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바보들을 보고 웃는 방법2
― 시 속의 유머 정신
강인한
돈 많은 재벌의 총수들이 다투어 자서전을 내던 시기가 있었다. 아니 요즘에는 이른바 '떴다'고 하는 연예인들조차 자서전을 내기도 하는데 소문에 의하면 직업적인 대필 작가들이 그 일을 해준다고 한다. 이 시에서도 하나의 훌륭한 묘비가 등장한다. 아마도 당대의 유명한 문인이 그의 행장을 기리는 묘비명을 썼을 것이다. 붓글씨 잘 쓰는 사람들은 항상 붓글씨 못 쓰는 사람들 밑에서 글씨를 써주게 마련이라 하던가. 여기 한 사람의 세속적으로 출세한 졸부가 있다. 그는 생전에 책 한 권 읽은 바 없이, 정신적 가치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 사람이다. 돈과 높은 지위를 얻어 행복하게 살다가 죽은 그를 위하여,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문인이 동원되어 훌륭한 비문을 새긴 비석이 세워졌다. 속물적 근성에 입각한 자들은 거드름을 피우며 물질의 권위를 앞세우고 거들먹거린다. 시인은 이 시의 이면에 숨어서 그들을 마음껏 조롱하고 있다. 아이러니가 독자들에게 역사의 허무함, 위선의 가면을 벗겨내면서 조소와 고소를 터뜨리게 하는 시이다. 겉으로 표현된 진술과 시 속에 내재된 의미 사이의 깊은 골 사이에 매복된 풍자와 아이러니가 이 시를 높은 정신 세계로 고양시키고 있다.
개가 밥을 다 먹고
빈 밥그릇의 밑바닥을 핥고 또 핥는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몇 번 핥다가 그만둘까 싶었으나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수백 번은 더 핥는다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보았나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 없이 다 먹었으나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맛있게 먹어보았나
개가 핥던 밥그릇을 나도 핥는다
그릇에도 맛이 있다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 정호승「밥그릇」
앞서 범대순의 <일편단심>에서는 내가 남긴 밥을 아내가 개에게 주어버린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그 개가 밥을 먹는 모양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개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빈 밥그릇을 지치지 않고 씩씩하게 핥는다는 진술에 이르면 폭소가 터진다.
시적 화자는 한 순간 개와 자신의 위치를 전도시켜 본다. 뼈아픈 자기 반성이다. 나는 언제 저와 같이 끝까지 일을 추구한 적이 있었던가 시적 화자는 반문한다.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란 끝까지 밀고 나가는 작업의 순수함, 그 도저함을 이르는 표현이지 실제 상황이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 세상에 개 밥그릇을 핥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끝까지 열심히 해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밥그릇'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가치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 시가 읽는 이에게 단순한 폭소만 유발하지 않고 웃음 끝에 슬며시 얹혀지는 각성의 눈물 한 방울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 한 방울의 눈물은 별빛처럼 아름답다.
김종수 80년 5월 이후 가출
소식 두절 11월 3일 입대 영장 나왔음
귀가 요 아는 분 연락 바람 누나
829-1551
이광필 광필아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 …… )
나는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눈다
― 황지우 「심인(尋人)」의 일부
황지우는 이와 같이 활달한 어법으로 시를 쓸 때라야 성공적인 시를 보여준다. 그의 시에서 화자가 근엄한 표정으로 표면에 나타나는 시들은 십중팔구 실패작에 가깝다. 평론가들이 그런 시들 앞에서도 설설 기는 것은 그의 이름에 기가 죽어서이지 압도적인 정신 세계에 짓눌려서가 아니다. 그의 실험적인 기법은 무척 매력적이다. 위트가 번뜩인다. 이 시는 신문기사를 패스티쉬라는 '짜깁기'의 방법으로 나열하고 나서 끝에 가서야 비로소 시적 화자를 등장시킨다. 시적 화자 '나'는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지금 용변을 보고 있다. 그의 유명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시에서의 결구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에서처럼 베이소스(안티 클라이맥스) 기법을 구사하여 웃음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단순히 그의 실험적 성공만을 담고 있는 시가 아니다. 1980년 5월이라는 시대 배경에 유의해야 한다. 그 기사들은 당시에 사라진 실종자들을 찾고 있는 광고 기사라는 점이다.
황지우와 가까우면서도 먼 거리에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유하가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시를 읽으면 웃음이 없다. 재기 발랄함과 패러디의 표현과 요설 말고는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다.
