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시(詩 능선)

호랑이 피/정양

능선 정동윤 2011. 9. 26. 14:45

호랑이 피/정양

 

 

아주머니가 고개를 넘을 때마다 영락없이

나타나서 떡 하나 주면 안잡아 먹겠다던

호랑이가 있었지요? 떡을 다  빼앗긴

아주머니는 호랑이가 달라는 대로 고개 넘을  때

마다 저고리도 치마도 속곳도 다 벗어줍니다

알몸이 된 아주머니는 보나마다 성폭행도

당했겠지요. 팔뚝도 하나씩 떼어주고

젖통이도 하나씩 떼어주고 두 다리도

하나씩 떼어줍니다 호랑이는 마침내

아주머니를 잡아먹고 아주머니의 아들 딸

까지 잡아 먹으려고 갖은 잔꾀를 부리다가

삭은 동앗줄에 매달려 수수밭에 떨어지면서

수수대에 똥구멍이 찔리어 죽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의 모든 수수대들은

그 호랑이 피로 빨갛게 물둘고 있다는

대목에서 이야기가 끝나지요? 아마

 

할아버지만 보면 옛날에 옛날에를 조르는

옛날얘기 하나 끝나기가 무섭게 또 해달라고

조르는,

'잘 먹고 잘 살았더란다'를 어쩌다

빼먹기라도 하면

영락없이 그 대목을 끼워넣어주기까지 하면서

밤 깊도록 옛날에 옛날에를 졸라대는

손자 녀석에게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들려주는 게

바로 이 호랑이 피 얘깁니다

이심전심인지 이 예기가 시작되면 녀석은

잠들 준비를 하는 것 같습니다

'떡 한 조각 주면 너 안 잡아먹지 어흥'

이 대목만 녹음기처럼 반복하는 사이에

녀석은 마침내 잠이 들곤 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끝까지 해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끝끝내 잠들지 않는 손자에게 들려 줄

이 세상에 호랑이 피 흥겅하게 뿌려 줄

그리운 그리운 삭은 동아줄

녀석도 나중에 손자를 재울 때

이 얘기를 할 건지

안 잡아먹지 안 잡아먹지 안 잡아먹지

아지스함 사주면 파병만 해주면

안 잡아먹지

핵 개발만 안하면 안 잡아먹지

안 잡아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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