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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호수에 흰 병 하나/유병록 2010/동아일보

능선 정동윤 2011. 10. 6. 10:45

붉은 호수에 흰 병 하나/유병록

 

 

딱, 뚜껑을 따듯

오리의 목을 자르자 붉은 고무 대야에 더 붉은 피가 고인다

 

목이 잘린 줄도 모르고 두 발이 물갈퀴를 젓는다

습관의 힘으로 버티는 고통

곧 바닥날 안간 힘

오리는 고무 대야에 벽을 타고 돈다

 

피를 밀어내는 저 피의 힘으로 한때 오리는 구름보다 높이 날았다

죽은 바람이 뼈를 고향으로 운구하거나

노을을 끌고 툰드라 지대를 횡단하기도 했다

 

그런 날로 돌아가자고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더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피

 

날고 헤엄치고 걷게 하던 힘이 쏟아진다

숨과 울음이 오가던 구멍에서 비명처럼 쏟아진다

 

아니, 벌써 따뜻한 호수에 도착했다

발 아래가 방금 전까지 제 안쪽을 흘러다니던 뜨거운 기운인 줄 모르고

두 발은 계속 물갈퀴를 젓는데

조금씩 느려지는데

 

오래 쓴 연필처럼 뭉뚝한 부리가 붉은 호수에 떠 있는 흰 병을 바라본다

한때는 제 몸통이었던 물체를

붉은 잉크처럼 쏟아지는 내용물을 바라본다

 

길고 길었던 여정이 이처럼 간단히 요약된다니!

 

목 아래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발 담갔던 호수들을 차례로 떠올리는 오리는

목이 마르다

흰 병이 바닥난 듯 잠잠하지만

기울이면 그래도 몇 모금의 붉은 잉크가 더 쏟아질 것이다