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변소간의 비밀/박규리
스님들 앞에서 떠들어대는 저 구미호 같은 보살 말고는,
십년 넘은 그 절 변소간은 그동안 한번도 똥을 푼 적 없다는데요
통을 만들 때 한 구멍 뚫었을 거라는 둥 아예 처음부터 밑이 없었다는 둥 말도 많았습니다
그 변소간을 지은 아랫말 미장이 영감은 벼락 맞을 소리라고 펄펄 뛰지만요,
하여간 그곳은 이상하게 냄새도 안 나고 볼 일 볼 때 그것이 튀어 엉덩이에 묻는 일도 없었지요
어쨌거나 변소간 근처에 오동나무랑 매실나무가 그 절에서는 가장 눈데 띄게 싯푸르고요
호박이랑 산수유도 유난히 크고 환한 걸 보면요 분명 뭔가 새긴 새는 것이라고 딱한 우리 스님도
남몰래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요 누가 알겠어요,
저 변소는 이미 제 가장 깊은 곳에 자기를 버릴 구멍을 스스로 찾았는지 도요 막막한 어둠 속에서
더 갈 곳 없는 인생은 스스로 길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어서요 한줌 사랑이든 향기 잃은 증오든 한 가지만
오래도록 품고 가슴 썩은 것들은, 남의 손 빌리지 않고도 속에 맺힌 서러움 제 몸으로 걸러서,
세상에 거름 되는 법 알게 되는 것이어서요 십년 넘게 남몰래 풀과 나무와 바람과 어우러진
늙은 변소의 장엄한 마음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만도 하지만요 밤마다 변소가 참말로 오줌 누고 똥 누다가
방귀까지 뀐다고 어린 그 누가 또 짐작이나 하겠어요
'좋아하는 시(詩 능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등꽃 아래의 사랑/김영현 (0) | 2011.09.22 |
---|---|
늙은 거미/박제영 (0) | 2011.09.22 |
웃음에 대하여/고은 (0) | 2011.09.21 |
다시 산에 와서/나태주 (0) | 2011.09.21 |
칸나/이문재 (0) | 2011.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