압구정동에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라는 까페가 생겼다
온통 나무 나무로 인테리어한 나무랄 데 없는
이라는 이 첫 도입 부분부터 황지우의 패러디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배꼽→배→배나무'와 같은 식의 어휘 연상을 이어나갈 뿐, 웃음도 없고 감동도 없고 미감도 없는 도시 풍경을 좌충우돌 묘사할 뿐이다.
환장허겄네 환장허겄어
아, 농사는 우리가 쌔빠지게 짓고
쌀금은 저그덜이 편히 앉아 올리고 내리면서
며루 땜시 농사 망치는 줄 모르고
나락도 베기 전에 풍년이라고 입맛 다시며
장구 치고 북 치며
풍년 잔치는 저그덜이 먼저 지랄이니
우리는 글먼 뭐여
신작로 내어 놓응게 문둥이가 먼저 지나간다고
기가 차고 어안이 벙벙혀서 원
아, 저 지랄들 헌게 될 일도 안 된다고
올 농사도 진즉 떡 쪄먹고 시루 엎었어
― 김용택 「마당은 비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자」의 일부
전라도 구어의 능란한 구사와 속담의 파격적 인용, 그리고 그런 속담의 패러디와 풍자가 뒤섞여 있는 김용택의 유장한 이 시를 나는 그의 <섬진강> 연작보다 우위에 두고 싶다. 이 작품은 농민의 분노가 단순한 분노를 넘어 기막힌 익살과 비극적 카타르시스로까지 승화된 시라 할 것이다. 그가 이 시 말고 또 다른 어떠한 시로 높이 평가받는다 해도 이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최근 김용택이 보여주는 투명하고 서정성이 강한 시들도 충분히 그의 역량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나로서는 그가 이 시에서 보여준 걸쭉하고 활달한 시의 세계로 다시 돌아와 주었으면 싶다.
삼년 전 월부로 사들인 냉장고
아래층에
달걀 한 줄과
김치 한 단지,
곯아버릴 수도 없고 시어버릴 수도 없이
억지로 억지로 싱싱한 체함.
이층에는 오십원 짜리
싸구려 아이스크림 세 개
학교에서 돌아올 우리 아이들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음.
내가 마실 맥주 몇 병과
아내가 마실 오렌지주스는
처음부터 부재중.
아내와 나는 이 대형 냉장고 곁에
쪼그리고 앉아 미소 지으며
사진 찍기를 좋아함.
문을 열면
짜고 매운 한국의 냄새뿐이지만
그러나 문을 닫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하염없이
냉장고를 사랑함.
열려라 냉장고, 열려라 냉장고,
아이들은 열렬히 마술의 문에 매달려
꿈꾸며 노래함.
― 졸시 「냉장고를 노래함」
이 시는 내가 1980년 6월에 발표한 작품이다. 제목은 <코스모스를 노래함>이란 가곡의 패러디이다. 5·18을 불러오기까지 박정희 군사 정부가 이룩해 놓은 우리 나라 경제 발전의 허상을 이 시에서 나는 풍자해 본 것이었다. 빛 좋은 개살구로서의 대형 냉장고는 월부로 산 것이니 외상이다. 우리의 외채가 당시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는지를 미국에 살고 있는 교민들로부터 들은 바 있었다. 거의 절망적인 실정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었다. '억지로 억지로 싱싱한' 체하지만 냉장고 안에서도 썩을 것은 썩고야 만다.
그리고 냉장고 앞에서 보란 듯이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 당시 전시효과만을 내세우는 속 빈 강정의 우리 나라의 전시 행정을 은근히 풍자하고자 함이었다. '열려라, 참깨'라는 마술의 주문에 의해 열리는 알리바바의 동굴 앞에서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아니 우리 국민들은 얼마나 순진하기만 한 것이었던가. 그 허울 좋은 경제 발전의 미명 아래 자행된 인권의 유린이며 퇴행으로만 치닫던 민주주의의 아픔이 이 시에는 차마 '곯아버릴 수도 없고 시어버릴 수도 없이'라고 표현된 것이었다.
많은 독자들은 이 시를 다만 웃음으로 읽는다. 그러나 그 웃음 속의 진실은 눈물 이상이었다.
다시 움베르토 에코를 생각한다. 그가 소설 <장미의 이름>을 쓴 것은 웃음의 진정한 효용성을 강조하고자 함이었으며, 그 연장선상에 얼마 전 그는 속물 근성이 만연한 이 세상을 비틀어 보기 위하여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라는 비평적 에세이집을 내놓고 있다. 우리의 현대시도 세상의 바보들을 웃게 하면서 넌지시 자기 반성의 깨우침으로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제 그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할 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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