 언어를 낯설게 하고 직접적인 의미를 넘어선 시적인 의미로 전환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김소월은 불과 금잔디를 강제로 결합시킴으로써 금잔디를 일상적인 의미가 아닌 다른 의미로 전환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불과 금잔디 사이에는 거의 유사성이 없어 보이지요. 그러나 시에서 금잔디가 돋아나는 곳이 가신 님 무덤가라는 실마리를 바탕으로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시인이 죽은 님의 무덤가에 와서 금잔디가 돋아나는 것을 보고 있다는 상황을 추측해볼 수 있으며 실제로 산에서 불이 나는 것이 아니라 심심산천으로 비유되고 있는 어떤 곳에서 불이 난다는 가정을 해볼 수 있습니다. 은유 구조에 따를 때 심심산천은 무덤가와 대응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불은 산에 나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님이 죽었다는 상황을 미루어 볼 때 화자의 가슴, 즉 님의 죽음으로 인해 무덤 속처럼 황폐해진 화자의 가슴속이라는 것을 은폐한 것으로 이 시를 감상 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불길은 님의 죽음으로 인한 그리움의 불길이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작가의 눈에 비친 그 금잔디, 다시 피어난 그 금잔디에 대비되어 한 번 가신 님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님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이 불길처럼 이미지로 숨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낯설게 하기라는 기법은 이렇듯 일상적 언어의 사용에서 발상과 시각의 전환을 통해서 시를 새로운 시각으로 창출해내기도 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신선한 깨달음의 감동의 주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벽암록’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 선승이 조사를 찾아가 도를 물었는데, 조사가 묻기를. "나룻배로 강을 건넌 뒤 너는 나룻배를 버리고 가겠느냐, 그것을 머리에 이고 가겠느냐?" 조사의 물음에서 강 이쪽과 저쪽은 미혹의 세계와 진리의 세계를 뜻하며 강은 그 두 세계를 갈라놓는 경계선이며, 나룻배는 여기서 그것을 건너기 위한 화두이겠지요. 조사는 도를 묻는 선승에게 이미 깨달았으면 그만이지 그 화두(즉 언어)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은근히 깨우쳐주고 나무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내용이 이해되면 그 뿐이지 그 매개 수단은 중요치 않은 것이겠지요. 그러나 문학의 언어는 낯설게 된 언어입니다. 따라서 일상언어를 지각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란 사실을 명심해야만 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말씀 드린다면 "침묵의 기술, 생략의 기술"도 익혀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T.S. 엘리어트의 황무지라는 시는 우리에게 침묵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는 시라고 할 수 있지요. 시와 유행가의 차이는 그것이 의미 있는 침묵인가 아닌가의 차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시는 바로 감상이 아니라 우리를 긴장시키는 힘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며, 만약 설명하려다 보면 감상의 넋두리로 떨어져 버리게 되고 말지요. ‘침묵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그 시는 성공할 것이다.’ 라고 “말라르메”는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상상력 훈련을 위해서는 단계적 관찰법과 이에 따른 훈련을 거듭함으로써 자신의 작품세계를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로 심화시켜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이토오.게이이치’의 “서정시 입문”에서 기술한 바 있는 발상 8단계를 소개합니다.
① 나무를 그대로 나무로 본다
② 나무의 종류나 모양을 본 다
③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를 본 다
④ 나무의 잎사귀가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세밀하게 본 다
⑤ 나무속에 승화하고 있는 생명력을 본 다
⑥ 나무의 모습과 생명력의 상관관계에서 생기는 나무의 사상을 본 다
⑦ 나무를 흔들고 있는 그 본질을 본 다
⑧ 나무를 매체로 하여 나무의 저 쪽에 있는 세계를 본 다.
위에서의 ①~④는 나무를 눈에 비치는 그대로 봄이요, ⑤~⑧까지는 보이지 않는 세계 까지를 보고 있음을 말하며 곧 의미화의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동인님, 시인이 되고자 하는 길은 자기와의 끊임없는 투쟁과 재창조의 결과물이라고 전 생각을 합니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혜안으로 대상에 대한 깊은 사색과 근원적인 탐구정신을 가져야 할 줄로 압니다.
이 외에도 시 작법상의 여러 요소들과 기법상의 많은 부분들이 있습니다만 이 부분들은 이미 형설 제1호에서(2002년 가을 초판) 구체적으로 기술한 바 있습니다.
그 자료를 갖고 계시지 않으신 분들은 등단문 창작관련 자료실에 게시되어 있사오니 참조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메시지가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2004년 봄 다시 만나 뵈올날을 기약합니다.
여러분들의 문운 창성하시옵기를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2003년 11월6일
산방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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