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쓰기/정진규
한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
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 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 번 쓰고 나면 그 뿐 지
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없는 나의 생애 용서 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온전치 못한
반편 반편도 거두어 주시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 드릴 수 있기
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그런 영혼의 냄새로 만나기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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